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 * *
회담 둘째 날 아침, 시현은 주채 대청에 단과 호란, 소영과 편수를 불러 놓고 일정을 이야기 중이었다.
본래 회담은 아침 일찍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대운관 측에서 오전 중으로 연기를 청해 와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그 어사라는 작자, 어젯밤에 성질부리면서 술 퍼마셨다고 그러던데요. 꼴아서… 아니, 취해서 못 일어난 거 아닐까요?”
소영이 말하다가 말고 표현을 고쳤다.
호란이 물었다.
“있지, 넌 그런 얘기를 다 어디서 듣고 오는 거야?”
“듣고 오는 게 아니라, 다들 알던데? 이런 얘기는 토끼들이 빠삭해.”
“아아….”
소영은 인상과 태도에 다소 모난 데가 있는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편이었다. 지내보니 말수도 생각보다 많았다.
시현이 단을 보고 말했다.
“너는 오늘 회담장에 오지 말고 쉬거라. 어제는 김순이 준비가 덜 되어서 네가 도와줘야 했지만 이제 괜찮을 것이다. 이미 짚을 것은 다 짚기도 했고.”
“네. 그런 자리는 가능하면 더 안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양곡창 쪽에서 들어오는 숫자가 영 이상해서 한번 돌아봐야 할 것 같고….”
“단, 쉬라고 하지 않았느냐. 양곡창 쪽은 삼수가 무리의 상인들에게 이야기를 해놓았다 하였다. 그이들이 더 전문가다.”
시현은 단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빨리 덧붙였다.
“처소 쪽도 새로 구한 집사와 소영에게 맡기고. 정말로 쉬거라. 계속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단은 뚱한 얼굴이 되었다.
“잠으로 말하면 나리님도 하실 말씀 없지 않으십니까? 어제 회담도 예정보다 일찍 파했는데, 석찬 후 바로 별채에 가셔서 자정이 되도록 침소에 안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삼수와 해인과 함께 회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인도 상황을 알고 향후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네. 삼수 어른은 반 시진 좀 넘겨서 떠나셨고, 그 후로는 남은 두 분이서 온통 마법 이야기만 하셨다는 얘기 다 들었습니다.”
마법이란 말이 나오자 시현의 눈이 빛났다.
“아, 들어 보거라. 성진이, 아니 해인이 정말 대단하더구나. 내가 거석 내부의 마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이야기했더니, 바로 이해하고 몇 가지 생각을 말해주었는데….”
“아니요. 듣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는데 논문 쓰시면 안 됩니다.”
“내가 쓰지 않는다. 마침 해인이 지금 하릴없이 있지 않느냐….”
“공동 저자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나으리는 도의적으로 지금 하릴없이 있으면 안 되는 분 아닙니까?”
사실이라 시현은 할 말이 없어졌다.
“음. 그건 그렇고 너는 쉬거라. 얼굴이 안 좋다.”
“나리님, 그건 그렇고가 아니라요.”
짧은 옥신각신 후, 단은 오늘 오후까지 꼼짝 않고 쉬고 시현은 어떤 형태로든 논문을 쓰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협의가 이루어졌다.
시현은 회담 전에 삼수를 만나기 위해 처소를 나섰다. 호란과 편수도 호위로 따랐다.
대청에는 단과 소영만 덩그러니 남았다.
소영이 대청 위에 두 다리를 쭉 뻗으며 말했다.
“또래끼리 좀 놀게 놔두지 그래? 물론 우리 눈엔 전혀 노는 걸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두 나으리가 아주 신나서 어울리더라고. 그러고 있으니까 시문 나으리도 자기 나이로 보이고 좋던데.”
별채 동향을 단에게 시시콜콜하게 일러바친 장본인은 당연히 처소 전체 경비를 총괄하는 소영이었다.
단은 소중한 정보원에게 사근사근한 말투로 설명해주었다.
“어울리는 건 괜찮죠, 내버려두면 도를 넘어 정신을 팔아버리시니까 그렇습니다.”
“아, 시문 나으리도 그런 데가 있어? 의외네.”
소영은 웃더니 잠깐 뜸을 들였다.
“호란이 말이야.”
“네.”
“걔 왜 나한테 사과하러 안 오냐?”
“아… 그러게요. 본인도 신경 쓰는 것 같던데.”
“내 말이. 사과 안 할 거면 말 시킬 때 눈치 보지나 말든가. 아니면 아예 생까든가. 나까지 신경 쓰이게 만들고 있어.”
소영이 투덜거렸다. 단은 난처하게 하하 웃었다.
소영이 물었다.
“방랑족이 앞도 뒤도 없이 욕먹는 거, 우리한텐 맨날 있는 일인데 왜 지가 말해놓고 지가 심각해져? 뭐 방랑족하고 얽힌 사연 같은 거라도 있대?”
“그건 저한테 물어보셔도 모르죠.”
“왜 그런 것도 모르냐? 반년 넘게 붙어 다녔다면서.”
소영은 비난조로 말하더니 느닷없이 표적을 바꿨다.
“너는 왜 성이 없어?”
“그건 또 왜 물어보시고…. 옛날에 노비살이 해서 그렇습니다.”
“어 들어봤다. 왜 지 자식 팔아치우면서 노비 문서에 성씨 안 적는 부모가 있다며? 집안 망신이라고. 거기 한 맺힌 애들 가끔 있던데. 너도 그거야?”
단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 그런 민감한 얘기 막 물어보지 좀 마세요. 보면 떠돌이들이 맨날 그러더라. 얼마 있으면 금방 안 볼 사람인데 대체 왜 그런 게 궁금합니까?”
“언제 안 보게 될지 모르니까, 서로 살아온 얘기라도 해야 사람을 알지. 그럼 니네는 두고두고 볼 사인데 왜 서로 아무것도 안 물어보냐?”
“…….”
단은 작게 웃었다.
“호란 나리는 원래 그래요. 자기가 본 것만 가지고 판단하고, 그걸로도 충분한 거 같고.”
“듣기는 멋있다 야. 나한테는 안 그러던데.”
“하하.”
“애가 좀 단순하긴 하더라. 그런 애니까 너같이 의뭉스러운 놈이 안 밀어내고 붙어 지내나 싶기도 하고.”
소영이 튕기듯 가볍게 일어섰다.
“난 이제 둘러보러 간다. 넌 들어가서 자라.”
“지금 아침인데요.”
“밤에 안 잤으면 아침에라도 자야지. 자라. 주채 밖에 파수 볼 사람들 보낼 거니까 그건 걱정 말고.”
“알겠습니다. 별채 쪽도 신경 써 주세요. 담 밖에서 들여다보려는 사람 있었다는 것도….”
“그거 내가 말해준 거잖아. 알아서 할 거니까 조바심 좀 그만 쳐. 너 완전 병이야.”
소영은 훌쩍 대청을 내려가 중문 밖으로 사라졌다.
단은 기지개를 켜고 목을 뚝뚝 꺾으며 주채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말대로 많이 피곤하긴 했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무신경할 정도로 거리낌이라곤 없는 소영과의 대화가 오히려 기분전환이 되었다.
간만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베개에 머리를 댔을 때 단에게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 * *
오전 늦게부터 재개된 회담은 오늘도 일방적인 구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현이 짜증을 보이며 남의를 질타했다.
“그대는 대체 뭐가 문제야? 다천관에 사람을 보내 압류 취소를 부탁하고 그 후에 소모한 군량을 갚아준다 해도 싫다, 그대가 주장하는 대운관군의 공헌이란 걸 인정하고 마력석을 판 수익 배분을 논의하자고 해도 싫다. 여기는 그냥 어깃장을 놓으러 온 건가?”
“결국 마력석을 다천관으로 빼돌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말씀드렸듯이 대운관에도 운영권이 있고….”
“제값을 받고 파는 게 어째서 빼돌리는 일이 되는가. 대운관이 마력석을 원한다면 가격을 제시하여 경쟁하고 운영에 들인 노력은 그만한 수익을 나눔으로써 보상받으면 되네. 아니면 그대가 말한 운영권이라는 게, 생산한 마력석을 마음대로 가져갈 권리인가?”
“그런 말이 아니라….”
시현은 남의의 말을 뚝 자르고 다시 다그쳤다.
“그건가? 대운관이 벽명관 땅에 들어온 목적이? 벽명관 땅에서 벽명관 백성들이 캐낸 마력석을 무한정 가져가기 위함인가?”
사실 그렇다는 걸 양측이 다 알았다. 하지만 남의는 부정하는 것 외에 길이 없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운관은 벽명관을 보호하는 대가로 적정량의 마력석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벽명관의 총치총령 정씨 해인께서 조인한 협약에 따른 것입니다!”
결국 이야기가 여기로 되돌아왔다.
안 그래도 시현과 삼수는 해성을 회담에 참여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협약을 해지하려면 어느 시점에서건 해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가 등장하면 대운관 측에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뒤엎고 무작정 해성에게 책임지라고 나올 위험도 있었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대운관이 어째서 서로읍성에서 사라진 해성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해성의 탈출에 삼수가 관여한 것을 그들도 파악했을 것이다. 논리를 만들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비난의 빌미로 삼을 수 있을 텐데 아무 말이 없었다.
시현은 찜찜한 기분을 감춘 채 논점을 다시 되돌렸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하고 있지 않은가. 대운관과 벽명관이 서로 제공하는 가치가 상응하는지 검토하기 위해서라도, 시세를 반영해 마력석의 가격을 다시 매길 필요가 있다고….”
그때 바깥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시문 나으리, 시문 나으리께 말을….”
“어딜 다짜고짜! 회담 중이다!”
“들여보내, 우리 사람이야!”
난입자의 역성을 든 목소리는 편수였다.
직후 몫꾼 하나가 막사로 뛰어 들어왔다. 소릿골에서 같이 온 여자로, 처소에 남은 호위 중 하나였다.
여자가 황급하게 고했다.
“나으리! 처소에… 처소에 습격이!”
“뭐라고!”
시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란도 소름이 쭈뼛 돋았다.
“습격이라니, 누가 말이냐!”
“모릅니다. 처음 보는 놈 열 몇이 뛰어 들어왔는데, 다들 보통 놈들이 아니었습니다. 소영이가 나으리를 모셔오라 해서….”
“바로 가겠다.”
시현은 삼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의법사들을 내 처소로 보내주시오. 최대한 빨리!”
그 말만을 남기고 시현은 호란과 함께 막사를 뛰쳐나갔다. 막사 바깥에 도열해 있던 호위들도 우르르 뒤를 따랐다.
회의탁의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처소 근처에는 소영이 불러모을 수 있는 하늘인들이 얼마든지 더 있었다. 그런데도 소영이 적을 보자마자 시현부터 찾았다는 건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었다.
일행은 거의 나는 듯한 속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처소인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후원은 쑥대밭이었다. 담벼락은 크게 뚫리고 별채도 한쪽 벽이 무너졌다.
땅에는 처소 경비를 위해 남겨놓은 하늘인들이 스물 가까이 쓰러져 있었다. 일꾼들이 허둥지둥 상처를 돌보고 있었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듯한 사람도 여럿 보였다.
호란은 사색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로 달려갔다.
“단! 괜찮아?”
정신을 잃은 소영 곁에 무릎을 꿇고 있던 단이 일어서며 이쪽을 보았다. 얼굴이 새파랬다.
단이 말했다.
“놈들이… 해인 나으리를 데려갔습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 * *
연화는 잔에서 피어나는 다향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는 대운관군 군영의 개인 막사로 돌아와 있었다.
남의는 영문을 모른 채 회담장에서 시문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연화는 오늘 안에 회담이 재개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구나 찾아올 사람도 있었다.
오래지 않아 살기등등해진 태청이 연화의 막사로 들이닥쳤다.
인사도 전갈도 없이 파수를 밀어젖히고 들어온 그가 핏대를 올렸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정씨 해인이 납치를 당했다니. 그 사람이 지금 여기서 왜 나옵니까?”
“목소리가 커, 장군.”
연화는 흡족한 낯으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더군다나 극상을 입에 올릴 때는 말을 조심해서 해야지. 역심이 있다 오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태청은 이를 우득 소리나게 갈았다. 소속 관성과 가진 지위를 막론하고, 극상격에게 위해를 가한 일에 연루되어 살아남을 하늘인은 없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다그쳤다.
“정씨 해인이 서로읍성에서 사라진 지 닷새는 되었다는데, 왜 제게는 아무 언질을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정삼수 무리에 섞여 단구에 온 걸 장군은 아셨을 텐데요!”
“아이고, 섭섭하셨나? 보안을 지킨 것뿐이네. 민감한 문제지 않나. 중요한 회담 중인데, 우리 측이 벽명관 총치총령에게 제대로 된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하!”
태청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연화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문령패를 찾는다, 시문의 종자를 빼내온다 하는 소린 전부 헛소리였군? 당신이 놓친 정씨 해인을 되찾기 위해서 날 이용한 거야!”
“에이, 설마 그랬겠나. 문령패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네도 알잖아? 내 부하들은 그 뭐야, 토끼를 잡으러 갔는데 멧돼지가 있길래 급히 예정을 바꾼 것뿐이야. 자네라도 그러지 않겠나?”
“능청 떨지 마. 최소한 어제 나와 이야기했을 때, 당신은 시문이 새로 사람과 물건을 갖춘 게 해인을 위해서란 걸 눈치채고 있었어.”
“그랬을 수도 있고.”
연화가 빙그레 웃었다.
“헌데 장군 입장에선 몰랐던 쪽이 낫지 않겠어? 장군은 보기보다 새가슴이잖아. 종자 하나 데려오는 것도 잘못될까 봐 벌벌 떠는 사람인데, 총치총령님을 모셔온다 했으면 겁 나서 간밤에 잠도 못 잤지.”
“미친 노친네가….”
태청이 으르렁거렸지만 연화는 태연하게 히죽거릴 뿐이었다.
“자꾸 잊으시네. 상장군이라고 해야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