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 * *
태청은 대운관군을 멀찍이 물려둔 채 군영에 속속 도착하는 하늘인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 대열을 짓고 통솔에 따르는 것이 분명한 지휘 체계가 있어 보였다.
태청은 패배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완씨 시문이 단구읍성에 도착하고 아직 사흘도 온전히 지나지 않았다.
짧은 사이 어떻게 이 정도로 정보를 모으고 사람을 조직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럴 것이 완씨 시문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태청이 본대에서 사람부터 불러오자고 마음먹은 것은, 사람이야말로 시문의 유일한 약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호란은 싸움만 잘하는 어린애였고 시종관 차림을 한 남자도 마부와 잡일을 겸하는 자였다. 다른 호위도 훈련되지 않은 이들뿐이었다.
대갓집에서 오랫동안 봉사했을 만한 이도, 관과 정치의 생리를 알고 윗전의 뜻에 맞게 움직여줄 만한 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권위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태청이 단구 관리를 꼬드겨 실무를 방해하자 시문은 금방 난항에 빠지는 것 같았다.
지난 이틀간 소예는 일부 사실이되 정리되지 않은 보고를 잔뜩 올리고, 하급 관리들을 시켜 사소한 애환거리를 늘어놓게 했다. 그러면 아직 십 대인 극상격은 좀처럼 우선순위를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헤맸다. 첫날 서슬 퍼렇게 관리들을 다잡겠다 나선 것이 우스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겉모습이고 뒤에서는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다. 태청은 헛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큰 무리와 함께 남여가 들어왔다. 호란이 쏜살같이 달려 나오고, 남여에서 내린 시현이 그와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태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축을 거절하고 상대 진영을 향해 걷자 백사대가 말없이 뒤를 따랐다.
단구의 법군 놈들은 어느 쪽을 상대로도 입장이 난처했는지 성문이 열리자마자 모습을 감췄다. 어차피 태청도 그쪽에는 아무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시현은 사람들 앞에 서서 태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제대로 차려입은 호위나 시종 대신 거친 차림새를 하고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하늘인 무리가 잔뜩 서 있었다.
태청으로선 생각도 못 해본 광경이었지만 시현의 태도가 태연해선지 그 모습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태청이 다가가자 시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새벽부터 소란을 일으켜 잠을 깨웠군. 미안하게 되었다.”
“지금 시문께선, 제가 새벽에 일어나게 된 것이 미안하십니까….”
태청은 어처구니 없는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찌 이런 일을 저지르셨습니까. 시문께서는 대운관과 전쟁이라도 벌이실 심산이십니까?”
“전쟁이라니 무슨 소리를. 과장스럽다.”
시현은 짐짓 놀란 척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부정했다. 어째선지 뒤에 선 호란이 흠칫했다.
시현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내가 채굴장 인부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요 이틀 분주하였다. 하지만 그대도 보았듯이 도무지 진척이 없지 않는가. 마음이 답답하여 일단 절차는 뒤로 하더라도 백성의 부자유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런 시간에, 이런 방식으로 말씀입니까?”
“내가 조급증이 있어서. 생각이 미치면 바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대운관 군영을 습격하고 물자를 노략하신 것은 어찌 설명하실 생각이십니까.”
“습격이라니.”
생글거리던 시현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내가 분명 휘하에게 패를 맡기고 명하였을 것이다. 백성이 어려움에 빠져 위로서 구할 의무가 있으니 군의 남는 양곡을 징발하겠다고. 문의 영에 불응한 것은 대운관군이 아닌가.”
사실은 어차피 불응할 것을 알고, 명을 말하기 전에 습격부터 했다. 시현도 알고 태청도 알았다.
하지만 윗전이 돌을 두고 떡이라 말하면 떡인 줄 알고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이었다.
더구나 필요에 의한 징발이란 말을 꺼내 들면 태청도 할 말이 적어졌다.
시현이 짐짓 엄한 소리로 선언했다.
“내가 일을 급작스럽게 진행하여 혼선을 준 것은 사실이니, 이번만은 작은 불응을 문제 삼지 않겠다. 허나 오늘의 행사가 영에 의한 것임을 명확히 하고 더 이상 오해에 의한 충돌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시현은 심지어 제 쪽이 용서해주는 쪽이란 식으로 나왔다.
물론 태청 쪽에서도 이렇게 끌려갈 수만은 없었다.
“시문이시여. 말씀을 어찌하셔도 일어난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시문께서는 팔관성의 자치 조약을 어기고 대운관의 권한을 침해하셨습니다. 임의로 타 관성의 군대에 명령을 내리려 하셨고 무력으로 물자를 탈취하셨습니다.”
태청이 비난조로 나오자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정말로 의아한 듯이 말했다.
“그러면 그대들은 군대를 데려오는데, 나는 끝까지 말로만 하리라 생각했는가? 대체 왜 그리 생각했는가? 그대들은 정말로 나에 대해 오해가 잦다.”
“아. 그것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태청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거기서부터 그르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군이 다가온다는 정보를 끝까지 숨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시현이 하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더 초기에 상황을 파악하고 철저한 계획하에서 대응에 나선 것이 틀림없었다.
“무력으로 군량을 탈취한 것을 인정하시면서 대운관과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하십니까.”
“전쟁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문령에 따를 것이니까.”
시현은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말했지만 태청은 그 말이 엄연한 협박임을 알았다.
그는 해가 뜨면 단구에 도착할 대운관의 본대를 생각했다.
그리고 시현이 확보한 마력석의 양과, 그가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채굴장에서 온 전령은 완전히 기가 질려 있었다. 횡설수설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시현이 산을 허물었다 다시 쌓기라도 한 것 같았다.
결국 처음 직감이 맞았다. 시현이 단구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일은 태청의 깜냥을 아득하게 벗어난 것이었다.
태청은 한숨을 쉬었다.
“시문께서 뜻하신 바를 모두 알겠습니다. 채굴장에서 군을 물리고 읍성 밖에 군영을 설치하여 머물게 하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그리고 더 이상의 충돌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은 진심이다.”
시현이 진지하게 말했다.
“길을 잘 택하라. 그대들이 지금은 타 관성을 노략질하는 데에나 힘을 쓰고 있지만, 나는 그대와 그대의 훈련된 병사들이 돌 인간과 맞서고 사람들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어 마지않는다.”
“…….”
태청은 잠시 침묵했다.
오늘의 그는 평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급히 달려 나온 탓에 복장은 평소보다 간소했고 부상 후라 얼굴이 핼쑥했다.
선 굵고 위압적인 외모의 태청이 웃지 않는 얼굴로 사람을 바라보자 써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가 말했다.
“눈치를 잘 보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말씀을… 위께서는 그렇게도 하시는군요.”
“그런 뜻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외에 말하려고 하는 것이 더 있기에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하하.”
태청이 작게 웃었다.
“어려서부터 위를 모시고, 예법은 익힐 만큼 익혔다고 생각합니다만. 윗분들의 어떤 점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군요.”
그는 깊이 허리를 숙여 시현에게 절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얼굴에 평소의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천것의 넋두리는 들어 넘기시길. 물러가겠습니다.”
“허하겠다.”
태청은 예법대로 다섯 발짝 뒷걸음질한 뒤 등을 돌려 떠났다.
퇴거 소식이 알려지자 대운관군 진영이 술렁였다. 남군영에 있던 병사들도 다른 군영, 어쩌면 읍성 밖으로 옮겨야 했다.
태청이 관아를 향하기 전 부장에게 일을 맡기고 있는데 수군대는 병사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운관의 문께서는 하늘인을 가까이 두시는구나.”
“지금 누가 지껄였느냐.”
태청이 날카롭게 말했다. 진영 전체에 차가운 침묵이 내렸다.
“용서하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나선 여자는 하필 백사대였다. 나이는 고작 갓스물. 경험은 적지만 워낙 자질이 출중하다고 백사대로 발탁된 지 몇 달밖에 안 되었다.
“너는 오늘로 백사대에서 퇴출한다. 삼대대로 내려가서 원하는 만큼 수다나 떨도록.”
“…예.”
여자는 목소리를 떨었을 뿐 순순히 복종의 뜻을 보였다. 태청이 이런 문제에 가차 없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투사로서 아무리 뛰어나든, 무슨 공을 세웠든 상관없다. 저렇게 눈치 없는 자는 절대 태청의 곁에 둘 수 없었다.
애초에 태청이 상장군에 오르지 못하고 지금처럼 외지로 내돌려지는 것도, 주위에 방만한 사람이 많다는 고발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사실이었다.
태청은 백 보 안쪽에서 위씨 교문을 본 일이 없었다. 태청만이 아니라 대운관의 모든 하늘인이 그랬다.
24. 한 길 사람 속
일행이 상황을 정리하고 처소를 향했을 때는 이미 날이 훤했다.
시현은 처소까지 천천히 걷고 싶어 했지만 그건 그렇게 좋은 선택이 못 되었다. 이미 읍성 전체에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있었다.
졸지에 시현과 호위들은 환호를 들으며 거리를 걷게 되었다.
대군이 온다는 소문에 불안할 텐데도 이렇게 속내를 보이는 걸 보면 대운관군의 횡포가 어지간히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문의 권세에 대한 믿음도 있을 것이고.
시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깨가 무겁구나. 일을 바로잡을 방향은 정했다만, 관에서 제대로 일해줄 사람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니.”
단구읍성 관리들은 대부분 고쳐 쓰기 어렵겠다는 것이 그간의 결론이었다.
일행이 일을 준비하는 이틀간, 소영 무리와 연결된 방랑족 외에도 관아의 시중꾼, 잡직, 서리들이 살며시 접근해 고발을 하거나 정보를 주고 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 땅인은 손으로 꼽을 만큼이었고 그나마도 격 없는 말단 실무관뿐이었다.
곁에서 걷던 단이 그다지 공손하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아시지요? 사태를 정상화한다고 여기 천년만년 계실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일은 벽명관 관리들이 해야 한다.”
“벽명관 총치총령을 만나러 길을 돌아가시는 것도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저는.”
원래 빠르게 벽명관을 지나쳐서 겨울이 오기 전에 귀수관에 도착하고, 그쪽 관과의 협력하에 돌 인간을 수색하자는 것이 단의 계획이었다.
겨울 노숙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꼭 세상 경험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대로 떠나면….”
“문 나으리, 시문 나으리!”
시현이 걱정의 말을 하는데 길 저쪽에서 하늘인 남녀가 달려왔다.
시현 앞에 돌 떨어지듯 착지한 두 사람은 절인지 처박는 것인지 모를 형태로 대충 예를 차리고 흥분해서 떠들었다.
“성밖에 사람들이 와 있습니다!”
“시문 나으리를 뵈러 왔답니다!”
시현이 놀라 물었다.
“대운관군이 벌써 도착했느냐?”
들어온 첩보로는 대운관군은 오늘 오후에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소식을 가져온 남녀는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대운관 놈들이 아닙니다. 벽명의 방랑족 무리가 왔습니다!”
“사람들이 전부 여기 단구읍성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문 나으리 소식을 듣고 왔다고 합니다.”
“방랑족이라?”
시현이 되물었다. 그가 영문을 모르는 걸 알고 남녀는 뒤늦게 뭔가 설명을 하려 했다.
“그것이… 벽명의 방랑족은, 사실은 방랑족이지만 방랑족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벽명의 방랑족 대표자로 정삼수란 나리가 문 나으리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전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시현은 두서없는 말 속에서 아는 이름 하나를 건져냈다.
“정삼수? 삼수 정창희라면 안다. 그이는 벽명관의 율사로 유명한 이가 아니냐. 저서를 여럿 읽었는데. 그이가 방랑족의 대표자를 자처한다고?”
“예. 그 율사 나리가 맞습니다. 그 나리는 땅님인데요. 벽명의 방랑족을 모은 것도 다 그분입니다.”
남녀가 말할수록 상황은 오리무중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호란이 그 질문을 하고 말았다.
“방랑족 중에 땅님도 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영은 이번에도 너그럽게 외면해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