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 * *
“돌아온다니….”
사람들이 술렁였다. 한오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지금은 말 못 해. 그래도 절대로, 다들 이대로 놔두지 않을 거니까….”
한오가 사람들을 달래고, 호란은 숙소 사람들 중에 단구읍성과 그 관할지 출신이거나 원래부터 이 광산에서 일했다는 사람을 찾아서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사람들은 지치고 자포자기가 되어 있었지만 다들 할 말이 많았다. 청천이나 다른 지역에서 끌려온 사람들은 물론 단구 관할지 사람들도 채굴장을 관리하는 단구읍성과 대운관군에 대한 반감이 컸다.
그러는 사이 바깥의 소란은 차츰 진정되었다. 호란은 문을 살짝 열고 문틈으로 기색을 살폈다. 분위기를 보면 소영네는 무사히 달아난 것 같았다.
한오가 다가와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빠져나가는 건 어떻게 하지?”
“기다려. 단이 자기 조사 끝나면 이쪽으로 온다고 했으니까.”
“그건 들었어. 그런데 그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어…. 단한테 방법이 있을 거야.”
“그 반민 애? 걔가 어떻게?”
“어떻게든.”
사실상 무대책처럼 보이는 호란의 말에 한오는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호란은 숙소 사람들에게 동요가 전파될까 봐 일부러 큰소리를 쳤다.
“너무 걱정 마. 정 뭐하면 몇 놈 때려눕히고 돌파하면 돼.”
“그게 말처럼….”
“된다니까.”
호란이 워낙 자신 있게 나오자 한오는 금방 수긍하고 다시 숙소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단구읍성까지 오는 길에 호란이 거석을 때려 부수는 걸 본 덕에 호란에 대한 신뢰가 컸다.
반면 호란 쪽은 사실 자기보다는 단을 더 믿고 있었다.
호란이 아는 단의 성격상, 빠져나갈 방법도 없는데 이런 데 무작정 들어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단에겐 항상 방법이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더 흐른 후, 밖에서 조그맣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문밖에 선 것은 반민 일꾼 너덧 사람이었다. 맨 앞 늙수그레한 반민 여자 하나가 숙소 안 사람들을 향해 눈을 굴리며 작게 물었다.
“혹시 여기 약바위골이란 동네서 오신 분 계십니까?”
“나야!”
호란이 얼른 나섰다. 남방 끝에 있는 호란의 고향을 들먹이는 걸 보면 단이 보낸 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여자가 말했다.
“오세요. 지금 바로요.”
호란은 얼른 여자를 따라나섰다. 한오도 소릿골 사람들에게 눈인사만 남기고 서둘러 뒤를 따랐다.
“두리번거리시면 안 됩니다. 그냥 쭉 따라오세요.”
여자가 작게 말하면서 앞서 걸었다.
바깥은 이미 완전히 진정된 분위기였다. 작업도 다시 시작되었는지 암벽 위 갱구에서 다시 인부들이 들락거렸다. 숙소동 반대편에서는 교대조를 찾는 소리도 들렸다.
숙소 주위에는 아까보다 감시병들이 늘어나 있었으나, 여자와 그가 거느리는 반민 무리는 호란과 한오를 데리고 그 앞을 태연하게 가로질렀다.
여자의 발길은 숙소동 건너편의 반민 작업장으로 향했다. 채굴에 쓰이는 도구나 수레 따위를 만들고 고치는 야장소, 목공소 따위가 있는 곳이었다.
작업장 뒤꼍으로 가자 자재 더미 옆에 몸을 붙이고 있던 단이 두 사람을 맞았다.
“호란 나리, 한오 나리.”
“단!”
호란은 반가워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한오는 좀 의아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철물과 연료가 있어 원래는 적게라도 감시가 있어야 할 장소인데 지키는 병사가 보이지 않았다.
작업장 뒤편은 가파른 암벽으로 가로막혀 있었으나, 반민 일꾼들은 몰라도 하늘인은 기어오르기 어려운 장소가 아니었다.
늙은 여자가 암벽 쪽을 손짓하며 단에게 말했다.
“말한 거 기억하지? 여 넘어간 다음에는 바로 산을 내려가지 말고 잠깐 윗길을 타야 해. 아래쪽엔 초소가 여럿 있어.”
“예. 알려주신 길은 전부 기억했습니다.”
“그럼 어여 가소. 감시병들 금방 돌아온다.”
“네. 감사합니다.”
단은 늙은 여자에게 꾸벅 인사하고 호란에게 왔다. 호란과 한오는 단을 데리고 얼른 암벽을 올랐다.
병사들이 계속 산을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달이 진 이후라 병사들은 모두 횃불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천천히만 움직이면 놈들을 피하기는 쉬웠다.
단구읍성에 다다른 건 동틀녘 직전이었다. 셋은 근처에 적당히 몸을 숨기고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올 때는 사람 눈을 피해 성벽을 넘었지만 곧 성문이 열릴 텐데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한숨을 돌리자 한오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가족과 죽은 사람 일은 속이 타겠지만 일단 일부라도 무리를 구할 희망이 생긴 것이 기쁜 듯했다.
그가 웃으며 단을 보았다.
“진짜더라. 이 자식 수 쓰는 게 신통하네. 아까 감시병은 어떻게 따돌린 거야?”
“그건 채굴장 일꾼분들이 해주신 거라 제가 모릅니다. 그런 건 원래 여기서 지내면서 생리 잘 아시는 분들이나 할 수 있는 재주죠.”
“그게 더 대단하잖아!”
호란도 들떠서 말했다.
“왜 여기 일꾼들이 다 우릴 도와주는데? 단이 어떻게 했길래?”
“아, 그건 취사장한테 돈 먹였어요.”
“아….”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대답에 호란은 어째 할 말이 없어졌다. 단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데서도 음식하고 연료 취급하는 쪽은 항상 돈이 통해요. 두어 다리 건너서라도 꼭 시장하고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원래도 단의 접선 목표는 밥 짓는 반민 일꾼들이었다. 끌려온 인부들은 저들 인원이나 지키는 병사 수를 잘 모를 수 있지만, 음식 장만하는 사람들은 말단 심부름꾼이라 해도 먹는 입 수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걸 알 수밖에 없다는 게 단의 말이었다.
“근데… 다짜고짜 찾아가서 얘기가 통했어? 전에 단이 그랬잖아. 매수는 원래 알던 사람한테나 하는 거라고. 앞으로 영영 안 볼 사람은 돈만 받고 배신할 수 있다고.”
“그건 잔돈푼으로 매수할 때 얘기고요. 금액이 적당하면 안 그래요. 너무 커도 위험할 수 있지만.”
호란은 설명을 듣고도 알 수 없었다. 상대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 사람 기준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고 적당한 돈이 얼마인지 어떻게 안다는 걸까?
단이 계속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운관에 반감 있는 것도 도움이 됐고요. 뭐, 이런 일에 확실한 보장은 없고… 제가 아무리 요령 부려봤자 운 나쁘면 그냥 조지는 거지만. 어떻게 잘 풀렸네요. 두 나리들 운을 보탠 덕인가.”
그 말에 한오가 뒤늦게 심장 떨리는 얼굴을 했다.
“아, 역시 운도 좀 있었던 거야?”
“그건 당연하죠. 어떻게 사람이 모든 걸 다 생각대로 합니까. 근데 어차피 처음부터, 수틀리면 나리님 이름 팔고 걸어 나올 생각이었으니까요.”
“하, 하하하….”
단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몰라서 한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호란은 진담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한오가 화제를 돌렸다.
“그, 그래도 생각보다는 빠져나오기 쉬웠어.”
“그러게. 대운관 병사들 세 보이긴 하지만 인부 수나 채굴장 규모에 비하면 숫자는 그렇게 안 많았잖아. 우리 전에도 탈출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없었을 거 같지는 않은데….”
호란이 말했다. 솔직한 생각으론 인부들이 다 같이 들고일어나면 병사들을 해치우고 채굴장을 나오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어쨌든 다들 하늘인 아닌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단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음…. 이런 데서 도망치기 어려운 이유가, 꼭 병사들이 감시하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일단 다섯 중 넷은 도망칠 준비로 식량과 물을 모으는 단계에서 걸려서 작살이 나고요. 어떻게 탈출에 성공해도 보통은 열흘 안에 근방 샘터에서 잡혀요.”
“아, 물 때문에….”
한오가 생각 못 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허리춤에 달린 물병엔 아직 물이 몇 모금 남아 있었다.
“네. 시문 나리님을 뒷배로 둔 우리가 몸만 빼내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일이죠. 결국엔 가진 게 없고 갈 데가 없기 때문에 잡히는 거예요.”
단이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제 추측이지만, 맨 처음에 청천의 여러 마을이 순순히 징발령에 응했던 건 겨울을 앞두고 식량이 부족했던 때문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 그건….”
한오가 말을 더듬었다. 어둠 속이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부끄러워하는 걸 호란은 알 수 있었다.
단이 위로하듯 말했다.
“아닙니다. 올해는 변고 때문에 어디서나 식량이 부족하니까요. 원래 식량 자급률이 낮았던 벽명관은 더 처지가 나빴을 것이고요….
제 말은 저 채굴장에 있는 하늘인 나리들이 완력이 없어서, 머리가 모자라서 당하고 있는 게 아니란 겁니다. 다 뒤집어엎고 뛰쳐나온다고 해도 그다음이 없다는 게 가장 문제죠.”
“그다음이….”
“네. 미래가.”
단이 짤막하게 말했다.
호란은 단이 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단의 사정을 모르는 한오도 은연중에 무언가 느꼈는지 뒷말을 바로 잇지 않았다.
단이 작게 웃었다.
“그래도 소릿골 분들은 다들 괜찮을 겁니다. 이렇게 걱정해서 구하러 와주는 무리분들이 있고, 돌아갈 마을도 있으니까요. 아까 소영 나리가 매년 도망쳤다고 하신 것도, 방랑족이라도 돌아갈 무리가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고요. 이럴 땐 하늘인 나리들의 무리라는 게 퍽 좋아 보이네요. 무리 바깥 사람들한텐 그저 뭣 같을 뿐이지만.”
단의 말에 한오는 가슴이 뭉클해진 듯했다. 맨 뒤에 슬쩍 욕이 덧붙은 것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한오가 벅찬 음성으로 말했다.
“응. 그래도 우리만으로는 어려웠겠지. 시문 나으리한테는… 정말 갚을 길이 없다. 너랑 호란도, 단지 시문 나으리가 시켜서가 아니라 진짜 마음으로 도와주는 거 같고…. 정말….”
“아이고 나리, 아직 아무것도 해결 안 됐습니다. 벌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단은 평소 다른 하늘인들에게 하듯 능청을 떨고 넘어갔다. 하지만 태도는 같아 보여도 오늘 단은 확연히 여느 때와 달랐다.
단이 호란 아닌 다른 하늘인에게 이렇게 속을 드러내는 걸 호란은 처음 보았다.
하늘인은 싫더라도 처지에는 이입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있겠지만 왠지 그것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단이 전보다 감정적이 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시현도 예전에 비하면 속내를 더 드러내게 되었지만 단의 변화는 그것과는 또 달랐다.
호란은 단구읍성 동편으로 하늘에 보랏빛이 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어스름에 싸인 작은 읍성은 퇴락해 보였다. 성 주변 인가는 대부분 거석에게 짓밟혀 폐허였고, 높지 않은 성벽은 무너졌다가 얼기설기 다시 쌓은 흔적이 뚜렷했다.
지금 단구읍성은 대운관에 고삐를 매여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오면서 본 단구의 관할지도, 징발로 사람이 떠난 곳도 많았지만 그보다 전에 거석에게 짓밟힌 듯한 장소는 더욱 많았다.
호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아직 불빛이 밝혀진 채굴장을 보고, 마지막으로 북쪽 어딘가에 있을 여행의 목적지를 생각했다.
벽명관 위쪽에 남은 곳은 귀수관 하나뿐이었다. 시현과 단은 귀수관 속령 어딘가에 기운이 흘러가는 종착지가 있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곳은 여행의 종착지이기도 할 터였다.
호란은 막연하게 종착지에 다다른 다음을 생각해 보았다.
돌 인간을 모두 물리치고, 거석을 없애고, 수원을 되살리고, 그래서 사람들이 반년이나 일 년 후의 수확을 기대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면.
모든 사람이 각자의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되면. 모든 사람이 자기가 돌아갈 곳을 가질 수 있게 되면.
그러면 더 이상 이번 단구읍성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될까?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호란은 그러기를 바랐다.
성문이 열릴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단이 앉았던 데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자리에 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호란이 불현듯 물었다.
“단.”
“네?”
“저기, 돌 인간 일이 다 끝나면 같이 남운관에 돌아갈 거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