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 * *
남의는 귀를 의심했다.
땅 위에 누가 감히 대운관을 상대로 압류를 행사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설마 돌 인간과 싸운다는 대의명분으로 여행하는 완씨 시문을 상대로? 그건 더 말이 안 되고.
불길한 기분에 휩싸이며 남의가 물었다.
“무슨 채권자 말입니까?”
“그야 대운관에 대한 채권자네. 방씨 온의라고 들어보았는가? 중부에서는 아주 유명한 거상이던데.”
“당연히 알지요….”
남의가 초조하게 말했다. 불길한 느낌은 더 켜졌다.
사전에 말이 되어 있던 것처럼 휘장 저편에서 사람 둘이 들어왔다. 절하고 회의탁 앞에 선 것은 삼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한 사람과 단이었다.
여자는 북방식 저고리와 바지 위에 중부식 고름 달린 장포를 여미지 않고 걸치고 열쇠니 수첩, 잡다한 물건을 허리띠에 주렁주렁 걸고 있었다. 이런 근본 없는 차림새는 최근 북방의 젊은 상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이었다.
반면 단은 세조대 없이 흑색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고 손에는 크기가 다른 문서철 두엇을 겹쳐 들고 있었다.
희의탁에 둘러앉은 여러 고관과 학자들, 뒤쪽에 선 하늘인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집중되었다.
단은 답지 않게 긴장했는지 얼굴이 약간 창백했다. 하지만 입을 열자 곧 표정이 원래로 돌아왔다.
“윗전들을 뵙습니다. 소인은 남운관 백성으로 감히 무상을 모시고 있는 단이라 합니다.”
“윗전들을 뵙습니다. 소인은 벽명관 양민으로 김순이라 하며 한때 백희상단에 의탁했다가 지금은 벽명관 대관성에서 상회를 운영하는 자입니다. 이 자리에는 백희상단과 다천관 대관성 방씨 온의의 대리인으로 나왔습니다.”
두 사람이 차례로 자신을 소개했다.
남의는 반민 둘의 기라도 죽이려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을 보냈으나, 말을 꺼낸 것은 시현 쪽이었다.
시현이 잡담이라도 늘어놓듯 이야기했다.
“온의 그이가 사정이 딱하더군. 변고 전에 대운관이 공매하는 마력석에 고액으로 입찰하고 선금을 지불했는데, 변고가 나면서 약속한 물건을 하나도 못 받았다고.”
남의는 기가 막혔다.
“설마, 그 선금 대신으로 군량을 압류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됐네.”
시현이 모른 척 제 근처에 선 반민들에게 물었다.
“그런 얘기가 맞지?”
“예. 자세한 경위와 내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백희상단이 계약한 대운관 속령의 공영 가공소가 모두 ….”
단이 문서철을 여는데 남의가 서둘러 말을 막았다.
“필요 없다, 필요 없어!”
시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역을 안 듣고 넘어가도 되겠는가? 귀중한 군의 자산인데.”
“넘어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남의는 결국 다시 화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침착하려고 해도 시현이 어설프게 어리숙한 척을 하며 뻔히 보이는 수작을 할 때마다 울화가 솟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말이나 됩니까! 어떻게 대운관의 군 자산에 일개 상인이 손을 댄단 말입니까? 더구나 마력석 금수 조치는 변고에서 대운관 백성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마력석이 아니라 군량을 압류하지 않았나. 마력석을 못 받게 됐으면 선금을 돌려받는 게 사리에 맞지.”
남의가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단이 다소곳하게 말했다.
“원래 계약에는 일방적 계약 파기에 대한 배상 조항이 있었습니다만, 재난 상황임을 감안하여 원금만 회수하도록 권했습니다. 백희 대리인 측에서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인상된 곡가도 가능한 한 반영하여 계산하였습니다. 바로 영수증을 작성해드릴 수….”
“아니, 아니. 인정할 수 없다.”
남의가 단을 향해 휘휘 손을 저었다. 그는 혈압이 올라서 귓속이 울릴 지경이었으나 필사적으로 표정과 말씨를 가다듬었다.
“시문이시여. 뻔한 수작은 그만둬 주십시오. 군량을 탈취한 것도 시문이시고 채권자라고 사람을 내세운 것도 시문이십니다. 더구나, 시문께선 이미 대운관의 군량을 풀어 광산의 폭도들에게 나눠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내가 따로 백희 대리인과 합의한 바네.”
“그게 바로 말이 안 되는 수작이란 말씀입니다. 어차피 아무나에게 뿌릴 양곡을 방씨 온의가 뭐 하러 압류한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순이라는 상인의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직전까지 고관들 앞에서 주눅 들었던 모습은 어디 가고, 그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말했다.
“우리 온의 어르신은 돈과 양곡을 아무에게 나눠주기는 좋아하시지만, 절대로 거래 상대에게 돈을 그냥 떼이지는 않으십니다. 저도 어르신께 일 배울 때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닥쳐라! 천한 것이 어디서 허락도 없이 입을 열어!”
남의는 핏대를 세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아차 싶어 멈췄다.
시현이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이는 내가 말을 하라고 이 자리에 부른 이다. 그대가 망신 주라고 부른 이가 아니라.”
“그, 그것이 아닙니다! 단지…. 단지.”
남의는 멀거니 선 채 말을 잃었다. 머리에 피가 몰려서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길씨 남의는 제 성질을 주체 못 하기로 대운관에서 유명했지만, 바로 그 성질을 무기로 출세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성미가 급해 상황이나 남의 사정을 고려할 줄 몰랐다.
위에서 무얼 시키면 앞뒤 가리지 않고 알았다고 한 다음, 무작정 아래를 닦달하여 성과를 냈다.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이번 벽명관 임무를 맡게 된 것도 그런 저돌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성격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는 위를 상대로든 아래를 상대로든 차근히 설명을 하거나 논리를 펴며 제 입장을 이해시키려 해본 경험이 없었다.
“어사, 자리에 앉으시지요.”
함께 회담에 나온 대운관 관인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 역시 평소에 남의를 상대로 알겠다 잘하겠다 소리만 할 줄 알던 사람이었다. 이럴 때는 도움이 안 되었다.
남의는 진땀을 닦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가 기운 없이 말했다.
“제가 지병으로 혈압이 높아…. 잠시 휴회하여도 되겠습니까.”
“그리하라. 쉬는 사이 마음을 진정하고 이제까지 오간 이야기도 잘 검토하고 오라. 그대는 흥분해서 들어넘겼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이야기가 많았다.”
시현의 말에는 노골적으로 뼈가 있었지만 남의는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오간 이야기라 해도 창희가 벽명관 관인들을 상대로 협약이 졸속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창희의 논리는 직접적으로 표현만 안 했다 뿐 협약이 무효라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곧 양측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막사를 빠져나왔다.
그중에는 회담이 진행되는 내내 회의탁에서 떨어진 곳에 말없이 서 있기만 했던 연화도 섞여 있었다.
연화는 사람들 무리를 벗어나며 하릴없이 회담 장소를 둘러보았다.
회담장 역할을 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막사 주위에는 양측의 대기실용 막사, 실무자들이나 일꾼들을 위한 막사가 줄줄이 서 있어 하나의 성채 같은 인상을 주었다.
회담장을 차릴 때 모두가 이번 회담이 하루 이틀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논쟁으로 목전에 닥친 무력 충돌을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휘둘리는 꼴을 보니 남의는 길게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연화는 산책하듯 슬슬 걸어 막사와 멀어졌다. 회담장 주위에서 번을 서는 병사들은 전부 연화의 사람들이었지만 눈에 띄어 좋을 것은 없었다.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생각한 그는 노리개로 단 금장 나침반을 열어 방향을 가늠한 다음 북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한 암석 지대에 도달했을 때 연화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느 하늘인에겐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이제 연화에겐 벅찼다.
아마 나이 이전의 문제일 것이다. 연화는 뛰고 달리고 싸우는 삶과 멀어진 지 너무 오래되었다.
상대를 만나기 전에 숨을 고르고 싶었지만 그럴 틈은 없었다.
암석 지대 초입에 들끓는 용암 같은 기운을 뿜는 장신의 남자가 돌탑처럼 서서 연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감 좋은 사람은 십 리 밖에서도 알아볼 저 기운 때문에라도, 남의 눈을 피해 이 남자를 만나려면 이렇게 외딴 장소가 아니면 안 되었다.
연화는 남자에게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
“여어 장군. 많이 기다렸나?”
“괜찮습니다. 생각할 것이 많았어서.”
“자네 그거 소질 없잖아?”
“신경 끄시죠.”
태청이 끼었던 팔짱을 풀며 연화 쪽으로 걸어왔다.
“회담 쪽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하하. 어사 나리가 시문과 정삼수에게 정신을 못 차리고 끌려다니고 있지. 아까운 노릇이야. 우리 일만 아니면 재미나게 구경할 것을.”
연화가 킬킬거리더니 덧붙였다.
“시문은 작정하고 어사 나리 성질만 긁고 있고, 실제 회담의 진행은 정삼수한테 거의 맡겼어. 자기는 한 발 빠지려는 모양이야.”
“의외로군요. 저를 상대로는 직접 등골이라도 잡아 뽑을 것처럼 굴더니.”
“그때는 정삼수라는 패가 없었으니까. 상황이 바뀐 걸 보고 타 관성 일에 간섭한다는 소릴 덜 들을 길을 찾아낸 거지. 보면 어린데 아주 약아.”
전날 태청이 지적했듯 정삼수와 그 무리는 대운관 입장에서 시문에 버금가는 악재였다. 그 둘이 합쳐졌으니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대운관의 악재는 그 외에도 더 있었으나 연화는 말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자네를 꺾었다는 아이를 봤네. 감탄밖에 안 나오던데. 자질을 사람으로 빚어놓으면 그런 모양이 될까 싶어.”
“상대를 칭찬하신다고 제 기분이 나아지진 않습니다.”
“비뚤어졌기는.”
연화가 웃었다. 태청의 얼굴은 굳은 채 풀리지 않았다.
“그보다 일이 어렵게 됐습니다. 처소의 호위가 대폭 늘어났습니다. 시문이 회담하러 처소를 비운 후에도 경계에 날을 세워 예정한 정탐에 실패했습니다.”
“하필 우리가 염탐을 맘먹은 오늘? 거참 신통한 노릇일세.”
연화가 생각하는 얼굴로 물었다.
“늘린 것은 호위뿐인가?”
“아니요. 처소 돌볼 사람도 일곱을 더 들였습니다. 상급의 일용품과 옷감도 사들이고 바느질하는 사람도 불렀다고 합니다. 회담을 길게 보고 장기 체류를 준비하는지도 모릅니다.”
“흐흠.”
연화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쪽이 사람 구할 때 연줄로 쓰는 자가 누구누군지는 얼추 파악했습니다만, 이쪽 사람을 집어넣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됐네. 염탐꾼을 넣어 봐야 말단으로 가겠지. 어차피 완씨 시문이 쓰는 주채 실내까지 자유롭게 드나드는 건 남운관서 데려온 두 사람뿐이라면서?”
“그렇습니다.”
“쯔쯔, 사람을 적게 쓰면서 가까이 쓰는 건 패가망신 일방으로 가는 길인데. 어찌 저리 높은 이가 나쁜 버릇을 들였누? 완씨 같은 명문가에서는 어릴 때부터 충분히 교육할 텐데.”
연화는 혼잣말을 하더니 눈을 빛냈다.
“그럼 당연히 그쪽을 노려야지. 둘 중 하나만 손에 넣어도 문령패가 다 뭐야, 완씨 시문의 혼백까지 빼가지고 올 수 있겠군.”
태청이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되겠습니까? 예의 그 호위야 말할 것도 없고, 반민 종자 쪽도 처소 관리하고 사람 다루는 것을 보면 만만한 자가 아닙니다. 정보를 캐내기도 쉽지 않고 회유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별걱정을 다. 일단 내 앞에 데리고만 오게. 사람이 말을 듣게 만드는 방법은 회유 말고도 많다네.”
연화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태청은 다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연화가 빈 손안에서 뭔가를 굴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 보자, 어쩌면 좋을까…. 그래. 자네 부대는 단구읍성 안에 드나들 수 있지? 아직 읍성 안에 주둔한 부대도 있고.”
“예. 서군영과 치안소 몇 군데의 병사는 남겨두고 나왔습니다. 시문도 양해한 내용입니다.”
“좋아. 자네 부하인 척 내 흑호대를 데려가서 쓰게. 읍성 안에 넣어주고 지리만 좀 알려주면 돼. 재주 있는 아이들이니 때만 잘 고르면 귀신처럼 들어갔다 나올 수 있네. 사람 하나 지고 나오는 건 일도 아니지.”
“…그 ‘재주 있는 아이들’을 또 키우고 계셨습니까.”
태청이 경멸조로 말했다. 연화가 씩 웃었다.
“어쨌든 자네도 그 덕을 볼 거 아닌가? 교문께는 비밀이라네.”
“만약에 들켜서 충돌이 커지거나 일이 잘못되면?”
“그러면 뭐…. 안됐지만 그 뭐냐. 흔한 과잉충성 사건이 되는 거지. 우리 애들이 좀 성질이 급해서.”
“여전히 부하들을 쓰레기처럼 쓰시는군요.”
“자네도 그 덕을 볼 거라니까 그러네.”
연화가 으스댔다.
“애들을 성에 넣어주기만 하고 그 뒤는 다 나한테 맡겨! 자네가 그동안 나한테 많이 당했지? 한 번쯤은 나하고 편 먹는 재미도 봐야지. 그러고 나면 또 아나? 자네도 날 좋아하게 될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흑호대는 해 있는 동안에 준비시키시죠. 유백을 그쪽 군영으로 보내겠습니다.”
태청은 차갑게 말하고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연화는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태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중얼댔다.
“원, 실속 없는 자식. 저러는 꼬락서니를 보면 젊은 게 부럽던 마음이 싹 사라진다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