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 * *
“문이 찾아왔다니, 말이 되오? 이제는 하다하다 사칭까지 유행을 하나?”
문이 영접례를 요구한다는 보고에 청천읍성 치읍감 박씨 한예가 처음 한 말이 이것이었다.
격을 사칭하는 것은 세상의 근간을 흔드는 대죄였다. 신분과 이유를 막론하고 극형에 처해지기에 변고 이전에는 아무도 감히 엄두를 못 냈다.
헌데 옆 관성의 권세가가 한번 문을 자칭하고 나니 이제는 아무나 나서서 문의 세도를 팔려고 든다. 과연 세상이 제대로 망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보나 마나 마력석이나 인력을 뜯어내려는 사기꾼이겠지. 교문께서 이런 데까지 오실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이… 교문이 아닙니다. 완씨 시문을 칭명했습니다.”
“교문도 아니고 감히 시문을 자처해? 허참. 정말 갈 데까지 간 놈들이로소.”
한예는 끌끌 혀를 찼다.
시문이 변고를 바로잡으러 사방을 다닌다는 소문이야 들었다. 하지만 한예는 그 말을 한 끗도 믿지 않았다.
다들 있는 마력석을 움켜쥐고 제 근거 지키기에 급급한 시국이다. 완씨 시문이라고 다르겠는가. 그가 무슨 득을 보자고 남운관을 나와 돌아다닌단 말인가?
참고 견디면 시문께서 세상을 구하실 거라니, 무슨 종교도 아니고. 그야말로 무지렁이들이나 혹할 헛소리였다.
한예가 시큰둥해 있자 보고를 가져온 예관은 안달을 부렸다.
“제가 위를 분별할 눈은 없습니다만 온 이가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일단 나이도 맞고…. 무엇보다 직전에 쳐들어온 거석 여럿을 위력으로 한 번에 부수었습니다. 마력석도 상당히 지녔을 겁니다.”
“허참, 갈수록….”
“사칭에 속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혹여라도 문령을 거스르게 되면 대역입니다. 속는 척이라도 하고 나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가보라니? 설마 치읍감이 직접 영접하라고 하던가?”
한예가 짜증 섞인 소리로 묻자 예관은 머리를 숙였다. 그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했다.
“청천읍성 전관이… 관인 모두가 성밖에 나와 부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관을? 심지어 성 밖에? 정말이오?”
한예는 그때서야 가슴이 철렁했다. 한낱 사기꾼이 벌이는 일이라기엔 규모가 컸다.
느닷없이 전부 나와서 꿇어 엎드리라니. 그건 사기를 치러 온 놈이 아니라 약탈 강도질 하러 온 놈이 할 만한 짓이 아닌가.
하지만 극상격이 예를 요구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일이었다.
극상격, 특히 공격 법사가 대상이라면 의전과 목숨 구걸 사이에 아무런 의미 차이가 없었다.
머리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천의 하나 만의 하나 정말 문이라면…. 위씨 교문도 아니고 완씨 시문이라면.
목덜미가 쭈뼛해진 한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일단 얼굴은 보아야겠소. 내가 먼저 성문을 향할 테니 다른 관인들도 소집해두시오. 가짜면 가짜인 대로 대역으로 전관 앞에서 재판함이 마땅하니….”
굳이 가짜일 경우를 운운하며 강한 척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예관이 초조하게 말했다.
“벌써 각사와 관인 집안에 전갈을 보내 사람을 모으는 중입니다. 거석 때문에 소집되었던 법군은 이미 성문 앞에 부복해 있습니다.”
“그 말을 왜 이제 하시오!”
한층 마음이 급해진 한예는 예관을 꾸짖으며 관아 밖으로 달려나갔다.
변고 이전엔 제 손끝의 화력을 믿고 세상을 다 우습게만 보던 것이 동네 법군들이었다. 그것들이 전부 머리를 박았다는 건, 상대가 법술로 그만한 위력을 보였다는 뜻이었다.
한예는 관아 앞에 모여 술렁거리던 다른 관인들을 뒤에 달고 서둘러 성문을 향했다.
그래도 성문을 나서 문이라 자칭하는 무리를 보았을 때, 한예는 조금 희망을 가졌다.
문의 행차라기엔 무리의 규모도 행색도 초라했다. 한 대뿐인 수레는 형체만 버젓했지 황야의 모래 먼지를 뒤집어썼다. 양옆에 도열한 호위들은 대부분 거친 옷을 입고 더벅머리를 한 것이 부랑자나 겨우 면한 몰골이었다.
그 앞에 도포를 차려입은 한 사람이 호위 한 명만 거느리고 접는 의자에 부동으로 앉아 있었다. 연령대는 익히 알려진 완씨 시문과 맞아 보였지만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의심을 보이고 뻣뻣하게 나가자니 분위기가 도와주지 않았다.
한예보다 먼저 나온 양부 관인들이 한 사람도 빼지 않고 성문 양쪽에 부복하고 있었다. 대체 뭘 보고 기가 죽었는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도 다 못 들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공연히 마음이 흔들렸다. 한예는 겨우 체통을 붙들 만큼의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의자에 앉은 이는 십칠 세 쯤 되어 보였다. 소년티를 차츰 벗어가는 참이었지만 약관은 아직 멀었다.
어깨에 닿는 붉은 고수머리는 끝단까지 윤이 돌았고, 피부는 햇볕과 바람을 탄 티가 나는데도 흠 없이 깨끗했다. 은광이 비치는 백색 도포와 옥색 운문단으로 지은 방령답호는 새것은 아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귀품이었다.
그의 얼굴에 내린 무표정을 알아볼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한예는 슬슬 정말로 망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상대는 딱히 한예나 누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바라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어 보였다. 그는 그냥 모든 것을 무던히 참아주고 있었다. 아주 산과 같은 인내심으로.
이자가 사기꾼이라서 연기를 하고 있다면, 이자는 최소한 고관과 연줄이 닿은 사기꾼일 것이다. 분노한 극상격이 어떤 감정 상태가 되는지 한예보다 더 많이 보고 들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분노한 극상격 본인이든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냐든가, 문령패를 배견할 수 있겠느냐든가, 물어보려던 말들이 목구멍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뭐 하나 상대를 읽으려고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한예는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땅에 무릎을 댔다.
“청천읍성 치읍감 박한모 예가 위 없는 이를 뵙사옵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옆에 선 호위가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청천 일동은 들으라. 전관이 대령했다면 문께 고두배하라.”
“…….”
한예는 어쩌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잠시 사이,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예관이 한예의 옆으로 나서며 영접례를 진행했다.
“전관 기립하시오!”
일어서는 한예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결국 자신의 판단으로 문의 영접례를 진행한 모양이 되었다. 이제는 앞에 앉은 이가 진짜든 가짜든 돌이킬 수가 없었다.
예관이 떨리는 소리로 인삿말을 읊었다.
“벽명관 관하 청천의 상하 관료가 무상을 뵙습니다. 첫비 같은 자비시며 강물 같은 은혜시며, 일세에 감히 원치 못할 문치자시여. 이제 미문한 자들이 무상 전에 엎드리는 영광을 입습니다.”
“무상 전에 배례합니다!”
관인들이 입을 모아 외치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한예도 엉거주춤 다시 엎드렸다.
원래는 여기서 예관의 인도로 다시 기립하고 인삿말을 바꾸며 두 번 더 절한 다음 마지막에 땅에 이마를 대는 고두례가 이어져야 했다.
하지만 예관이 인도의 말을 하기 전에 도포 입은 이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났다.
몇 걸음 걸어 나온 그가 한예 앞에 섰다.
또렷한 음성이 울려펴졌다.
“완시현 문이 명한다. 청천 치읍감은 고개를 들라.”
“명을 받듭니다….”
한예는 고개를 들고 시문이라 칭한 이를 올려다보았다.
녹회색 눈에 차가운 무관심이 어려 있었다. 경멸과도 흡사한 빛이었다. 어째선지 수십 년 전 갓 관직에 올라 사방에서 까이고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역시 이건 진짜일지도. 그냥 진짜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 다른 고민이 생겼다. 진짜라면 완씨 시문이 뭐하러 이곳을 찾는단 말인가? 돌 인간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을까?
그렇다면 마력석이나 병사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청천에는 여력이 거의 없었다.
근심하는 한예에게 시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청천 치읍감에게 문령으로 명한다. 당장 네 죄를 고하여라.”
갑자기?
한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관인들도 당황했는지 등 뒤에서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죄, 죄라니, 제가 무슨….”
“감히 되묻느냐. 지은 죄가 너무 많아 무엇부터 말할지 모르는 것이냐?”
시현의 목소리가 매서워졌다. 관리들의 술렁임이 끊어지고 성문 앞의 분위기가 차게 가라앉았다.
한예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솟구쳤다. 우리 기를 완전히 죽이고 시작하려는 건가? 명분부터 잡으려고? 도대체 뭘 얼마나 뜯어낼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한예는 적당히 상대의 마음에 맞을 만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덕이 없고 미력하여, 변고의 와중에 관할지를 보살피는 데 부족함이 많았고….”
“그만두어라.”
또다시 말이 끊겼다. 앞에 선 이는 이제 차가운 경멸 대신 은은한 화를 드러내며 말했다.
“단 한 번 기회를 주겠다. 박한모는 변란의 와중에 청천 치읍감의 권세를 남용하여 율령을 어기고 전횡한 일을 전부 자백하라.”
한예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명분상의 우위를 쥐려는 게 아니었다. 진짜 죄목을 요구하고 있었다.
죄를 고하면 봐주겠다거나 고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거나 밀고 당기는 말도 없었다. 눈앞에 절벽이 선 것 같았다.
한예는 억울함에 속을 끓였다. 도대체 뭘 바라고 나한테 이러는 건가. 변고 이후 엉망이 된 건 어디나 마찬가지일 텐데.
반발심과 함께 불쑥 의심이 되돌아왔다. 그 시문이 나 따위를 닦달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역시 태도만 그럴싸한 사기꾼이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의심하거나 거스르려면 처음부터 했어야 했다.
이미 모두의 앞에서 문임을 인정했다. 그다음부터는 상대가 뭘 요구하든 복종하지 않으면 대역이었다.
한예는 그제야 상대가 다짜고짜 영접례부터 시킨 이유를 깨달았다. 완전히 당했다.
한예는 말을 못 하고 부득부득 이만 갈았다.
시현이 한예로부터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가 부복한 다른 관인들을 향해 말했다.
“이자는 죄를 인정할 마음이 없구나. 하면 연관된 다른 이에게 자백할 기회를 주겠다.”
“소관이 고발하겠습니다!”
한예가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바로 옆에 있던 예관이 일순의 지체 없이 소리쳤다.
“고하라.”
시현이 명하자 예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읊기 시작했다.
“소관은 청천 의전사 예관 김민영 지라 하옵니다. 감히 문령을 받들어 고발합니다. 청천 치읍감 박씨 한예는 율에 정한 격식을 거치지 않고 속령의 군수품과 병사를 타 읍성에 양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금품과 마력석을 착복하였으며, 총령의 인가를 얻지 않았으며, 군수창고의 장부를….”
이 시발것이! 한예는 목이 다 막혔다. 고개를 들고 욕을 해야 하는데 혈압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사이 발고하는 목소리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한예를 제쳐가며 각종 전횡에 나섰던 이들까지 이름을 대고 있는 죄 없는 죄를 한예 앞으로 돌리고 있었다.
한예는 겨우 머리를 들었다. 입에서 경황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시문을 자칭한 이는 한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뒤에는 기술자도 장돌뱅이도 아니게 허술한 차림을 한 남자가 서서 여기저기서 발고하는 내용을 받아적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관인들만이 아니라 읍성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몰려나와 있었다. 하늘인 병사는 물론이고 반민 주민들까지 웅성대고 손가락질하며 한예가 꿇은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게 다 말도 안 됐다. 이 지역의 정식 통치자인 자신이 여기서 왜 이런 굴욕을 당하고 있는가.
저 애송이가 시문일 리도 없고, 설령 정말 시문이라 해도 꼭 따를 이유가 없었다. 문이 만인지상이라지만 법력도 없는데 격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격에 의미가 없다면 자신이 청천의 치읍감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세상은 정말 제대로 망한 것이다.
* * *
시현은 청천읍성 안에 발끝 하나 디디지 않은 채로 박한모 예를 파면했다.
벽명관이 정식으로 발령한 치읍감을 타지인인 시현이 직접 파면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았으므로, 문령으로 치죄를 명하고 이를 명분으로 부읍감 이하 청천읍성의 관인들이 탄핵하는 형식을 취했다.
박한모 외에도 고발당한 사람이 있었지만 당장은 더 치죄를 논하지 않았다. 읍성 안팎에서 이루어진 죄와 범법, 문제 상황을 다 듣는 것만으로 해가 져 성 밖에 횃불을 밝혀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