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 * *
시현이 신상을 드러낸 뒤 공터에는 다시 한번 적막이 내렸지만, 이번 선언은 아까 것보다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허둥거렸다가, 절했다가, 용서를 빌었다가, 진정한 다음에는 희망에 찼다.
돌 인간을 잡으러 다닌다는 완씨 시문의 소문은 변고 후 모든 동네에 퍼져 있었다. 그라면 연고 없는 마을에 무작정 자비를 베푸는 것도, 느닷없이 아무 치읍감을 파면하겠다 선언하는 것도 다 말이 되었다. 문이라면 정말로 마을을 구해줄 수 있었다.
그 후 시현은 밤이 깊도록 사람들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소릿골 주민 무리에겐 하소연하고픈 것이 더 남아 있었고 방랑족 무리는 곧바로 거취를 정하기 어려워했다. 일행에게 고용되어 떠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고 소릿골에 미련을 못 버린 이들도 있었다.
시현은 사람들에게 다음 날 오전까지 생각을 정하라 말미를 준 후 자리를 파했다.
거처에 돌아온 뒤 호란이 시현에게 물었다.
“소영이랑 그… 무리들을 고용하실 거예요?”
“그쪽이 서로에게 이익이라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일행이 필요하고 저들에게는 제삼의 선택지가 필요하니까.”
벗은 답호, 도포, 두루마기를 차례로 정돈하며 시현이 말했다.
“말은 은혜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한번 싸움하고 피 흘린 무리끼리 합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당장은 이야기의 흐름으로 화해했어도 지내다 보면 다시 불화가 생기기 쉽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이 감정이 상한 이들은 우리가 데려가고, 스스로 결심하여 정주하려는 이들을 남기면 그나마 충돌이 덜하지 않겠느냐. 마을 주민들 입장에서도 새 주민의 숫자가 적은 쪽이 포용하기 좋을 것이다.”
“네….”
호란은 어딘가 안달하는 기색이었다. 시현이 쓴웃음을 짓고 물었다.
“마음에 걸리느냐? 저들이 유랑민 출신이라서?”
“으, 그게.”
호란이 어물거렸다.
사실 그는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소영네 무리가 방랑족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 소영과 호란은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사실 방랑족 무리 중에도 괜찮은 사람은 있어요. 그건 저도 아는데요.”
호란은 변명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 전형적인 서두라서 단은 무심코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방랑족이 사방에서 문제 일으키는 건 사실이잖아요. 상단 털거나 마을 습격하는 거 다 방랑족이고. 장사나 품팔이 하다가도 툭하면 싸움 내고, 약속 안 지키고….”
“지금 굳이 그 얘기를 할 필요가 없는 거 같은데.”
단은 결국 호란의 말을 끊었다.
자기방어 심리로 남 욕하는 걸 놔뒀다가 좋은 꼴을 본 일이 없었다. 선을 넘기 전에 잘라줘야 했다.
단의 내심으론 상관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소영네를 고용한 뒤 내부에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제일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단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단이 물었다.
“알지? 사실 일행이 아쉬운 건 우리 쪽이야. 넌 저 사람들 고용하는 걸 반대하는 거야? 아니면 고용을 하더라도 믿지는 말자는 얘기를 하는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딱히 이 사람들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호란이 허둥지둥하더니 고개를 약간 떨궜다. 그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아까는… 내가 잘못한 거야?”
“왜 그걸 나한테 물어봐?”
예상했던 말이 나왔으므로 단은 즉시 후퇴했다. 단의 목표는 문제를 명백히 해서 엉뚱한 불똥을 막는 것까지만이었다. 나머지는 알 바 아니었다.
호란은 할 수 없이 시현 쪽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시현에게 따끔하게 책망을 받으면 속은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현도 난처한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내가 이 문제에 잘잘못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네? 시문 님이 왜요?”
“내가 기억하는 것이 있는데. 남운관에서 병사로 지낼 때 호란 너는 분명 원외군에 편성되었었지.”
“네. 맞아요.”
“그리고 관성 주변에서 하늘족 유랑민을 쫓아내는 것은 총령부가 원외군에게 내린 임무였다.”
“그것도 그런데요….”
“보거라. 네게 하늘족 유랑민과 싸우라 요구한 것은 우리가 아니냐. 관이 제도와 명령으로 유랑민을 배제하면서, 백성에게는 서로 선의와 이해를 보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일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내가 부끄럽구나.”
“아녜요. 그래도 이건 남운관하고 상관없죠. 시문 님 때문은 더 아니고요.”
호란은 시현의 말뜻을 이해하면서도 수긍하지는 않았다.
“제가 방랑족 싫어한 건 남운관에 오기 전부터였어요. 약바위골서 놈들하고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싸웠다고요. 걔들이 어떤지 아세요? 한번은요, 우리 마을에 오던 상인이요….”
“아니, 너 또 그쪽으로 가지 말고.”
호란은 또다시 ‘왜 방랑족이 못 믿을 놈들인가’를 역설하기 시작했고 단도 재차 차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잖아. 방랑족 중에 문제 있는 사람 많은 건 맞잖아. 방랑족을 방랑족이라고 한 게 뭐 잘못이야?”
“내가 언제 뭐랬어? 근데 욕먹은 건 저쪽인데 왜 네가 억울한 것처럼 말하냐?”
“으…. 역시 사과해야 될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어우 단, 얄밉게 좀 굴지 말고!”
호란과 단은 진전 없는 옥신각신에 들어갔고 시현은 시현대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잘잘못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한 것은 그 나름의 진심이었다.
남운관이 고액의 시민세까지 매겨가며 외부 인구의 유입을 제한하는 것은 1차적으로는 물과 식량 사정 때문이다. 남운관은 유전과 광산에 기반을 둔 도시라 규모에 비해 식량 자급률이 낮았다. 인구 증감은 철저히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방랑족이 기피당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남운관에서는 인구 중 하늘인의 비율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수가 늘수록 통제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무력을 타고난 하늘인은 이용가치가 높은 만큼 상시적 견제의 대상이었다.
하늘인을 관성의 병사인 자와 아닌 자로 나누고, 관성에 충성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로 나누며,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정책적인 것이었다. 방랑족의 배제는 그 시작과 끝이었다.
그리고 팔대관성과 그 이전의 왕국은 세상의 제도와 문화에 수백 년간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호란은 제가 방랑족을 질색하는 것이 온전히 제 경험과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시현 쪽에선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사이 호란과 단의 대화는 일종의 결론 비슷한 것에 도달했다.
“장유 말이 맞아. 단은 진짜 사람이 못됐어. 착한데 못됐어.”
“둘이 데면데면하더니 언제 짬 내서 내 욕했냐? 그리고 못됐는데 착한 건 뭔데?”
“반대야. 착한데 못됐어. 그거 두 개 엄청 다르거든.”
“그니까 그게 뭔데?”
“단 진짜 못됐다고.”
호란은 입을 삐죽이더니 수건을 들고 방을 나갔다. 당장은 생각하는 걸 포기한 모양이었다.
시현은 호란이 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단이 핀잔했다.
“말할 자격 없다느니 젠체는 혼자 다 하고서, 또 신경은 쓰이냐?”
“그러게 말이다. 나도 뻔뻔하구나.”
“말이나 못하면… 됐어. 일단 같이 가기로 정해지면 알아서들 잘 지낼 테니까 너무 걱정 마.”
“그럴까?”
“응. 보나마나야. 저쪽 무리야 오만 데서 치이고 싫은 소리 듣는 데 익숙할 거고, 호란이도 할 일 하는 데 자기 사감 집어넣는 애 아니잖아. 전에 길이하고도 합 잘 맞췄고.”
지나간 인연이 언급되자 시현이 호기심을 보였다.
“최길 말이냐? 최길과 호란이 왜?”
“몰랐냐? 걔하고 호란이하고 서로 개싫어했잖아.”
“어째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단은 이제 놀라지도 기막히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본인이 의도적으로 눈 감고 귀 막고 다니는 건데, 모를 건 모르게 내버려두는 게 본인을 위한 일이었다.
“원래 길이 걔는 류사예 빼고 모든 사람을 싫어해. 참고로 걘 너도 싫어해.”
“그, 그랬느냐….”
시현이 풀이 죽었다. 조금 있다가 그가 소심하게 물었다.
“최길도 나한테 빈정이 상한 것 같더냐?”
단은 그 말을 무시하고 하늘인들의 품삯과 고용계약서 이야기를 꺼냈다. 시현은 바로 화제를 따라왔지만 한층 더 풀이 죽었다. 단은 그것도 무시했다.
이 뒤끝 길고 옹졸하고 쪼잔한 인간들. 쓸데없이 이런 데서만 평범해 빠져선.
이 인간이나 호란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 아량 있고 초탈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제 문제로 들어가면 남들하고 똑같이 바보가 된다.
단은 절대 거기까지 보듬어줄 생각이 없었다. 다른 뒤치다꺼리만으로도 해가 지고 남았다.
* * *
다음 날 정오, 일행은 스물한 명 하늘인 무리를 이끌고 청천읍성을 향해 떠났다.
소릿골에 남은 이들은 마을 밖까지 나와 수레에 대고 절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외치며 일행을 전송했다.
방랑족 무리에는 소릿골에 남고 싶어 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특히 어린아이나 노인을 책임진 이들은 겨울을 앞두고 정착이 절실했다.
소릿골 주민들도 생각보다 선선히 이들을 받아들였다. 한 명이라도 몫꾼이 더 필요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었다.
대신 소릿골에서도 몫꾼 열 명을 뽑아 일행에 딸려보냈다.
청천읍성까지 시현을 따라가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를 확인하고, 가능하면 노역에 끌려간 몫꾼들을 마을로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최종적으로 일행을 따라온 무리는 소영을 머리로 한 방랑족 열한 사람, 편수라는 남자를 머리로 한 소릿골 몫꾼 열 사람이 되었다. 전체의 지휘는 호란이 맡았다.
일행이 청천읍성에 이른 것은 다음 날 오후 느지막이었다. 하필 읍성은 열 개 가까운 거석에게 공격을 받는 중이었다.
그래도 대장석이 끼어 있지 않아 읍성 단위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적은 아니었다. 마력석이 있으면 물론이고, 사람 수만 충분하면 하늘인 몫꾼들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만했다.
하지만 청천읍성의 대처는 엉망이었다. 법군은 성벽 위에서 갈팡질팡할 뿐 하는 일이 없었고, 오합지졸의 하늘인 대열 몇 무리가 겨우 성벽 앞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그사이 거석들은 성 바깥의 밭과 민가를 마음껏 짓밟았다.
마을을 위협할 때 데리고 다녔다던 수백의 정예병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멀찍이서 이 광경을 본 시현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는 거리를 줄일 시간도 아까운 듯 수레 앞을 활짝 열게 하고 마력석을 꺼내 들었다.
“명에 따르라. 열파하라!”
시현이 외치자 성벽 앞의 거석 여덟아홉 개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수레 양쪽에서 달리던 하늘인들도 놀랐지만 읍성 몫꾼들의 놀라움에는 미치지 못했다. 눈앞까지 달려들던 거석이 느닷없이 무너져내리자, 대열은 잔뜩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성벽 위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마부석에 발을 딛고 선 호란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 방금 거 읍성에 있는 땅님들이 해준 줄 아나 보네요. 저런 건 시문 님 아니면 아무도 못 하는데.”
“이렇게 먼데 저 사람들이 짐작이나 하겠어? 조금만 더 성에 가까이 가서 공격했으면 마력석도 안 쓰고, 문께서 행차하신 위엄도 만방에 펼쳤을 텐데.”
단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약간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안 그런 척해도 나리님은 진성 정치인이라, 전에는 뭘 하든 전시효과를 꼭꼭 챙겨 버릇하셨는데. 어느 사이 생색도 잃고 인내심도 잃고 절약 정신도 잃고…. 만사가 무상하네요.”
“실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
시현이 화를 냈다. 단은 픽 웃고 말에 채찍질했다.
호란은 마부석에서 펄쩍 뛰어내려 무리의 선두에 섰다. 양옆의 대열도 속력을 올렸다.
곧 읍성에서도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일행을 알아보았다. 성벽 위의 법군들이 뭐라 지시를 하고, 성안으로 돌아가려던 몫꾼들도 대열을 갖추며 경계하는 태세를 보였다.
단은 성 정면의 대로 한가운데에 수레를 세웠다.
수레 옆의 몫꾼들을 정렬하게 한 뒤, 맨 앞의 호란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청천의 전관은 성을 나와 백배로 위를 맞으라! 무상 완씨 시문께서 당도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