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 * *
위씨 교인의 이름이 나오자 태청을 감싼 분위기가 변했다.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외람되오나 칭호를 바로 해주소서. 이제 위께서는 교문이십니다.”
“그대의 입장을 생각하여 내 앞에서 교인을 위라 칭하는 것을 허물치 않겠다. 다만 나 역시 다른 이들과는 입장이 달라서, 그저 외교상의 수사 삼아 그이를 문이라 불러주기는 곤란하다.”
태청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방금 시현은 교문란 칭호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리 칭하는 것마저 ‘외교상의 수사’라 격하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반발하지 않았다. 이미 시현의 요구대로 관리들을 모으기로 한 이상, 이제 와서 충돌해 봐야 실익이 없다 여긴 듯했다.
태청과 소예가 물러간 뒤 시현은 잠시 회의실에 머물렀다.
곧 소예가 사람을 보내 관리들을 모으는 데 시간이 걸린다 우는 소리를 해올 것이 뻔했다. 잠시 기다렸다가 일정이 결정된 후 다른 단구 관리들을 만나 읍성 상황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시현이 호란에게 말했다.
“아마 회의는 오후가 될 텐데, 꽤 길어질 것이다. 혹여 너무 지루할 것 같으면 다른 이들과 교대하려무나.”
“지루할 틈은 없을 거예요.”
호란이 말했다. 목소리에 아직 긴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왜 그러느냐. 태청이 신경 쓰이느냐?”
“네…. 자리가 너무 가까웠어요. 그 사람이 마음먹고 움직이면 시문 님이 주문 외우는 것보다 빠를 테니까.”
호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식 호위가 아니면 하늘인은 몇 보 안으로 다가오지 말라던가 이런 말, 사실 잘 이해 못 했는데…. 지금 보니까 알겠어요. 정말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건 완전히 다르네요. 와.”
“그 정도였느냐. 나는 네가 있어서 아무 걱정이 없었다마는.”
“시문 님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켜드리는 건 제 몫이니까. 갑자기 덤빈다고 해도 대응은 할 수 있어요. 마법 쓰실 시간도 벌어드릴 수 있고, 여차하면 도망갈 수도 있고요.”
“그럼 되지 않았느냐.”
“근데 그 사람하고 정면으로 맞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어요. 질 거라는 생각도 안 들지만…. 특히 태청이 불시에 공격적으로 나오면 예측하고 대응하기가 아주 힘들 거예요.”
호란이 무척 심각해서 시현은 놀랐다.
“네가 누구를 두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이구나.”
“보통은 남 보고 싸울 생각 안 하죠. 근데 저 사람은 확실하게 적이고요. 강하고요…. 그리고 기운도 감정도 읽기가 어려워서 더 신경 쓰여요. 항상 자기 기세를 일부러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아요.”
호란이 아는 하늘인들은 모두 감정이 움직이면 기운도 함께 움직였다. 특히 살기와 적의를 담은 움직임은 포착하기 쉬웠다.
그에 비해 태청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읽기 어려웠다.
얼굴은 웃는 얼굴인데 기운에는 언제나 화 난 듯한 느낌이 서려 있었다. 적의도 살기도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 적의를 품었나 싶은 순간이면 매번 굽히고 물러났다. 그것이 더 찜찜했다.
호란은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태청은 아무런 감정의 움직임 없이 사람의 목을 꺾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리라.
나이 든 몫꾼 중에 아주 간혹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건 적을 칠 때 단호해지거나 적에게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는 달랐다. 폭력을 의식하는 기준이 다른 거였다.
그런 사람들은 유능한 전사였지만 무리에서 알게 모르게 경원되었다. 몫꾼들은 그들의 능력과 경험을 존중했지만 결코 머리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태청처럼 젊은 사람이 그런 분위기를 지닌 것을 호란은 처음 보았다. 더구나 그 같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 사람의 생사를 결정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호란이 물었다.
“대운관군이 정말 이대로 물러날까요? 태청이 너무 순순하게 나오는 게 오히려 찜찜해요.”
“글쎄다. 태청은 지금 굉장히 곤란할 것이다.”
시현이 말했다.
“교인이 문을 자칭한 뒤, 대운관은 벽명관의 자치권을 침해하면서 문의 권위를 명분으로 내세웠을 것이다. 벽명관 관인들 쪽에서도 타 관성에 주권을 팔아먹었다는 것보다는 문령에 복종했다는 쪽이 모양이 좋으니 적당히 맞춰 주었겠지.”
“으. 그게 뭐예요….”
호란은 인상을 썼다. 문을 사칭하는 것만도 불쾌한데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 문령을 명분으로 사용했다니. 그야말로 모욕적인 일이었다.
“그러니까 태청은 지금 자기 판단으로는 문의 명에 반발하는 표시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제 윗선에 전갈을 보내 대응을 묻고 있겠지. 간교하고 위험한 자이지만 당장은 괜찮다. 당면한 문제는 채굴장이다.”
“아! 맞아요. 저대로 놔두면 절대 안 되죠. 끌려온 사람들 전부 되돌려보내야 하고….”
“일은 그것보다 더 어렵다.”
시현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마력석 채굴장은 계속 운영되어야 해. 그것만은 태청의 말이 맞다.”
“네? 하지만….”
“물론 지금 같은 형태는 결코 안 되지. 하지만 마력석을 생산하지 않으면 단구읍성은 물론 벽명관 전체가 지탱할 수 없다. 원래도 벽명관은 식량 생산량이 부족하여 타지와의 교역이 필수인 지역이었다. 그나마 있던 농지도 황폐해졌으니 반드시 중부와 교역하여 마력석을 팔고 식량을 사 와야 한다.”
호란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은 모든 것에 우선이었다.
“강제 징발이 아니라, 일자리와 식량을 원하는 자원자들을 바탕으로 채굴장을 운영해야 한다. 헌데 지금 단구읍성의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걱정이다.”
“그래도, 치읍감한테 불만이 있거나, 일을 더 잘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동네에도 있을 거예요.”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워낙 어렵지 않으냐. 의지가 있고 실무를 잘 아는 이들이 최대한 많이 필요한데, 누가 나선들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시현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정말 문제는 태청이 아니라 치읍감 소예야…. 그자는 줄곧 명에 따랐을 뿐이라 말했지. 그렇다면 다른 명이 내려왔을 때 다른 모습을 보일까? 두고 볼 일이다.”
“네에….”
호란은 시현의 걱정을 나눠 받은 것처럼 근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살짝 웃고 호란에게 다과를 밀어주었다.
속내를 말하면 시현은 소예에게 기대가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고통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고 그 죄는 쉬이 감경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구의 상황은 청천보다 훨씬 복잡했다. 관리 대부분이 이제까지의 광산 운영에 관여했다. 다짜고짜 치읍감부터 쳐내서는 일을 풀어나갈 수 없었다.
일단은 사람들에게 일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어야 했다.
시현의 힘으로 적과 싸울 수는 있다. 하지만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세상을 지탱하는 데에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 * *
“왜 나간 인력에 대한 기록이 없느냐?”
소예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실무관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마음이 초조하니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 같았다.
소예가 오후까지 시간을 달라 청했을 때, 시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락했다. 직전 인정사정없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소예는 자기가 기회를, 정확하게 말하면 약간의 유예를 받은 것을 깨달았다. 지위는 고사하고 격이라도 부지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잡관이 말했다.
“외지에 인력을 보낸 내역은 공식 기록으로 남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알아! 하지만 뒷장부를 확실하게 남기라 하지 않았느냐? 내가 분명 내용도 확인하였다!”
“그건… 태청 장군님이.”
잡관이 더듬거렸다.
읍성의 하급 관인들은 격은 없어도 땅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태청을 장군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하나둘 늘더니, 이제는 소예 앞에서마저 그리 부르고 있었다.
“장군이 일전에 찾아와서 장부를 보여달라고 했는데, 돌아간 뒤에 보니 없어졌습니다. 가져갔는지 폐기했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을 그냥 놔두었어! 그리고서 내게는 보고조차 안 했단 말이냐!”
소예가 버럭 소리쳤지만 잡관은 시선을 피했을 뿐이었다. 머리 숙인 모양은 했지만 진심으로 어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힘이 있는지,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지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가 자기가 이런 처지까지 떨어졌을까? 소예는 억울했다.
지금 단구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그가 원해서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2년 전 여기 부임한 것도 대길사의 눈 밖에 나 관성 정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었다. 마력석 말고는 변변한 산물도 없는 작고 초라한 관성은 반쯤 좌천지 취급을 받고 있었다.
변고가 일어난 직후엔 거석과 싸울 마력석이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단구읍성에는 갑자기 가치가 폭등한 마력석을 제대로 관리할 역량이 없었다.
관성에서는 마력석을 최대한 보내라고 쉴 새 없이 재촉했다. 하지만 민심이 동요하니 생산량을 늘리기가 쉽지 않았다. 몰려오는 거석을 막느라 안 그래도 부족한 하늘인 일꾼들이 죽어 나갔다. 밀거래가 횡행하여 장부에는 뻥뻥 구멍이 뚫리는데 단속이 되지를 않았다.
관성 고관이 직접 와서 채근하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간섭하고, 마냥 휘둘려 다니고 있는데 벽명관이 함락됐다.
파견 와 있던 관성 관리들은 제 가족을 챙기러, 혹은 무너진 관성을 수습하러 허둥지둥 돌아갔다.
토박이 백성은 겁을 먹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급한 대로 피난민을 받아 부족한 인구를 채웠지만 관리는 더 어려워졌다.
기존에 일하던 방식, 쌓아온 문서, 소예가 수십 년간 관리로서 알아 온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음만 같아선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태청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는 강력한 병사, 눈 매섭고 손 빠른 실무 관들, 무엇보다 벽명관 총령부의 정식 명령서와 함께 왔다. 그야말로 소예가 바라던 모든 것이었다. 그가 대운관에서 왔다는 사실은 당시의 소예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게 본질이었다. 태청이 와서 한 모든 일은 전부 대운관만을 위한 것이었다.
하늘족 놈의 비위까지 맞춰가며 온갖 고생은 다 하고서, 지금 소예에게 남은 것은 대운관에 백성을 팔아먹었다는 오명뿐이었다.
더구나 그 태청이란 놈은 평소 행세는 있는 대로 하고서 완씨 시문이 눈에 한 번 힘을 주자 납작 엎드리기 바빴다.
“바쁘십니까?”
문가에서 들려온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소예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돌아보자 태청이 서 있었다. 큰 키와 당당한 자세,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감은 언제나와 같았다.
“자네가! 자네가 이럴 수가 있는가!”
소예가 성을 터뜨리며 다가서자 태청이 씩 웃었다. 그가 문서고 안의 잡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치읍감님이 약간 흥분하신 것 같군요.”
잡관들은 대꾸도 안 하고 우르르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소예는 더 기가 막혔다.
완씨 시문이 행차한 후에도 태청은 여전히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사고 있었다. 대놓고 끈 떨어진 취급을 받게 된 소예와는 달랐다.
이 남자에겐 그만한 무력과 권세가 있었다. 거기 생각이 미치자 소예의 억울함은 더 커졌다.
“이제 어쩔 셈인가. 말끝마다 교문의 명이다, 교문의 명이다 하며 온갖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던 건 자네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전부 내게 미루고 빠져나갈 셈인가!”
“저인들 어쩌겠습니까. 정말로 시문께서 직접 오셔서 호령하시는데.”
“자네 뒤에도 교문이 계시잖은가! 군대도 있고!”
태청이 두 팔을 벌렸다.
“맙소사, 치읍감님. 지금 제게 교문의 이름으로 시문을 대적하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
소예도 정말 거기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예가 느끼기에 태청은 더 맞서볼 수 있는데도 일부러 물러난 것 같았다. 그가 먼저 전면 항복하듯 해버린 바람에 소예만 처지가 더 나빠졌다.
소예가 식식대고 있는데 태청이 떠보듯 말을 던졌다.
“그렇게 억울하시면, 문령패라도 한번 보자고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문령패? 문령패를 왜….”
태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예가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자네는 설마, 저분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어떨까요?”
태청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