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 * *
단이 문서를 천천히 정리하도록 놓아두고, 시현은 해성을 데리고 잠시 뒤뜰을 거닐었다.
걸으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해성은 별채로 다가가 툇마루에 앉았다. 그가 말했다.
“감사하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어서 왔어요.”
“감사라니, 무엇을 말씀인가?”
“그… 폐격이요. 가능하면 하지 말자고 해주신 거.”
무릎에 걸쳐 둔 소년의 손이 살짝 떨렸다. 시현은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되었다.
해성이 말했다.
“사실은 싫었거든요. 폐격되는 거…. 달리 책임질 방법이 생각이 안 나서, 이모님한테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아직은 향후 일을 장담할 수 없소.”
“그래도 지금 당장은 저를 신경 써주신 거잖아요.”
소년이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요, 어린데 많이 노력했다고 말해준 것도….”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해성이 두 발끝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인에 달하기 전부터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완씨 시문은 더 어릴 때 달했다. 완씨 시문은 다른 과목도 다 잘한다. 위로서 책무를 다하고, 나랑 달라서 아주 의젓하고, 몸가짐도 단정하고… 뭐 그런 얘기들요. 다들 문을 직접 만나본 것도 아니면서 말은 그렇게 많이 하더라고요.”
해성은 입을 삐죽였다.
“정작 문께서는 내가 열심히 노력했다고 하시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시현은 다시 웃었다. 아이 같은 행동 때문인지 시현은 해성이 이상하게 스스럽지 않았다.
그는 툇마루로 다가가 해성의 옆에 앉았다. 해성이 화색을 보이며 물었다.
“문께서도 공부하면서 힘들고 하기 싫을 때가 있지요?”
시현은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마음이 들어도 밖으로 말하기 어렵소. 더한 노력을 하고도 성취에 이르지 못하는 이가 숱하니.”
“아. 그 소리 다들 해요. 저는 진짜 행복한 줄 알라고. 근데 결과가 잘 나와도 중간에 힘든 건 힘든 거잖아요.”
“그렇지. 그대가 힘들다면 힘든 것이오.”
시현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해성이 반색하며 말을 받았다.
“그렇죠! 당연한 거고 책에도 많이 나오는 말인데, 저한테는 그 말 해주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그리고요, 음…. 문께서도 극상격에 달한 후에 친구가 다 없어졌나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의 연발에 시현은 당황했다. 해성은 시현이 반응이야 어쨌든 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없어졌다고 말하면 원래 친구들한테 미안하기는 해요. 잘 못 만나도 여전히 친구기는 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저하고 친하고 싶어 하니까… 친구가 뭔지 잘 모르게 됐어요.”
이 분야에선 시현도 거의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시현은 격에 달하기 전부터도 완씨 선무와 함씨 경인의 아들이었다.
해성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제 호가 성진이거든요. 별 성, 별 진. 멋있어서 호로 불리는 거 좋아하는데 이제는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학당 때 친구들도 남들 앞에선 못 부르거나, 반대로 부를 때 떠벌리듯 하거나….”
“이해하오. 삼가는 이나 삼가지 않는 이나 각각의 이유로 대하기가 어려워지지.”
“문께서는 원래 말씀을 그렇게 경서 머리말처럼 하세요, 아니면 저하고 안 친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시현은 정말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해성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질문을 쏟아냈다.
“문께선 호가 뭐예요? 호로 불러도 돼요? 말도 좀 더, 왜… 편하게 하고요. 나이도 비슷한데.”
“녹주라고 하오. 다만 어떨까 싶소. 공적인 자리에서는 부를 수 없고.”
시현은 이후에는 공적인 자리에서나 보게 되리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해성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러면 평소에는 괜찮다는 말씀이지요!”
해성이 반색하며 시현을 향해 돌아앉았다.
“소문만 듣고 되게 어렵고 무서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그렇네요! 아니, 하나도 안 그래.”
“그, 그래?”
시현은 얼결에 같은 투로 대답했다. 해성이 활짝 웃었다.
“응! 너랑은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편해.”
“……그런 말은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데.”
“진짜? 이상하네.”
해성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앉은 데서 벌떡 일어났다.
“춥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따뜻한 차 마시고 싶어.”
“음. 그래.”
시현은 조금 어색하게 말했지만 웃는 얼굴이었다. 그가 일어서서 주채를 향했다.
* * *
“그럼 오늘 밤부터 벽명관 총치총령 나으리도 이 처소에서 머무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었다. 주채에 쓰지 않는 방이 있으니 그곳을 처소로 준비해 다오. 신변 시중과 호위에도 너희가 각각 인력을 배치해 주고.”
시현이 말했다. 오후가 지나기 전에 준비를 시킬 요량으로 호란과 단을 방으로 불러들인 참이었다.
단은 골치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가 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시현에게 물었다.
“나리님, 대체 뭐가 웃기신 건데요?”
“아니, 삼수도 듣자마자 너와 똑같이 얼굴을 찡그리던 게 생각나서.”
단의 눈썹이 한없이 치켜 올라갔다. 시현이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성 밖에서 지내기가 불편하다 하기도 하고… 실은 신변 호위와 보안도 걱정이라서. 막사를 쳤다 해도 사방이 트인 장소가 아니냐. 오가는 이도 보는 눈도 많고.”
“그래도 자기 호위가 있을 거 아닙니까. 명색이 한 관성의 총치총령이잖아요.”
“그것이 마땅치가 않은 모양이다. 서로읍성에서 데리고 있던 호위와 시중꾼을 전부 떨구고 왔다는구나. 모두 대운관에 회유된 인물이라.”
단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알고는 계시죠? 우리 지금도 사람 모자랍니다. 호위조도 조각조각 나눠서 돌리고 있고, 일꾼도 최소한만 쓰고 있고요.”
“일꾼을 다 쫓아낸 건 단 네가 아니냐.”
“그럼 대놓고 수상한데 그걸 그냥 놓아둡니까! 그 사람들 다 태청이 보냈다는 거 잊으셨어요?”
단이 욱 성질을 올렸다가 빠르게 가라앉혔다.
단구읍성에 온 첫날, 단은 여장을 풀자마자 처소에 딸린 종들을 무작위로 반 나누고 절반은 중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호위 몇에게 지켜보게 했다가 공연히 초조한 행동거지를 보이는 자, 안팎을 쓸데없이 오가려는 자는 싹 쫓아냈다.
나머지도 차례로 내보내거나 소영의 인맥을 통해 소개받은 사람으로 교체했다.
어쨌든 들어온 사람보다 나간 사람이 많으니 당연히 사람이 모자라게 되었다.
심지어 단은 소영네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결국 단은 각 요지를 점거한 하늘인 무리와의 연락, 물자와 인력 분배 계획, 사방에서 들어오는 정보와 보고 취합, 처소 관리, 그리고 다른 모든 일에 더해서 시현의 거처 청소와 물건 정리까지 여전히 자기가 하고 있었다.
일정 부분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으나 어쨌든 단은 분노에 찼다.
호위 쪽도 다르지 않았다.
소영네 방랑족 무리 대부분이 외부 세력을 조율하고 지휘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새 인력을 꽤 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단은 번을 서는 호위 무리 사이에 꼭 소릿골에서 처음 데려온 이들을 섞어서 구심점 겸 통제 역할을 하게 했다.
옆에서 보면 좀 과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관리한 덕택에 광산 사람들을 해방하고 식량과 마력석을 탈취하는 대규모 작전이 방해 없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나리님만 호위한다고 다가 아니에요. 내일은 대운관 본대와의 담판이 있잖아요. 그럼 나리님이 호위 주력을 끌고 나가신 틈을 타서 처소를 기웃대거나 남은 사람들을 회유하려는 놈들이 꼭 있을 거라고요.”
“그건… 곤란하겠군.”
“그 판국에 저 철딱서니 없는 양반까지 처소에 두라고요? 그것도 바깥에는 비밀로 해서? 생각만 해도 골치가… 어휴.”
단이 다시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호란이 말했다.
“정 그러면, 내일 회의 때 내가 처소 지킬까? 시문 님 호위는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네가?”
단이 되물었다. 사람이 많아진 만큼 역할 분배도 그때그때 달라졌다. 하지만 호란이 먼저 시현의 호위에서 빠지겠다고 한 일은 이제껏 없었다.
호란이 변명했다.
“회의 따라가기 싫어서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잘해주고 있고, 그리고….”
호란은 조금 머뭇대더니 시무룩해져서 고백했다.
“사실은 내일 태청 볼 거 생각하니까 불편해서.”
“응?”
시현도 단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두 사람이 차례로 물었다.
“어째서 말이냐? 상대할 자신 없다고 말한 것치고는 태청을 훌륭하게 압도하지 않았더냐.”
“그래. 왜 니가 불편해? 얻어터진 쪽이 불편해야지.”
“그게 꼭 그렇지도 않아….”
호란이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 죽이려고 때린 사람이 안 죽고 살아서 다시 보는 거 처음이란 말야. 어떤 얼굴로 만나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
“…….”
잠시 침묵이 있은 후 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이런 고민을 들어보는 건 처음이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전혀 모르겠구나.”
“얼핏 들으면 설레는 종류 얘긴가 싶은데 잘 생각하면 엄청 무서운 소릴 한다, 너.”
단이 인상을 쓰더니 돌연 의심에 차서 물었다.
“설마 그 자식한테 혹한 건 아니지? 너 미남자한테 약하잖아.”
호란은 정색했다.
“하나도 안 약해. 내가 이겼는걸!”
“그런 약함이 아니라… 아니, 됐다.”
단이 고개를 젓고 시현을 보았다.
“뭐, 제가 불평해 봐야 이미 윗분들 사이에서 결정 난 일인 거지요?”
“미안하지만 그렇다.”
“그래도 해인께서 주채에 머무시는 건 안 됩니다. 그러면 딸린 사람들까지 전부 주채에 출입하게 되니까요. 대신 온돌이 있는 별채를 내어드리겠습니다. 호위나 시중꾼은… 저는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까 소영 호위나 다른 분께 추천을 받아 보죠. 그리고 내일 회의 때는 음….”
단이 한동안 고민하더니 방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지요. 사람을 더 뽑는 김에 차라리 처소 경비 수를 전체적으로 늘리겠습니다. 대신 처소에 소영 호위를 남겨서 사람들 통제하게 하고요. 그분이면 수상한 낌새는 잘 잡을 테니까.”
“나는?”
“너는 당연히 나리님 따라서 회의 가고.”
“모두 적절한 것 같구나. 그렇게 하자.”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다만 단의 일거리를 줄일 방법을 찾아야겠다.”
“좋은 생각이네요. 이제 벽명관을 위해서 일할 사람이 많이 늘어났으니까, 슬슬 그쪽한테 맡겨놓고 우리는 북쪽으로 떠나면 어떨까요? 그게 제일 쉬울 거 같은데.”
단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시현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되도록 빨리 그러도록 해보마.”
“그래 주세요. 믿음은 하나도 안 가지만요.”
단이 퉁명스럽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호란도 뒤를 따랐다.
대청을 내려간 단은 중문을 향하려다 말고 자리에 섰다. 닫힌 중문 밖은 사람이 오가는 소리로 어수선했다.
단은 까마득한 눈으로 중문을 바라보더니 대청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아, 일하러 가기 싫다…. 사람 보기 싫다.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싫다.”
“단….”
호란은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서 단의 옆에 살그머니 앉았다.
“힘들면 좀 더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면 어때?”
“맡기고 있어. 기회만 있으면 전부 떠넘기고 있어.”
“응. 그것도 아는데, 내가 보기엔 단은 누구한테 뭘 맡기고 나면 바로바로 새 일거리를 만드는 것 같아서. 좀 덜 그래도 될 거 같은데.”
호란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단은 호란 쪽을 보더니 어마무지하게 인상을 썼다.
“야. 내가 일을 만드는 게 아냐. 할 일이 원래부터 거기 빤하게 있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하니까 할 수 없이 내가 하는 것뿐이야!”
호란이 쿡쿡 웃음을 참는 소리를 냈다. 단이 눈을 부라렸다.
“넌 지금 이게 웃기냐?”
“그래서가 아니라….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내면서 보니까 단이랑 시문 님은 좀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
“뭐라고? 무슨 되지도 않는 소리야!”
단은 그야말로 기겁했다. 호란이 말했다.
“지금 시문 님도 똑같잖아. 할 일이 뻔히 보이는데 다른 땅님들이 아무도 안 하니까 할 수 없이 하고 있는 거잖아.”
“그거랑은 다르지. 그 양반은, 보통은 남들이 알고도 못 하는 일을 아무거나 막 저지르는 거고.”
“아냐. 내 생각엔 비슷한 거 같아.”
호란이 진지하게 말했다.
“단이랑 시문 님은 항상 할 일이 뭔지 알고, 그 일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도 아는 거잖아. 그건 진짜 좋은 거 같아. 난 뭔가 하고 싶어도 뭘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거든. 그래서 자주 생각해. 나는 단이랑 시문 님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호란은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단은 탐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거 같아…. 나는 그런 거랑은 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