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 * *
“무례한! 제대로 소속과 직위를 밝히시오! 그대가 무어라고 지금 이름 두 자 달랑 대고서 위의 앞에서 입을 놀리는 것이오!”
단의 음성은 기세가 등등한 것이 다른 사람 같았다.
단은 평소 시현의 이름을 업고 위세 부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판단에 필요하겠다 싶을 때는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
태청의 얼굴에 슬쩍 불쾌한 빛이 어렸다. 그가 시현에게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단구 치읍감의 인가 아래 읍성을 대리한 자입니다. 어르신 앞에서 무람치 못하오나 저의 판단으로 왕래하시는 분께 질문을 드릴 수 있습니다.”
“과연 네가 심히 불근신하다.”
시현이 말했다.
“굳이 대리한다 말함은, 너는 단구읍성의 관군이 아니겠지. 말은 번드레하나 네가 어디에서 무엇 하는 자인지 무엇 하나 확실히 밝힌 것이 없다. 하면서 뒤에 군세를 벌여놓고 내 내력을 알고자 하는 것이냐.”
질책을 받고도 태청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매끈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을 뿐이었다.
시현이 다시 말했다.
“나는 남운관의 완시현 문이다. 네 이름과 소속을 대거라.”
시종 태연하던 태청은 비로소 놀란 얼굴이 되었다.
“문이라 하셨습니까?”
“감히 되묻는가! 당장 엎드려 예를 표하라!”
단이 다시 한번 고함쳤다.
태청은 눈을 가늘게 했지만 더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순순하게 세 걸음 뒤로 물러난 다음 제 부관들과 함께 절하고 머리를 땅에 댔다.
시현은 말없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지만, 태청은 바닥에 머리를 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현이 천천히 말했다.
“고개 들기를 허한다.”
“삼가 은혜를 받듭니다.”
태청과 부관들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으나 여전히 손과 무릎을 땅에 댄 채였다.
“일어서도 좋다.”
한 번 더 시현의 명이 떨어지자 세 사람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시현은 이들 모두가 극상격을 대하는 예법을 몸에 익히고 있음을 눈치챘다.
태청이 부관들은 뒤에 두고 혼자만 앞으로 나와 정식으로 이름을 댔다.
“대 대운관 남방장군 태청이 대 남운관 완씨 시문을 뵙습니다. 무량한 영광입니다.”
“대운관인가.”
시현이 중얼거렸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관성이 무너져 벽명관 속지 전체가 혼란에 빠진 지금, 타 읍성 여럿에 간섭하고 군대까지 제공할 수 있을 만한 세력은 흔하지 않았다.
“대운관 군인이 벽명관 속령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론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벽명관 총령부가 인가한 바로 관성의 영역을 침범한 일이 아닙니다.”
“단구읍성을 대리한다 함은?”
“그 또한 명의 일부입니다. 관성 간의 외교 문제라 뭇사람 앞에서 소상히 밝힐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좋다. 자세한 이야기는 단구 치읍감을 만난 자리에서 하마.”
“문께서는 역시 단구로 향하시는 길이셨습니까?”
“그렇다. 다만 너는 내가 온 이유를 지금 이 자리에서 듣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시현이 말하고서 태청을 노려보았다. 태청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한 걸음 물러섰다.
“성으로 향하시지요. 저희가 앞서 길을 내겠습니다.”
“그 전에.”
시현이 엄하게 말했다.
“내 호위가 와서 말하기를 너희가 사람 여럿을 수레에 가둬 끌고 가고 있다 하였다. 어찌 된 일이냐?”
태청의 얼굴에 또다시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부드럽게 답했다.
“아, 저자들은 모두 방랑족입니다. 위께서 친히 신경 쓰실 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어찌 된 일이냐 물었다.”
“어찌 물으시는지요? 위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방랑족은 사방을 다니며 노략질하는 자들입니다. 단속하는 것은 치안을 위한 일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를 무작정 잡아가는 것을 두고 치안을 단속한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납치다.”
태청의 검고 짙은 눈썹이 크게 꿈틀했다. 그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문이시여. 제 주제넘은 말을 용서치 마소서. 허나 어찌하여 보지도 않으시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저희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공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 방랑족들은 죄인이 맞습니다.”
“저들이 무슨 수로 죄를 짓겠느냐.”
시현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 일대가 모두 황폐하여 사람이라곤 없다. 저들이 대체 누구를 노략하고 무슨 치안을 어지럽힌단 말이냐? 정녕 노략을 한 자는 단구 관할지를 이토록 텅 비게 만든 자들이겠지. 그들부터 단속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느냐?”
시현의 말은 노골적인 가시를 담고 있었다.
태청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의 표정도 몸에 어린 기운도 차분히 갈무리되어 아무 요동이 없었다. 하지만 호란은 태청이 적대적인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는 걸 바로 느꼈다.
지금 시현은 태청과 대운관이 모든 문제의 배후란 걸 확신하고 있었다.
태청 역시 시현이 무슨 목적으로 단구읍성을 딱 집어 찾아왔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이 방랑족 호송 문제는 앞으로 두 사람이 다투게 될 징발 문제의 전초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태청은 얼굴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가 핑계를 더 늘어놓았다.
“일이 나기 전 사전에 단속하는 것 역시 치안의 일부입니다. 방랑족은 천성이 불량하여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늘족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일입니다. 거느리신 호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호란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호위대 선두에 서 있던 소영이 아득 소리가 나게 이를 악물었다.
시현은 태청이 논점을 비트는 데 말려들지 않았다. 그가 엄중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한 번 물을 터이니 생각한 뒤에 답하여라. 너는 정녕 저들을 치안 때문에 잡아들인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느냐?”
태청이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손하게 몸을 낮춘 자세였으나, 키가 워낙 컸기에 시선이 마주 닿자 마치 시현을 내려다보는 듯한 모양이 되었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친 것은 잠깐에 불과했다. 태청이 졌다는 듯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시문이시여. 저는 그저 명에 따라 역할을 하는 군인일 따름입니다.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시현이 곧바로 말했다.
“죄를 범한 증거가 없는 자, 읍성의 호적 대장에 실리지 않아 징발당할 이유가 없는 자, 자의로 너희에게 의탁하지 않은 자는 모두 풀어주고 남은 자만 데려가거라.”
데려가라는 말로 끝났지만 실상은 전부 놓아주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태청은 더 이상 반발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말씀대로 하겠다 답하더니 바로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호송 수레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우르르 이쪽으로 달려왔다. 다들 하늘인이었지만 황야를 떠돌며 주리고 지친 데다 태청과 그가 거느린 병사들이 무서워 꼼짝없이 끌려가던 중이었다.
사람들은 엎드려 절하고 울면서 감사를 표했다. 시현은 단을 시켜 사람들에게 식량과 노자 얼마간을 건네고 갈 길을 잡아주게 했다.
시현이 하는 것을 보고 있던 태청이 유들유들하게 말을 걸어왔다.
“시문께서는 과연 자비롭기가 한량없으십니다. 듣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네게 자비가 부족한 것이다. 아니면 네게 명령한 자에게 부족하거나.”
“하하. 문이시여, 제게도 자비를 보여주소서. 제 위까지 함께 말씀하시면 제가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태청이 능청을 떨더니 목소리를 더욱 부드럽게 했다.
“다만 지금은 보통 어려운 시국이 아니지 않습니까. 작은 연민에 구애되시기보다는 대의를 돌보셔야 할 때가 아닌지요.”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어려운 때에 서로 연민하지 않으면 사람이 대체 언제 서로를 돕는다는 말이냐?”
“과연 인(仁)에 닿으셨습니다.”
태청이 찬사를 바쳤으나 시현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명했다.
“앞장서거라. 단구 치읍감 앞에서 네게 앞뒤 사정을 들을 것이다.”
“예. 성에서 뵙겠습니다.”
태청은 한 번 더 깊이 머리를 숙인 후 부관들과 함께 제 부대로 돌아갔다.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편수와 소릿골 몫꾼들이 시현에게 달려왔다. 다들 정색이 되어 있었다.
“저놈들입니다! 남자 왼쪽에 서 있었던 붉은 옷 입은 여자가 우리 마을에 징발 왔던 부대 머리였습니다!”
“저 키 큰 남자는 본 적 없지만, 여자 쪽은 두 번이나 왔었습니다. 저 여자가 왔을 때 유독 혹독하게 굴어서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징발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저들일 것이다.”
시현이 대답했다.
편수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대운관의 장군 나리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운관은 이웃 관성이 아닙니까. 왜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대운관과 벽명관의 속령은 서로 맞닿아 있었으나 단구읍성은 벽명관 속령 안쪽으로 딱히 경계지가 아니었다. 대운관 병사들이 이곳에서 제 속령처럼 활개 치고 다니는 것은 명백하게 팔관성의 자치 조약 위반이었다.
“관성이 무너진 틈을 타 대운관이 무슨 수작을 하는 모양이다.”
“보나 마나 벽명관에서 나는 마력석을 노리는 것이겠지요. 벽명관 총령부의 인가까지 운운하는 것을 보니 단구읍성 말고 다른 지역까지 발을 걸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 처리를 다 마치고 돌아온 단이 말했다. 시현이 물었다.
“마력석 광산은 대운관에도 숱하게 있지 않으냐?”
“원래 있는 놈들이 더하지 않습니까.”
단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원래 대운관은 벽명관 다음으로 마력석 산출이 많은 땅이었다.
하지만 일전 온성이 알려주길 대운관은 변고가 나자마자 마력석 교역을 전면 금지했다고 했다. 마력석이 관성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반면 벽명관의 마력석은 변고 이후 거래량이 폭증했다. 벽명관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데다 식량 자급률도 떨어지는 지역이라, 가격이 폭등한 마력석 거래를 관이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팔려나간 마력석 중에 대운관으로 들어간 것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운관에서는 더 많은 마력석을 원하고 있었다.
단은 고개를 들어 저편을 바라보았다.
마을 광장 너머에서는 태청이 대운관 병사들을 정렬시켜 둔 채 이쪽이 출발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이 다시 시현을 향했다.
“단구읍성에 도착할 때면 해가 진 뒤일 겁니다. 치읍감과 논의하는 것을 내일로 미루시면 어떻겠습니까?”
“가능이야 하다마는, 징발된 사람들은 하룻밤이 급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우린 지금 벽명관과 단구읍성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확실한 건 벽명관이 대운관에게 완전히 물렸다는 것 하나뿐이지요. 밤사이에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아보겠습니다. 그쪽이 담판하시는 데에도 더 유리하실 겁니다.”
“알겠다. 이유를 대어보겠다.”
“허락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유는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단이 말했다.
시현이 수레에 오른 뒤, 일행은 태청의 부대를 앞세우고 단구읍성을 향해 출발했다.
태청의 부대는 이쪽을 배려해서 빠르지 않은 속도로 이동했다. 하지만 단은 항상 그것보다 아주 살짝 느리게 말을 몰았다.
꾸준히 뒤처지는 게 아니라 따라가는 속도를 들쭉날쭉하게 해서, 앞쪽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뒤처져 있었다. 앞서가는 쪽에서는 계속 간격을 신경 쓰느라 달리는 속도를 바꾸고 대열을 멈춰 세워야 했다. 그러면 단은 또 그만큼 꾸물거렸다.
두 번째로 말을 쉬게 했을 때는 결국 태청의 부대 쪽에서 한마디를 하러 왔다.
마부가 아주 약간 미숙한 것 같다고, 위께서 불편하실 수 있으니 대신 말 몰 사람을 보내드리겠다고 공손하게 말하는 병사 앞에서 단은 곧바로 세도하는 종자로 돌변했다.
공연히 욕만 먹고 터덜터덜 물러가는 병사를 보며 호란이 소곤거렸다.
“단, 일부러 이러는 거 맞지?”
“당연하지.”
단이 냉큼 대답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호란은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저 사람들 정말 짜증 나겠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살면서 짜증 나는 새끼들을 많이 만나면 싫어도 알게 돼.”
“일부러 이러는 사람들이 많아?”
“아니, 보통은 일부러가 아니라…. 상단엔 진짜로 말 잘 못 모는 새끼들이 의외로 많거든. 나쁜 애들은 아닌데, 물 떨어져 갈 땐 그냥 다 죽이고 싶지.”
“그럼 저 사람들도 지금 단을 죽이고 싶어 한단 얘기잖아.”
“음. 그때는 너한테 잘 부탁한다.”
결국 단구읍성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시현이 논의는 내일 하자고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