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 * *
“시문이 문제 삼는 게 정말 벽명관 백성들에 대한 처우 그것뿐인가? 따로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남의의 질문에 태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행동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다른 사안에 관심을 드러낸 일도 없고, 단구에서 확보한 마력석도 자기가 쓰지 않고 하방에 팔아 벽명관 백성들을 위한 식량과 교환할 계획이라 들었습니다.”
“마력석을 식량과 바꿔? 그것도 하방하고?”
남의는 당혹해서 되물었다.
사실 이들의 임무는 단순히 벽명관의 마력석을 채굴하여 대운관에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벽명관과 대운관 양대 마력석 산지에서 나오는 마력석을 독점하여, 대운관이 팔관성 사이에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였다.
완씨 시문의 개입으로 벽명관과 타 지역의 마력석 교역이 재개된다면 그 그림이 바탕부터 어그러진다.
불현듯 의심이 솟은 남의가 태청을 다그쳤다.
“민생은 핑계고, 의도적으로 우리 일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냐?”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 앞에서 일부러 교문을 예전 격칭으로 부르며 반감을 시사했습니다.”
“끄응….”
남의는 수염을 당기며 고민에 빠졌다.
완씨 시문이 굳이 위씨 교문을 문으로 인정해줄 이유가 없기는 했다. 대운관이 변고를 틈타 잇속을 차리는 것도 심기에 거슬릴 것이다.
하지만 근거지를 멀리 떠나와 제 발밑도 불안한 상황에서,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적대 의사를 표명할 줄은 몰랐다.
“만약에 우리 목적을 다 알고 어깃장을 놓는 거면 꽤 골치가 아파질 텐데….”
“정말로 백성을 위하는 쪽이 더 문제지요.”
“뭐?”
“시문에게 따로 노리는 것이 있다면 거래나 협상의 여지가 있겠지만, 정말로 백성의 굶주림을 걱정해서 식량을 들여오려는 거라면 저지할 방법이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태청의 말에 남의는 짜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연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장군도 보기보다 순진한 사람이라니까. 아니면 그간 벽명관 촌놈들과 어울리느라 세상 물이 다 빠진 게지.”
남의가 수염을 당겼다.
“뭐… 완씨 시문에 대한 세평을 보면, 그자는 뭘 하든 철저히 명분을 내세우는 자다. 허니 그를 기준으로 담판 전략을 세우는 것이 맞기는 하겠구만.”
남의는 내일까지 가능한 정보를 모으라 어쩌라 잔소리를 한 뒤 다른 땅인들과 상의하겠다며 태청을 쫓아냈다.
태청은 바닥에 흩뿌려진 보고서를 주워 모아 막사를 나갔다.
보고서를 받고 자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남의의 비서관이 쫓아 나와 태청을 다른 막사로 이끌었다. 원래 진짜 보고는 남의를 상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정보를 모두 주고받은 태청이 군 의법사를 찾아갈지 말지 고민하는데 비서관과 엇갈려 연화가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 손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이 조각된 차합이 들려 있었다.
긁을 기회는 안 놓치지만 저 아쉬운 소리는 또 해야겠다 이거지. 태청은 연화를 외면한 채 시큰둥하게 말했다.
“자랑하시는 윤지관 흑차라면 됐습니다. 고상한 척 풍류를 아는 척은 땅님네들 앞에서 하는 걸로도 충분하니까요.”
“왜? 나는 정말로 차를 좋아한다오. 장군도 남들 사이에 끼어서 아는 척을 40년을 해보시게. 나름 자기 취향이란 게 생긴다네.”
연화가 능글맞게 웃으며 풍로에 불을 켜고 주전자를 올렸다.
진짜든 가식이든 태청은 연화의 풍류 놀음에 어울려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가 길씨 남의 앞에서 못 드러냈던 불만을 터뜨렸다.
“대체 어쩌자고 정삼수의 무리가 저렇게 커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오면서 보니 시문이 안 왔어도 조만간 민란이 났을 모양새더군요.”
“나는 정삼수를 찾아내서 죽이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네. 하지만 어사께서 원하지 않으셨어.”
길씨 남의는 세간의 평판에 목매는 사람이라, 선비들 사이에 이름 높은 명사를 모살한 자로 소문나는 것을 꺼렸다.
지금이라고 딱히 평판이 좋을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웃기는 노릇이었다.
태청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죽일 수 없으니 그냥 활개 치게 내버려 두셨다? 그동안 단구에 있는 제게는 아무 문제 없다 소리만 계속하시고? 거참 나이에 맞게 노회하고 요령 좋은 분이시로군요.”
연화가 밉살스럽다는 듯 태청을 노려보았다. 그의 말씨가 바뀌었다.
“네가 겉으로만 공손한 척을 하지, 이렇게 속 시커멓고 건방진 놈인 걸 윗전들께서 모르실 것 같으냐? 네가 그 잘난 공적을 갖고도 이런 데나 처박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상장군님이라고 윗전들께 예쁘게 보여서 여기 발령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디, 광산으로 유명한 벽명관에 와서 좋은 옥이라도 좀 구하셨습니까?”
태청이 빈정거렸다. 연화는 옥 이야기가 나오자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완씨 시문을 대면했다면 그의 문령패도 보았겠지. 어떻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신경을 안 써서.”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한번 봐 두었어야지!”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제가 모시는 분은 교문인데, 시문이 어떤 패를 가지고 있든 누가 상관한다고요.”
태청이 빙글거렸다. 연화는 성이 나서 언성을 높였다.
“너라고 언제까지 이게 남의 일일 것 같으냐!”
“글쎄요. 저는 윗전들께 미움받는 몸이라, 그런 중요한 임무가 저한테까지 올런지 모르겠습니다.”
연화는 분해서 시근대면서도 다구를 갖추고 차합에서 종이에 싼 떡차를 꺼냈다.
차 덩어리 끝부분을 허무는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차를 우리는 사이 연화에게서 성난 기색이 스러졌다.
그가 한결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어때? 문의 격패가 귀하기로서니 잘 때 쉴 때도 끼고 있진 않겠지. 사람을 잘 쓰면 기회를 봐서 빼낼 수 있지 않을까?”
태청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교문께서 명령패를 만들어 오랬지 언제 훔쳐 오라고 하셨습니까?”
“의외로 그게 답일 수도 있지. 솔직히 말해 보게. 세상 무슨 귀물로 패를 새겨 간들 그분의 눈에 찰 거라고 생각하나?”
문의 권위를 보여줄 명령패를 만들어오라. 그것이 교문이 내린 명이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그 명령에 몇 달간 태화궁에 출입하는 모두가 전전긍긍하게 될 줄 아무도 몰랐다.
온갖 귀한 소재, 최고의 장인이 깎아낸 아름다운 글자패가 모두 내쳐지고 내동댕이쳐졌다.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봉변을 당했다. 연화가 벽명관에 파견된 것도 그 불똥이 튄 탓이었다.
연화가 흐흐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야 완씨 시문의 명령패를 가져가면 그분은 시키지 않은 짓을 했다고 벼락같이 화를 내시겠지. 하지만 내치시진 못할걸? 왜냐하면 그분이 정말로 원하는 건 그거니까.”
“대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의외로 높은 분일수록 내심이 빤하다네.”
연화가 태청 앞에 찻잔을 놓아주며 은근하게 말했다.
“어차피 벽명관 점령은 오래 못 가. 본토로부터 보내오는 군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걸 알지?”
태청이 턱을 쓰다듬었다.
“본토 사정도 좋지만은 않은 것 같더군요.”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었지. 하지만 일이 마땅찮게 돌아가면 그 책임은 파병군에 돌아올 거네. 그러니 우린 따로 살아남을 구멍을 만들어 놓아야 된다고.”
“완씨 시문의 명령패가 그 살 구멍이 된다는 겁니까?”
“되고 말고! 왜, 자네는 교문께서 완씨 시문의 명령패를 갖고 싶어 하신다는 게 이상해 보이나?”
“그야, 깊은 내심으로는 그러실 수도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교문이 첫 번째로 진상된 격패를 품위가 없다고 내쳤을 때 누구나가 이건 답이 안 나오는 문제란 걸 깨달았다.
문의 격에 어울리는, 권위가 충분히 드러나는 패를 가져오라니. 설령 패에서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그건 패가 생긴 모양 탓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교문이 원하는 그런 권위를 지닌 패는 세상에 한 개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할 뿐이었다. 교문 본인조차도.
태청이 뚱하게 말했다.
“대놓고 말하기엔 너무 유치하고 낯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원래 사람의 욕망이란 유치하고 낯부끄러운 거야! 이미 다 가진 사람일수록 그런 것밖에 안 남지. 내 말을 믿게. 손해 볼 일 없다고!”
태청은 연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다 늙어서 완력도 체력도 아무것도 안 남은 연화가 꾸역꾸역 자리를 붙들고 있는 건 그가 네 장군 중에서 땅인 윗전들의 속내를 가장 잘 꿰뚫어 보기 때문이었다.
태청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등을 뒤로 빼며 말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처소 일꾼 사이에 염탐할 사람을 섞어 놓았지만 전부 이런저런 핑계로 내쳐졌습니다. 신변 시중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사람을 많이 안 써? 그건 그것대로 허점이 생기지. 어디 얘기 좀 들어보자고.”
연화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태청은 찻잔을 들어 연화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17년을 묵혔다는 흑차인지 숙차인지였지만 그에겐 그냥 잘 덥힌 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 * *
새벽의 공방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단구 관아는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삼수 정창희가 데려온 무리에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이 포진했다. 그중에는 대운관에 휘둘리는 데 반발해서 뛰쳐나간 단구의 관인도 여럿 있었다.
의욕이 있고 사정을 아는 사람이 들어가자 말단에서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운관군이 물러가고 소예와 태청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단구의 땅인 관리들도 협조적으로 나왔다.
웬만큼 일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시현은 짬이 있을 때 쉬어둘 생각으로 처소로 돌아왔다.
동트기 전부터 읍성 안팎을 돌아다녀 적잖이 피곤했다.
신경 쓰던 대운관군의 본대는 거리를 두고 진군을 멈추었다고 하니 내일이나 대면하게 될 것이다.
처소의 중문 안은 출입을 금해 두어 조용했다. 주채의 대청을 오르던 시현은 섬돌에 치수 큰 흑혜 한 켤레가 놓인 것을 보았다.
사랑의 문을 열자 방구석에서 문서를 뒤적이고 있던 단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시현의 뒤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보고 인사말도 없이 문서로 시선을 내렸다.
시현은 문을 닫고 단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있었구나. 말한 것은 찾았느냐?”
“어. 생각보다 많다. 더 나올 거야.”
단은 옆에 명부 몇 장을 늘어놓고 방씨 온의가 준 종이 뭉치를 뒤지고 있었다. 받을 때도 묵직했지만 펼쳐 놓으니 생각보다 양이 더 많았다.
시현은 겉옷을 벗다가 보료 곁에 물주전자와 잔이 준비된 것을 보았다.
그가 자리에 앉아 물을 따르며 말을 꺼냈다.
“관아 쪽은 한시름 놓았다. 이제 사람들이….”
시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표현을 골랐다.
“일을 일같이 하고 있다.”
“하하.”
“대운관군과의 협상도 길이 더 뚜렷하게 보인다. 삼수는 협약을 깨기 위한 준비를 많이 해왔더구나.”
“흠.”
“한때는 직접 대운관에 가서 교문과 협상해야 하나도 생각했는데.”
문서에 집중해서 반응이 적던 단이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단의 얼굴이 굳은 것을 보고 시현이 서둘러 말했다.
“대운관에 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생각도 했지만 안 가도 되겠다는 말이다.”
“…정신 차려. 막판 다 와서 오락가락하지 말고.”
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시현은 마음 상한 얼굴이 되었다.
“말이 너무하지 않으냐? 나는 그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진짜로 정신 차려라. 너 지금 정씨 해인처럼 말하고 있어.”
“정씨 해인이 어때서 그러느냐.”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물론 그이가 위정자로서는 다소 결격이 있지만, 그저 사람으로서는….”
감싸는 말을 하려던 시현은 한 문장을 끝맺기도 전에 포기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그이는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는 생각보다 흔하다. 꼭 법술사만 그런 것도 아니야. 돌아보면 장유도 비슷한 유형이 아니냐?”
시현이 따지는 투로 나오자 단은 미간을 좁혔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런 이도 숱하게 있는데, 너는 나를 보고 대… 아니, 머리가 꽃밭이라고.”
시현이 투덜거렸다. 시종 시큰둥하던 단의 얼굴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그 말을 너한테 직접 했었냐? 속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세 번이나 했다!”
“뭘 또 그걸 세고 있어.”
단은 어음 뭉치를 내려놓고 시현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대가리 꽃밭 소리가 그렇게 억울했냐? 열여섯도 안 된 애랑 비교해서 투정 부릴 정도로?”
“나이를 말하면, 내가 아직 열여섯일 때도 너는 내게 못되게 굴었다.”
시현이 계속 투덜대자 단이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현은 기가 죽으면서도 항의했다.
“왜 내가 말할 때만 그러느냐? 호란이 너더러 못됐다고 할 때는 순순하게 인정하더니.”
“인정한 적 없거든? 솔직히 니네 둘 다 나한테 뭘 바라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나같이 사람 좋은 호구가 어디 있다고.”
말을 받으려던 시현은 바깥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단도 낌새를 알고 분류한 문서들을 바로 감출 수 있도록 갈무리했다.
문밖에서 거처 호위대의 머리 노릇을 하는 편수가 말했다.
“나으리, 편수입니다. 벽명의 방랑족 측에서 나으리께 중요한 전갈이 있다고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들라 하거라.”
“그런데 그것이… 전갈꾼이 조금 이상합니다.”
편수의 목소리에는 난처한 기색이 있었다.
“이상하다니?”
시현은 방문을 열고 직접 대청으로 나갔다. 중문 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들어가면 안 되오!”
“괜찮아요. 문께서도 나를… 아니, 저를 보면 괜찮다고 하실 거예요.”
들려온 밝은 목소리는 단과 시현이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곧 반민 서리 복장을 한 다갈색 머리의 소년이 중문 안으로 쏙 들어왔다.
다들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그를 붙잡지는 못했다. 소년은 총총 앞마당을 가로질러 대청에 올라왔다.
“문을 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
정씨 해인이 보통례를 하고서 헤실 웃었다.
시현은 침묵했고 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말하는 대가리 꽃밭이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관한 얘기란 걸, 쟤도 슬슬 이해하기 시작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