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8
018화
* * *
단이 자기가 다 면목이 없다는 듯 죄스러운 목소리로 고했다.
“어젯밤 나리님 댁 종에게 듣기로, 난이 나자마자 유예 어른 댁 황씨 집안과 울지 어른 댁 문씨 집안이 식솔을 다 데리고 피난을 갔다 합니다. 떠나기 전 대영관에 들렀고 피난길에 큰 통을 수없이 실은 윤거 몇 대가 따라갔다 합니다.”
“…….”
시현의 어깨에서 맥이 빠져나갔다.
그가 몇 번씩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차마 사실이냐고 되묻지는 못했다.
시현이 더듬더듬 말했다.
“유예와 울지는 땅인이자 관의 길사 아니냐. 백성을 보살필 의무를 배로 진 자들이… 어찌….”
소년의 고개가 떨어졌다. 그가 땅을 보며 탄식했다.
“땅인들이 이리 행동하면서 무슨 염치로 도적질하는 백성들을 난적이라 부르겠느냐.”
단이 우물쭈물했다.
“그래도 이놈이 시의 기밀을 입 밖에 낸 것은 천 번 죽을 죄가 맞습니다요. 나리님께서 저를 벌하신들….”
시현이 허탈하게 말했다.
“아니다. 오히려… 이제 보니 네가 말하길 잘하였다. 석유는 몰라도 물은 남아 있겠지. 저수고 위치가 사방에 알려지면 피난 못 간 백성이 물을 쓸 수 있을 터. 잘하였으니 일어나거라.”
시현은 침통한 얼굴로 갈수의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모두 내 죄다. 평시에는 벼슬아치 사이에 도리를 세우지 못하고 난시에는 도시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탓에 선량한 백성까지 도적으로 내몰리지 않았느냐….”
시현은 몸을 숙여 갈수의 부릅뜬 눈을 감겨주려 했다.
하지만 단이 붙잡아 말렸다.
“아, 장갈수 그 새끼는 가영선하고 똑같은 새끼입니다요. 나리님께서 맘 쓰실 놈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시현이 당황하며 뒤돌자 단이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리님. 이상하다 생각 안 하셨습니까? 왜 멀쩡히 월봉 받는 군인이 재산을 전부 신용장으로 만들었겠습니까. 저것들 다 가영선이 끼고서 돈놀이하던 것들입니다. 반민 피고름을 아주 쭉쭉 빨았지요.”
“돈놀이라니? 사채를 금하고자 관에서 신용장 제도를 두었지 않느냐.”
“제도를 빠져나가는 놈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지요. 지들이 내군이니 누가 단속을 하겠습니까. 이자 갚으라 행패 부리고 물건 뺏어가도 막을 사람도 없고.”
시현의 표정은 더 참담해졌다. 단이 말했다.
“다 죽일 놈들이지요. 한 놈이라도 죽어서 소인은 아주 속이 시원하네요.”
시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갈수의 시신을 내려다보다가 침묵한 채 수레에 올랐다.
호란은 잠자코 수레를 몰았다.
은산을 벗어나고부터 단이 길을 안내했다.
그는 지도첩과 나침반을 곁에 두고서, 이대로 죽 가라 조금 있다 가파른 데가 나오니 돌아가라 하며 세세하게 길을 일러주었다.
호란은 단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한동안 달렸다.
언뜻 보니까 단은 밤에 위치를 알 때 쓰는 별시계도 가지고 있었다.
약바위골 반민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멋있게 생긴 것이라 보기만 해도 믿음이 갔다.
그러나 갈수록 나무와 풀이 적어지고 메마른 땅밖에 보이지 않자 슬슬 걱정이 되었다.
호란이 흘긋 뒤를 돌며 단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그냥 막 북쪽으로 가?”
“그럴 수야 없지요. 얼마 더 가면 풀 나는 데가 하나 나옵니다. 지형이 가팔라 거석이 잘 안 오는 곳이라 상단들이 물을 긷고 쉬어가곤 합니다.
약간 이르지만 거기서 행장을 풀고 시문 나리님께 저녁을 올릴까 합니다. 호란 나리는 오늘 점심도 거르셨지 않습니까.”
한참을 더 달리니 단이 말한 대로 작은 산이 눈에 들어왔다.
호란이 개울이 있는 산중턱까지 수레를 올려놓자 단이 쉴 준비를 시작했다.
그늘진 곳에 자리를 깔고 가림막을 쳐서 시현이 앉을 곳을 마련하고, 작은 풍로에 불을 켜서 식사를 만들었다.
가져온 식량은 건량과 밀전병 정도였는데 단은 불 위에서 뭘 이리저리 하더니 금세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어냈다. 말린 소채에 장을 풀어서 국까지 끓였다.
음식을 차와 함께 소반에 받쳐 올리자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들이 나온 것도 아닌데 뭘 이렇게까지 하였느냐. 앞으로는 손이 많이 안 가게 하거라.”
“그랬다간 제가 추선 시위에게 경을 칩니다. 오히려 초라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간이 모두 잘 맞고 차도 잘 우렸구나.”
시현은 음식을 칭찬하면서도 입맛이 나지 않는지 수저를 움직이는 손이 느렸다.
도적을 만난 후 그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아 보였다.
시현 앞에서 물러난 단은 곧 요리를 산더미같이 담아 호란 앞에 가져다주었다.
맛있는 냄새에 호란은 기대에 차 자리에 앉았다.
“단도 이리 와. 얼른 먹자.”
“저 같은 것이 어찌 같은 상에 앉습니까. 드시고 남으면 먹지요.”
“내가 먹으면 안 남아. 와서 먹어!”
호란이 강하게 말하자 단은 못 이기는 척 와서 앉았다.
맛있다 맛있다 칭찬하면서 밥을 먹다가 호란이 소곤거렸다.
“시문 님은 많이 안 드시네. 이렇게 맛있는데.”
“큰 걱정이 많으시니 그러시겠지요. 제 요리가 볼품없기도 하고요.”
“먼 길 가려면 잘 드셔야 하는데. 사냥이라도 해볼까? 이 산에 짐승이 있어?”
“글쎄요. 초목이 있으니 있기야 하겠습니다만.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물이 마르면서 산짐승들도 많이 줄어들었다.
호란이 어릴 때는 산에 고라니니 멧돼지에 늑대까지 있었는데, 맹수들이 먼저 사라지더니 이제는 작은 동물마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상을 물린 뒤 시현이 호란과 단을 불렀다.
“아침에 단과는 갈 길을 대략 이야기하였으나 호란은 아무것도 못 듣지 않았느냐. 일정을 어림할 겸 자세한 길을 잡아보자꾸나. 대지도를 내오거라.”
“예.”
단이 커다란 지도를 가져와 펼쳤다.
“무작정 정북을 향했다간 오래 못 가 물과 식량이 동날 겁니다요. 일단 상단이 다니는 길을 따라 치풍관을 향하되, 혹여 나리님께서 괴인들에 대한 단서를 잡으시면….”
지도를 짚으며 길을 설명하던 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있자. 이 샘은 예전에 거석에게 막힌 곳인데. 멀쩡한 샘이 안 실린 것도 있고. 이 지도는 못 쓰겠네요.”
단은 수레에 가서 제 짐을 뒤지더니 손때가 탄 지도 한 장을 가져왔다.
처음 지도보다는 작았지만 꽤 세세해 보였다.
“만든 지 좀 되었지만 아까 그 지도보다 쓸 만할 겁니다. 제가 잠시 몸담았던 상단의 지도입니다요.”
단이 가져온 지도를 보고 시현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대지도가 아니냐. 더구나 관에서 허가한 것이 아니구나.”
어느 수준 이상 자세한 지도는 대지도라 하여 만드는 데도 소지하는 데도 허가가 필요했다. 단이 면구해 했다.
“법을 어기는 일인 줄은 압니다만, 관에서 허가한 지도엔 상단이 들르는 작은 마을이 실려 있지 않아 어쩔 수가….”
“여기 실린 것이 작은 마을만이 아니지 않느냐.”
시현이 단의 말을 끊었다. 그가 손을 뻗어 지도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지도 모서리의 색색깔 무늬들이 장식이 아니라 암호로구나. 의미는 모르나 굳이 숨긴 것을 보면 좋은 뜻이 아니겠지. 네가 시의 기밀을 들쑤신 것이 상단 노비 시절부터였더냐? 수원, 유전, 저유고, 또 무엇이 여기 실려 있느냐?”
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이쿠, 나으리. 어찌 그걸 한눈에.”
“사실이렷다.”
시현이 단을 노려보았다.
심각한 분위기에 걱정이 된 호란은 단의 어깨너머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가 목을 움츠리고 물러났다.
지도는 여전히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고, 지도 테두리에 둘러쳐진 색색깔 당초 문양은… 예뻤다.
단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소인이야 노비였으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도저히 못 있겠다 싶어 길사 유예 어른께 상단의 죄를 고하고 남운관에 몸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는 절대 남운관에 해 될 일 한 것이 없습니다요.”
시현이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유예에게 고하였다고? 팔대 관성시의 기밀을 정탐하는 것은 대역에 해당한다. 그런 죄가 적발되었다면 총치부 대리인 내게 보고가 왔을 터인데.”
“아, 그게요.”
단이 헤헤 웃었다.
“그런 큰 죄를 터뜨렸다간 이놈도 목숨이 없지 않겠습니까요. 큰 탈이 없도록 그냥 밀수 두어 가지만 슬쩍 찔러드렸습니다.”
“밀수까지 하였다고.”
“밀수 고발을 한 것이옵니다.”
시현이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짚었다.
“한패를 고발한 상으로 남운관에서 양인 신분을 얻은 게로구나.”
“형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실제로는 관에서 상단이 낼 벌금 대신 제 노비 문서를 거둬주신 것이라 그 돈이 고대로 다 제 빚이 되었습니다요. 제가 관에 진 빚을 다 갚으려면 십 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관과 이중거래까지…. 게다가 남운관은 사람을 노비 삼는 것을 법으로 금하였으니 관에서 금전 대신 노비 문서를 거둔 것도 영을 어긴 일이다. 그 과정에서 유예가 챙긴 것이 어찌 없었겠느냐. 들으면 들을수록….”
시현은 혀를 찼다.
“네가 재주가 많은 것은 알았으나, 가진 재주로 위에서 정한 법과 영을 모조리 범하는 이였구나.”
“아이고, 나리님. 저 같은 천것은 재주만 가지고는 먹고살 수가 없습니다요. 소인도 이 지도도 나리님의 대업에 유리하게 쓰이게 되었으니 너그럽게 넘어가 주십쇼.”
단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시현은 한숨을 쉬었다.
단이 지니고 있는 기밀들은 고작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것이 아니었다.
단이 노비라 상단이 저지른 일이 책임이 없다는 것도 걸러 들어야 할 소리였다.
상단 노비의 절대다수가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단에선 돈과 능력이 전부라 장부와 전궤를 양쪽에 끼고 제세상인 양 떵떵거리는 노비가 없지 않았다.
큰 상단에서 능력 있는 인재를 잡아놓기 위해 노비 문서에 특혜 조항을 많이 붙이고 종신계약서 대신으로 삼기도 했다.
시현이 보기에 단에게는 그럴 능력과 수완이 차고 넘쳤다.
아직도 상단과 연관을 갖고 기밀을 주고받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단의 말대로, 지금으로선 눈감을 수밖에 없었다.
단은 제 지도를 펼쳐놓고 계획한 여정을 마저 이야기했다.
호란은 아까 복잡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논의를 듣지 않고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수풀 아래에서 찾던 것을 발견한 호란이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시문 님! 짐승 발자국이 있어요! 산에 짐승이 있어요! 식량 삼게 사냥을 해와도 될까요?”
“아! 그거 잘되었네요. 지금 잡아 오시면 밤에 피를 빼고 내일 아침에 익혀드리면 되겠습니다.”
단까지 맞장구를 치자 시현은 그리하라 허했다.
이변이 난 이래 제대로 눈을 붙인 일이 없어 시현 자신도 쉬고 싶었다.
오랜만에 사냥할 생각에 호란은 신이 나서 달려갔다.
기운찬 팔다리가 몇 번 움직이자 이미 종적이 없었다.
시현은 소녀가 사라진 숲속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경험한 적 없는 무력감이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한탄하고 마음을 상하느니 쉬는 게 나았다.
그에겐 큰 책임이 있었다.
시현은 단이 만들어둔 쉴 자리를 향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통수에서 딱 소리가 났다.
눈에서 불이 번쩍하고 얼얼한 통증이 머리끝에서부터 코끝까지 전해졌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시현은 자기가 무엇에 머리를 맞았단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뒤를 돌아보니 단이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가 툭 말을 내뱉었다.
“야, 할 거 없으면 설거지나 해 와. 뭣도 아닌 게, 오냐오냐해주니깐 이제 밥까지 깨작거리냐?”
그가 방금 시현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손을 뚜둑 소리 나게 털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