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 * *
다만 소영에게서 정보나 연줄을 얻으려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방랑족 사이에는 외부자를 거부하는 암묵의 규칙이 많았다.
단은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꺼냈다.
“제가 소영 호위에게 부탁을 좀 하려는데요. 그 전에….”
“너 그거, 무슨 호위라고 부르지 마. 어색해.”
소영이 불편한 듯이 말을 끊었다. 단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시문 나리님 앞에서 소영 호위를 나리라고 부를 수는 없는데요.”
“세세한 예법은 신경 쓰지 말거라.”
시현이 말했다. 물론 그런 발언은 주위의 하늘인들을 더 신경 쓰게 할 뿐이었다.
단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이제부터 소영 호위를 설득한답시고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을 겁니다만, 그 전에 미리 양해 말씀을 드리죠. 여기 호란 호위 말씀입니다만.”
“응? 나?”
호란은 깜짝 놀랐다. 소영도 당황한 듯했다.
단이 뻔뻔한 얼굴로 말을 늘어놓았다.
“이분은 겉보기랑 상관없이 완전 촌사람입니다. 하방에서도 남방 끝터, 완전 산골짜기에서만 살았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중간에 이분이 ‘방랑족 중에 반민도 있어?’, ‘방랑족이 그런 일도 해?’ 같은 말을 해도 너무 화내지 마세요.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요.”
“나, 나 그런 소리 안 해!”
호란은 완전히 당황했다. 단은 코웃음을 쳤다.
“아뇨. 얼굴로 말하잖아요. 방금도 소영 호위가 무슨 말씀 하실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 다 보였거든요. 심지어 어제 잠입조 짤 때는 큰 소리로 ‘광산에서 일했었어?’하고 물어보셨죠. 어휴 시발, 전 그때 판 다 엎어지는 줄 알고…. 소영 호위가 맘이 좋으셔서 넘어간 거지.”
방 한구석에 있던 화상 흉터 난 중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 소영네 무리에서 온 한 사람이었다.
그가 껄껄거리며 단에게 말했다.
“너도 골때리는 새끼다. 반토막이래도 압존법은 신경 쓰는 주제에, 문 나으리 앞에서 쌍욕은 하냐?”
옆에 섰던 다른 사람도 맞장구를 쳤다.
“아니, 며칠 보니까 은근히 개판이잖수. 호란 머리는 정식 호위라면서 땅님 모시는 예법 하나도 모르고, 이 종자 녀석은 겉으로만 조심하는 척하지 저 누울 자리는 다 알아보고 발 뻗고.”
“그러게. 하방 사람들은 다 이런 거야, 아니면 위께서 그냥 봐주시는 거야? 오랜만에 높으신 나으리 모시게 돼가지고 긴장했는데 생각이랑 엄청 다르네.”
단은 말없이 시선만 피했다.
그동안 보아온 바로 이 두 사람은 한때 관성 병사로 잘 나가던 축이 틀림없었다. 대관절 무슨 짓을 저질러서 방랑족으로 떨어졌을지 모르니 깊게는 안 얽히고 싶었다.
다행히 호란은 ‘방랑족인데 땅님 모셔본 적도 있어?’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좀 풀렸다고 생각한 단은 용건을 꺼냈다.
“여튼 소영 나리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아시는 분 중에, 관아 잡직으로 있는 반민이 있습니까? 되도록 공기방이나 호방 쪽에.”
공기방은 지방 관청에서 장인과 기술자들이 속한 곳이고 호방은 조세와 양곡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소영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단은 표정에서 답을 읽었다.
“방금 질문은 됐습니다. 여하튼 아는 분 중에 누구를 저한테 좀 연결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대단한 거 안 물어볼 거고. 신원도 꼭 비밀로 해드릴 텐데요.”
소영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그가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돼. 그런 짓 하면 앞으로 아무도 나를 안 믿을 거야. 지금 군대 얘기 시문 나으리한테 말해드린 것도 원래는 안 되는 거야.”
주위의 방랑족 출신 호위들도 다 동의하는 얼굴이었다.
시현이 나서서 소영을 설득하려 했다.
“대운관군에게 민폐를 겪는 백성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냐. 설령 신원이 드러나더라도 불이익이 없도록 내가 조처할 것이다. 오히려 공이 될 것이다.”
그 말에 소영은 오히려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단이 얼른 끼어들었다.
“나으리.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공을 세우고 상을 받더라도 방랑족 출신이란 게 알려지는 건 다른 문젭니다. 출신 가지고 흰 눈 뜨는 건 착한 편 나쁜 편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단이 제 속을 정확하게 읽어내자 소영은 놀란 것 같았다. 그가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단을 보았다.
“진짜 웃기는 자식 맞네. 넌 뭐 하고 다녔길래 이런 걸 다 아냐? 너도 전에 방랑족이었냐?”
“그건 아닙니다만. 뭐 꼭 겪어봐야 압니까? 호란 호위 하는 것만 봐도 뭐. 저분도 왜 그, 다른 사람한텐 착한데 꼭….”
“왜 자꾸 나 가지고 그래….”
호란이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소영은 직전보다 더 이상한 얼굴이 되어서 단에게 말했다.
“너 이 새끼, 보니까 아까부터 니네 편 까대서 내 기분 좋게 하려고 하고 있지. 수법 다 보여. 다 틀렸어.”
“소영아, 너도 웃음 참는 거 다 보인다.”
관병 출신 하늘인이 말했다. 소영은 제 주먹에 꿍 이마를 박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소영은 다시 정색이 되어 있었다.
“걔들은 단구읍성에 고용됐고, 우리는 시문 나으리한테 고용된 거잖아. 이런 일은 많아. 그래서 우리한테는 이럴 때 원칙이 있어. 고용주 명령으로 우리끼리 죽이게 돼도 절대 유감 갖지 않아. 대신에 살길이 있으면 서로한테만 미리 알려주는 거야.”
“이번에 군대 얘기처럼요?”
“그래. 그건 목숨 달린 정보에 속하니까.”
소영이 엄중하게 말했다.
“이건 밑바닥 의리야. 이렇게 들은 내용은 딱 살아남는 데만 써먹는 거야. 그 이상으로 이용해먹으면 안 돼.”
“하지만 이미 군대 일은 우리에게 말해주셨어요.”
“그건, 그래도 그거는…. 아 씨….”
소영은 난처해져서 짜증을 부렸다. 단은 그가 말로 못 푸는 내용을 대신 채워주었다.
“네, 시문 나으리 결정에 소영 호위뿐 아니라 이 무리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지요. 나리님께 말씀드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셨을 겁니다.
“그래. 그러니까 더 이상은 안 돼.”
“하지만 이 일은 우리 목숨만 걸린 일이 아닙니다. 광산에 있는 분들만 해도 그래요. 사실 소릿골분들 말고도, 광산에는 여러분의 예전 무리분들이 많이 있었겠지요.”
방랑족 출신 호위들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운관군이 명분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징발했다면 이 일대를 떠도는 방랑족은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소영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건, 우리는… 그런 거까지 서로 챙기지는 않아. 막장에 떨어진 건 그 자식들 팔자고.”
방랑족의 의리는 얇고도 두껍다. 희박하면서 진하다.
그것은 방랑족으로 지내보지 않은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단 역시 보고 들어서 알 뿐이었다.
일정한 지역을 영역으로 두고 떠도는 방랑족은 모두가 아는 사이였고 모두가 모르는 사이이기도 했다.
무리 여럿이 상황에 따라 합쳐지거나 갈라지거나 했다. 샘터나 일감을 두고 방랑족끼리 싸움이 나는 일도 잦았다. 황야에서 이들은 종종 경쟁자이고 심하게는 원수였다.
하지만 방랑족이 아닌 사람, 버젓한 삶터를 가진 사람들 앞에서 이들은 암묵의 유대를 가졌다.
대단한 것은 해주지 않는다. 딱 자신의 생존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 그리고 상대의 목숨을 붙여줄 정도만 정보를 흘리고 때로는 돈과 물건도 빼돌린다.
당연히 고용주에게는 이것이 배신으로 보였다. 방랑족 출신이 계속 기피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 특히 태청과 같은 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태청은 대군을 불러다 겁을 주어 관아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사람들의 위기감을 자극하고 방랑족의 유대를 작동하게 했다.
단은 이제 그 유대의 혜택을 방랑족 무리 바깥까지 끌어냈으면 했다. 다만 이것은 외부인이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방랑족에게는 모든 것이 생존의 문제다. 이들을 설득하려면 무리에 미치는 위험의 범위를 최대한 축소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최대한 확장하거나.
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가 소영 호위를 통해 뭘 알아내려는지만 말씀드리지요. 도와줄지 말지는 직접 판단하세요. 들어보시고 거절하시면 더는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소영은 특유의 불퉁한 얼굴을 했지만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단이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사전 정보는 많으면 좋지만 정말로 꼭 알아야 할 것만 고르라면 두 가지예요. 주요 양곡창하고, 마력석 보관고의 위치입니다.”
“응? 그건 딱히 비밀도 아닌 게….”
소영은 의아해했다.
“아니요. 여기처럼 뒤가 깊은 동네에선 관의 창고란 게 꽉 차 있어야 할 곳은 비어 있고, 엉뚱한 곳이 차 있는 경우가 많아서요. 실제로 어디에 뭐가 얼마나 있는지 사전에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게 양곡창을 점거했는데 내용물이 없으면 낭패니까요.”
“…뭐?”
소영이 되물었다. 당황한 호위들도 등을 세웠다.
“잠깐, 점거한다고?”
“점거? 힘으로?”
단은 검지손가락을 입에 댔다. 사전에 주위를 살피고 시현이 기척을 읽어 엿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목소리가 커서 좋을 일은 없었다.
호위들은 입을 뻐끔거리며 시현을 보았다. 시현은 자기도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얼른 표정을 고쳤다.
“음. 그렇게 되겠지. 그것밖에 방법이 없겠구나.”
“왜 놀라는 모양을 하십니까? 차라리 말하는 제가 놀라야죠. 이게 나리님이 원래 하시는 방식 아닌가요.”
“본디 나는….”
시현은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다른 대처법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말을 바꿨다.
“다음부터는 단계를 좀 거쳐서 이야기하거라.”
“단계라… 음.”
단이 호위들을 보고 설명했다.
“원래 시문 나리님 계획은 관을 정상화한 다음에 절차를 밟아 광산 일꾼들 문제를 해결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다가오는 대운관군 때문에 관리들이 절차고 뭐고 협조를 안 하게 됐지요.”
“그렇지….”
소릿골 몫꾼 하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럼 군이 도착하기 전에 얼른 일꾼들이라도 풀어주는 게 낫지요. 꾸물대다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
“근데 그래도 돼? 지금 있는 대운관 병사들은 어쩌고?”
“놈들이랑 싸움이 되면?”
소릿골 몫꾼들은 희망에 차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단이 시현 쪽을 보았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들을 구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단구 관리들이 일하지 않겠다니 내가 손을 써서 일이 되게 할 것이다.”
여기서 손을 쓴다란 채굴장 입구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부당하게 징발된 자들을 풀어주거라’ 비슷한 말을 한 다음 방해가 있으면 마법으로 다 밀어버리는 것을 뜻했다. 단은 그 부분은 굳이 말하지 않고 건너뛰기로 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풀려나고 나면, 제일 문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일이에요. 그래서 우린 광산 인부들을 해방하자마자 대운관군이 지키는 식량고와 마력석 보관고부터 빼앗아야 합니다. 물자가 확보되고 나면 대운관군 대부대가 도착한 뒤에도 얼마든지 대응이 가능하지요.”
이야기를 마무리한 단은 소영에게 진지하게 청했다.
“우리 쪽 피해를 최소화하고 일에 성공하려면 사전 정보가 필요해요. 소영 호위와 지인분들이 도와주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소영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단과 시현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소영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관병 출신 방랑족이었다.
“와, 내가 지금 맞게 들은 건가….”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시현 쪽을 보았다.
“이제부터 문 나으리께서 대운관 놈들의 군량 창고를 털어버리신다는 겁니까? 진짜로 그런 얘기예요?”
“옙. 그런 이야깁니다.”
단이 얼른 대답했다. 호란이 딸꾹질을 했다.
호위들은 모두 시현을 바라보았고 시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방랑족 출신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와…. 관군 약탈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이런 규모론 조금….”
“하지만 그냥 관군도 아니고 대운관 놈들 거잖아. 털면 기분은 째지겠다.”
“그건 그렇지.”
아까만 해도 소영보다 더 완고한 표정을 하고 있던 방랑족 출신 호위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관병 출신의 두 하늘인 중 한쪽이 소영에게 말했다.
“어때 소영아, 솔직히 이 얘긴 토끼들도 좋아할 거 같지 않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