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 * *
“사람을 징발해간다고? 어디에서 말이냐?”
“청천읍성에서 여러 번 와서 데려갔습니다. 칠무읍성에서도 한 번 왔고요….”
“관할 읍성이 아닌 곳에서도 징발을 해갔다는 것이냐? 그런 법은 땅 위 어느 관성에도 없다.”
“그러니까 저희가 억울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요!”
범식이라 이름을 댄 수염 거한이 시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답답한 속을 토로했다.
시현은 마을 가운데 공터에 자리를 가져다 놓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처음에 두려움과 적의를 드러냈던 하늘인들은 시현이 벽명관의 관인이 아니란 걸 알자 바로 순순해졌다.
시현 덕에 마을의 수원이 복구된 것을 알고는 너나없이 적극적으로 사정을 털어놓았다.
벽명관이 함락되기 전부터도 이 지역의 관인들은 속령 마을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지형이 험하고 하늘인이 많은 큰 마을에 모여 거석에 맞섰다. 소릿골은 그렇게 살아남은 마을 중 하나였다.
수 번에 걸쳐 거석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몫꾼들은 단련되었고 경험과 자신감이 쌓였다. 사람들은 변고 후의 혼란과 어려움에 적응하고 있었다.
소릿골을 위기에 몰아넣은 것은 거석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벽명관이 무너지고 한 달쯤 지나서부터, 그간 코빼기도 안 보이던 읍성 관인들이 지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청천읍성 관리 나리들이 병사를 잔뜩 이끌고 왔습니다. 중한 일에 몫꾼이 필요하다며 사람과 물자를 징발해갔습니다. 역을 마치면 돌려보내 준다 했지만 돌아온 몫꾼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한 번뿐이라던 징발은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다. 멀리 떨어진 다른 읍성에서도 찾아와 우격다짐으로 사람을 끌어갔다.
사람이 줄어든 만큼 마을을 건사하기도 어려워졌다. 다음에 거석 무리가 쳐들어왔을 때는 전보다 사상자가 늘었다.
시현이 범식에게 물었다.
“사람을 차출한 명목이 징병이었느냐, 부역이었느냐?”
“모릅니다.”
“사람들을 데려가 무슨 일에 쓸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단 말이냐? 어디에서 일할 것인지도?”
“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속령 백성에게 역을 부과할 때는 율에 정해진 한도를 넘지 않아야 하고 부역의 이유와 기한을 알림이 마땅하다. 벽명관의 법률은 모르나 제도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시현은 동정적인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너희가 당한 것은 율에 어긋난 부당한 징발이었다. 관성 총령의 동원령이 아니라면 이런 명에 따를 필요가 없다.”
말을 듣고 범식은 더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저희라고 순순히 사람을 내놓았겠습니까. 다른 마을과 목소리를 합쳐 하소연도 해보고 항의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법군 징발관 나리가 몫꾼 정병을 수백 명씩 끌고 와 사방을 도는데 도리가 없었습니다.”
범식 옆에 선 중년 여자가 말을 더했다.
“딱 한 곳, 끝까지 반항한 마을이 있었는데 아예 폐허가 됐습니다. 큰머리와 대열 머리들을 모조리 죽이고, 남은 사람은 아이들까지 모조리 끌고 갔다고….”
되도록 침착하게 이야기를 듣던 시현도 이 이야기는 참지 못했다. 그가 제 무릎을 꽉 쥐며 언성을 높였다.
“그건 관의 징발이라고 할 수가 없다. 무력으로 사람을 납치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맞습니다!”
범식은 거의 울먹거리며 답했다. 둘러선 몫꾼들 중에도 눈물을 닦는 이들이 있었다.
“두 주 전에 또 징발을 나온다는 소문이 돌기에 저희 하늘인끼리만 잠시 몸을 피하기로 했었습니다. 마을이 빈 것을 보면 관인들도 포기할 거고, 그러면 틈을 봐서 돌아오자고….”
“거짓말!”
날카로운 소리로 끼어든 것은 소영이었다. 그가 범식에게 쏘아붙였다.
“돌아올 생각 한 놈들이 농기구 녹이고 종자씨까지 다 들고 가서 까먹어? 분명 갔던 데서 안 풀려서 되돌아온 거겠지! 그런 주제에 우리가 겨울 식량 모으는 걸 알고서 돌아와서 뺏을 맘 먹은 거잖아. 도둑은 네놈들이야!”
“누구 좋으라고 쇠를 놔두고 가, 놔뒀으면 네놈들이 다 팔아먹었을 것이면서!”
사람들은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시현에게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누그러졌던 이들도 다시 독기를 품고 날을 세웠다.
이들을 가장 핍박하는 것은 읍성의 징발관들과 몰려오는 거석이었다. 하지만 분노가 향하는 곳은 서로였다.
“그만하라.”
시현이 소란을 멈추게 하고 소영을 바라보았다.
“너희의 이야기도 듣자. 너희는 본디 유랑민이었다 했지.”
소영은 입술만 깨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현이 이야기를 듣자며 원래 소릿골 살던 무리를 마을에 불러들인 것에 잔뜩 분개해 있었다. 예전 주민들의 편을 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할 만한 것이, 수적으로 열세인 소영네 무리는 한번 들어온 이들을 내쫓을 방법이 없었다.
무리의 다른 이들도 모두 좌절한 기색이었다. 일부는 분기에 차 있었고 대체로는 주눅이 들어 예전 주민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소영 대신 처음에 시현과 이야기를 했던 다리 다친 남자가 나섰다. 그가 머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나으리. 그래도 저희가 영 외지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인근 샘을 따라 이동하며 품을 팔거나 교역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변고 전 몇 년은 마을 몫꾼들과 별다르게 충돌한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변고가 일어나면서 지내기가 힘겨워졌습니다. 사람도 많이 잃었습니다. 수원만 살아 있다면 버려진 마을에라도 의탁하자고 해서 찾은 곳이 소릿골이었습니다.”
“너희도 어려웠겠지. 처음 어떤 사정으로 방랑하게 되었느냐?”
시현의 물음에 소영이 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이유가 따로 있어요? 재수 옴 붙으면 누구든 이 꼴 나는 거지!”
남자가 당황하며 말리려 했지만 소영은 듣지 않고 계속 소리쳤다.
“우리가 원래 방랑족이었던 게 뭐요? 삶터 없이 떠돈다고 괄시하고 지랄하길래 터 잡으려고 한 거잖아요! 수원 지키고, 사람 지키고, 터 있는 놈들이 몫 한다고 으스대던 일들 우리도 여기서 다 했어요! 우린 절대 안 쫓겨나! 차라리 죽여서 끌어내든가!”
“누가 감히 너희를 쫓아내겠느냐. 그리하려는 이가 있다 한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시현의 음성은 태연하고 차분한 만큼 더 단호하게 들렸다.
소영은 기대 못 한 말을 들은 듯 놀란 표정을 했다.
반면 범식과 예전 마을 사람들은 순식간에 안색이 나빠졌다. 그들이 안절부절못하며 항변에 나섰다.
“하지만 나으리, 여기는 우리 마을입니다! 팔십 년도 더 되게 일궈온 마을인데, 어떻게 방랑족 놈들한테….”
시현은 손을 들어 범식의 말을 막고 물었다.
“지금 너희가 겪는 진짜 문제는 관의 부당한 징발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좋다. 주위 읍성의 관인들이 횡포하고 사람을 잡아가는 문제는 내가 해결해주마. 더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마을에 돌아오도록 해라.”
“예…에?”
당연한 것을 말하는 듯한 시현의 말투에 범식은 말문이 막혔다. 예전 주민 무리가 술렁임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중년 여자가 머뭇머뭇 물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나으리께서…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다.”
“…….”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미처 믿지는 못하면서도 기대를 누르지도 못하는 모양새였다.
시현이 덧붙였다.
“이제 너희가 마을을 잘 건사하려면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할 텐데. 지금 마을에 있는 유랑민들과 무리를 합치면 어떠하냐?”
예전 주민들의 반응은 나빴다. 다들 시현의 눈치를 보면서도 한마디씩 반론을 늘어놓았다.
“이놈들은 방랑족 아닙니까.”
“언제 뒤통수칠지 모르는 도적놈들이랑 어떻게 같이 삽니까?”
“변고 이전부터 도적질하고 상단한테 물값 뜯던 놈들이에요. 종자 안 변합니다!”
시현은 제가 제안하고서도 큰 기대를 않았던 듯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그는 소영네 쪽을 보고 물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정착지겠지. 꼭 소릿골일 필요는 없지 않으냐?”
“하.”
소영이 냉소했다. 그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시현을 보았다.
“결국 우리더러 떠나란 말이시군요. 다른 데 어디서 정착하란 말입니까? 뭐, 나으리께서 어디 아무 빈 마을에다가 물길이라도 뚫어주시려고요? 그러면 또 그 동네 놈들이 되돌아와 텃세를 부리겠죠!”
“그런 말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 마을에 물길을 뚫는다는 말은 틀렸다. 내가 수원을 쉬이 되살린 것은 너희가 거석에게서 마을을 지켜 수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었다면 마력석을 궤짝으로 써야 일이 온전했을 것이다. 수원을 복구한 것은 나지만, 수맥을 지킨 것은 온전히 너희 무리의 공이다.”
“아….”
사나웠던 소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이놈들이 우릴 쫓아내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다. 다만 너희도 수십 년 넘게 마을을 지켜온 이들에게 떠나라 말할 수는 없다. 그 점을 이해하겠느냐?”
“…….”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는 것은 소영만이 아니었다. 불만을 늘어놓던 예전 주민들도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시현은 다시 소릿골 예전 주민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너희는 소릿골이 너희 삶터라 말하였지. 너희의 힘이 닿지 못할 때에 삶터를 지켜준 이들에게는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냐?”
범식이 물었다.
“가… 감사를 말입니까?”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너희가 책임져야 할 반민 백성들을 지키고 보살폈다. 거석을 막아내고 수맥 자락을 지켰다. 사람과 터, 물을 모두 지켰으니 몫꾼의 몫을 대신했다 할 만하다. 이러한 공은 너희 하늘인의 제도로 어찌 보상하느냐?”
주민들은 서로 눈만 굴렸다. 대신 호란이 답했다.
“삶터의 수원을 지켜준 은혜는 목숨을 구해준 은혜와 같아요. 피와 살을 아끼지 않고 같은 몫으로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공터의 모두에게 들렸다.
주민들이 서로 마주 보았다. 다들 당혹스러워 보였지만 무리에 감돌고 있던 분노와 투쟁심은 이미 흩어진 뒤였다.
범식이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소릿골 주민들의 눈빛도 변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영네 무리를 향해 서서 자세를 바르게 했다.
범식과 사람들이 가슴 앞에서 주먹을 맞대고 허리를 숙였다.
“우리가 살과 피로 못 갚을 은혜를 입었소. 감사하오!”
“감사하오!”
몫꾼들의 음성이 밤의 공터를 쩌렁쩌렁 울렸다.
숫자와 기세에 밀려 내내 주눅 들어있던 방랑족 무리들은 안도하는 기색이 되었다. 다들 눈이 밝아지고 어깨가 펴졌다. 뿌듯해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소영만은 더 얼굴을 구겼다. 꽉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우린 은혜 따위 베푼 적 없어. 네놈들 좋으라고 한 일이 아냐.”
소영이 내뱉었다. 소릿골 사람들은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소영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린 우리 삶터를 만들려고 한 거야! 감사 따위 하지 마. 네놈들 알량한 감사 따위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물론 사례를 받지 않는 것 또한 너희의 자유다. 나는 다만 너희가 무작정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시현이 말했다. 소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듣거라.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희 사이의 문제는 장차 서로 이야기하고, 내 쪽에서도 제안할 것이 있다. 너와 너희 무리 중에 혹여 이 마을을 떠나고픈 이가 있느냐? 그렇다면 내가 고용하고 싶다.”
소영은 오늘 저녁 세 번째로 놀랄 차례였다. 그가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저희를 쓰시겠다고요? 나으리가요?”
“그렇다. 싸울 수 있는 자를 위주로 신병을 거두되 필요하다면 그 가족도 보호하겠다.”
시현은 모여선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엄숙하게 선언했다.
“나는 이제부터 청천읍성에 가서 읍감과 부당한 징발에 관련된 자들을 파면하고 흐트러진 제도를 바로잡을 것이다. 손댈 일이 한둘이 아닐 터이니 나를 도와 일할 자를 구하려 한다. 따를 이가 있느냐?”
“…….”
공터는 완전한 침묵에 싸였다.
소릿골 주민이고 방랑족 무리고 아무도 입을 열거나 뭐라 말하지 않았다. 눈 굴리는 사람조차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과 다르자 시현은 조금 의아해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나설 이가 없느냐?”
사람들은 여전히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보다 못한 단이 다가와서 귀띔했다.
“나리님, 여기 와서는 사람들한테 누구시라고 이름을 안 대셨습니다.”
시현이 단을 올려다보았다.
“안다마는. 소문이 퍼지면 좋지 않으니 되도록 행적을 숨기자고 하지 않았느냐?”
단이 한숨을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름만 숨긴다고 신분이 숨겨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허언증 환자 같이 보이십니다.”
“…….”
시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는 몇 번 입을 열었다가 닫고 다시 사람들을 향했다.
시현이 미적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음. 나는 남운관의 완시현 문이다. 지역의 제도가 심히 흐트러져 문령으로 징치하고자 하니, 함께 일을 바로잡을 사람을 구하고 싶다….”
시현이 제 이름을 대면서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호란은 처음 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