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98
198화
* * *
시현은 주문 읊기를 멈추고 눈을 떴다. 하지만 한 손은 여전히 암벽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단이 암벽 너머에서 솟는 물줄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위치는 옛 측량소 터 근방이네요. 호란 호위가 맡은 쪽이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호란은 단이 집어낸 후보지 중에 시현이 있는 채굴장과 가장 가까운 곳을 골랐다.
수색에도 참여하고 싶고 시현의 곁에서 떨어지기도 싫은 마음이 반영된 애매한 선택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정답이 되었다.
원래는 해성을 발견한 수색조가 신호탄을 쏘아 다른 조를 불러 모을 예정이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십 리 밖에서도 보일 만큼 높게 솟은 물줄기는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대신 둥글게 꺾이며 다시 지면을 향했다. 물이 보이지 않는 관을 따라 흐르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본 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해인이 스스로 상황을 정리한 모양이다. 하는 것을 보니 여유가 있나 보군.”
곧 물줄기 근방에서 두 개의 신호탄이 올랐다.
녹색 연기는 정씨 해인을 구했다는 뜻, 청색 연기는 당장 위험이 없다는 뜻이었다.
뒤이어 물줄기가 천천히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시현의 뒤에 모여 선 남의와 대운관 법군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산에 가득한 기운에 기가 질려 있었다.
시현은 한 손을 산 쪽에 둔 채 대운관군을 향해 몸을 반쯤 돌렸다. 걱정을 던 덕에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그가 활짝 웃으며 남의에게 말했다
“정씨 해인을 무사히 구해냈다는 신호가 올랐소! 그대들의 협조에 감사하오.”
“예! 예, 다행입니다. 기쁩니다.”
남의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다른 법군들도 고개를 숙이며 하례인지 치사인지 모를 말을 했다.
시현이 물었다.
“이리 빠르게 해결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기운을 조금 덜 풀어낼 것을 그랬소. 남은 기운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어, 어찌하다니요….”
남의는 떨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저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시현이 설명했다.
“이대로 수맥을 타고 주위로 퍼져나가게 할 수도 있고, 특정한 장소로 기운을 몰아 대지에 스며들게 할 수가 있소. 어느 쪽이나 지력이 늘어나고 물이 모여 초목이 자라거나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오.
아니면 또 한 가지, 수맥으로부터 기운을 완전히 떼어내 땅 밖으로 끌어낼 수도 있소. 그렇게 가져온 기운은 원하는 무엇에든지 쓸 수 있소.”
시현은 미소를 지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시현이 저 기운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변고 이전, 세상에 법력이 넘쳐나던 시절에도 그들은 한 사람이 한 번에 이렇게 큰 기운을 다루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앞에 선 이가 마음을 먹으면 남의가 끌고 온 대군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법군 중 몇몇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남의도 내심을 말하면 무릎이 풀릴 것 같았다.
남의는 변고와 함께 세상의 힘의 판도가 뒤바뀌었다고 믿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오직 군사력과 가진 마력석의 양이고, 격이니 권위니 법도니 하는 것은 그저 허식으로 전락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운관에서 권리를 위임받고 수많은 군사를 거느린 자신이 시문이니 해인이니 극상의 권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도 슬슬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남의는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들이 법술사의 격이라 부르며 복종해온 것은 순수한 힘 그 자체였다. 예법을 지키고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그 힘과 직접 맞닥뜨리지 않기 위한 완충장치일 뿐이었다.
“어느 쪽이 좋겠는가? 의견을 내어 보시오. 내가 쥔 이 기운에는 대운관의 지분도 있다는 것이 그대의 주장이 아닌가.”
시현이 다시 물었다. 남의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닙니다. 뜻대로… 문의 뜻대로 하십시오.”
“알겠소.”
시현이 산 쪽을 향했다. 그는 이제껏 기운을 쥘 것처럼 뻗고 있던 손을 가볍게 털며 말했다.
“순리대로.”
느닷없는 바람이 훅 끼치며 시현의 옷소매가 펄럭였다.
산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기운의 압력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대신 법군들은 일순이나마 주위에 법력이 되돌아온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흐르는 기운의 법칙대로, 산줄기가 품었던 거대한 기운이 땅과 물과 바람을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시현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가 남의를 보고 조금 허탈한 듯이 말했다.
“세상에 법력을 되돌리는 일도 이렇게 쉬우면 좋을 텐데. 아니 그런가.”
남의는 자신이 이미 시현의 안중에서 없어진 것을 알았지만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그는 어물어물 동조하는 말을 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곧 채굴장을 빙 도는 길로 얼마간의 하늘인 무리가 나타났다.
선두에는 호란이 있었고, 그 뒤를 따르는 장신의 남자가 해성을 안아들고 있었다.
해성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었지만 건강해 보였다. 땅에 내린 그가 곧바로 시현에게 달려왔다.
“녹주야!”
해성은 큰 소리로 부르며 시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시현은 조금 곤혹스러워했다.
“해인, 사람들 앞이오….”
해성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반쯤 울먹거리며 말했다.
“진짜 무서웠어…. 죽는 줄 알았어.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깊은 구덩이 안인데, 어딘지도 모르겠고. 위에서는 험상궂은 사람들이 말도 거의 안 하고….”
시현은 쓴웃음을 짓고 해성의 손을 마주 쥐어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걱정했다.”
“아, 네 덕분에 살았어. 네가 법력을 보내준 거지? 진짜 굉장했어! 어떻게 한 거야? 보내준 기운의 질이 삼서산 남단 마력석하고 꼭 같던데, 혹시 마력석 광맥이랑 수맥을 이은 거야?”
“그건….”
시현은 입을 열려다 여기에 대답하면 대화가 끝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해성을 달래 놓고 호란에게 물었다.
“적도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은신처에는 여덟 명밖에 없었어요. 여섯은 기절시켰고 둘은 죽었어요.”
“잘했다. 적도는 모두 강자들이라던데 잘 제압했구나.”
“아뇨. 저희가 갔을 땐 이미 여덟 명 다 거의 몸을 못 가눴어요. 해인 님이 그… 물로 어떻게 저떻게 하셔서.”
호란은 금방 설명을 포기하고 해성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길을 보냈다.
해성이 새로운 사실을 발표하는 것처럼 엄정하게 말했다.
“물속에서는 숨을 못 쉰단다. 강한 소용돌이에 휩쓸리면 방향을 구분 못 해서 힘이 있어도 빠져나오기 어렵고.”
“그렇게 많은 물은 처음 봤어요….”
호란이 탄복한 목소리를 냈다. 시현은 살짝 웃고 남의에게 말했다.
“군중에 의법사가 있으면 해인의 상태를 살펴주라 해주겠소? 사람을 일부만 남겨 나머지 적도를 수색하도록 하고, 우리는 하산하기로 하지.”
“예.”
남의는 시현이 뭐라 해도 머리만 꾸벅거릴 태세였다. 보다 못한 연화가 나섰다.
“붙잡은 적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가 압송하겠습니다.”
“이미 단구 관아로 호송했어요.”
호란이 나서서 말했다. 연화가 마뜩찮게 눈빛을 번뜩였다.
“일부러 다른 길로 내려보냈다는 겝니까?”
“총치총령님을 모시면서 납치범들을 같이 끌고올 수는 없잖아요.”
“그도 그렇군요.”
연화는 일단 물러났다.
대운관군이 총치총령의 호위를 맡아왔다는 명분으로 수사권을 가져오고 싶었으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시문이나 해인을 상대로 무슨 주장을 하려면 일단 남의부터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가능할까? 남의는 완전히 기가 짓눌려 있었다.
연화의 기감은 여느 하늘인들과 마찬가지로 눈앞에서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의 기세나 겨우 읽는 정도였다. 하지만 남의와 법군들의 반응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짐작이 갔다.
시문이, 그리고 아마 해인도, 다가설 수조차 없는 힘의 우위를 드러내 모두를 압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화의 경험상, 법술에 조예가 깊은 땅인일수록 상대와의 실력 차에 쉽게 휘둘렸다. ‘평생 가도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대한 그들의 경외감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다.
남의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시문 앞에서 고개를 못 들 것이다.
연화는 언제나 땅인들의 그런 점이 잘 이해가 안 가고 답답했다.
시문이 아무리 두렵다 해도 교문보다 더 두려운가?
중요한 것은 상대가 얼마나 강하냐가 아니라 상대가 내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닌가?
그 점에서 연화는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을 절대 착각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연화가 줄을 잘 서서 출세한 것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것은 절반밖에 사실이 아니었다.
연화는 적으로 삼지 말아야 할 것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정치판에서 계속 살아남았다. 줄을 잡고 세력을 얻은 것은 살아남는 과정에서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대운관 태상사 위씨 가문, 그중에서도 위교연은 연화의 평생에 가장 눈 밖에 나면 안 될 대상이었다.
그것은 교연이 인일 때에도 문일 때에도, 아니 격도 없는 신진 율사이던 시절부터도 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화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문이 광맥의 마력을 통째로 가져다 쓸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만큼 삼서산 산자락이란 장소에서 군사력은 아무 우위가 되지 않았다.
붙잡힌 흑호대는 심문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으니 자백은 하지 않겠지만, 조사가 진행되면 아무래도 이쪽에 불리한 정황이 나올 것이다.
여기서 더 상황이 나빠지면 남의가 담판을 포기하고 전격적인 철군을 결정할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당장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고서 대운관에 돌아가면… 연화는 그 뒤의 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남의는 타고 온 가마를 시현과 해성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시현은 사양하고 말에 올랐다. 남의도 할 수 없이 가마를 비우고 뒤를 따랐다.
가마와 행렬 앞에서 어사의 깃발이 내려졌다. 무리는 하산을 시작했다.
해성은 무서웠다고 엄살을 한 것치고는 마냥 씩씩했다. 그는 시현의 옆을 나란히 가면서 격의 없이 키득거렸다.
“너 완전 흔들흔들해. 나보다 말 못 타는 사람 처음 봐.”
“해인. 사람들 앞이오.”
“흠흠. 사실 시문께서도 속으로는 말을 무서워하시는 것 아니오?”
“해인. 말씨만 바꾼다고 다가 아니라….”
산을 다 내려가 읍성을 앞에 둔 일행은 성 앞 황야에서 못 보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읍성 앞에 막사를 쳤던 벽명의 방랑족 무리가 크게 자리를 비우고 물러나 있고, 한가운데 거창하게 치창한 수레가 서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호위대와 태청 휘하의 대운관군이 수레 양옆을 옹위했다. 높이 달린 기는 수레 앞에 세워진 것이었다.
“문령기…?”
깃발에 쓰인 글자를 읽고 해성이 중얼거렸다.
때마침 수레 쪽에서 전령이 달려왔다. 그는 시현에게 급하게 예를 올리고 남의에게 말했다.
“어사 나리, 대운관에서 문령이 내려왔습니다. 어서 가서셔 문령을 받드십시오.”
“문령이?”
남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전령이 말하는 문령이란 물론 교문의 영일 터였다.
남의가 시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신이… 아니 제가 먼저 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리하라.”
시현이 허락하자 남의는 말을 재촉해 꽁지가 빠지게 달려갔다.
“교문이신가….”
해인이 중얼거리더니 뚱한 얼굴이 되었다. 그 역시 내심으론 교연을 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행이 수레 앞에 다다랐을 때, 남의는 교문이 보낸 전령 앞에 자리를 깔고 꿇어 엎드려 봉서를 받고 있었다.
절차는 물론 전령의 관모와 의복까지 왕이 있던 시절 어명을 전하는 것과 같은 격식을 따르고 있었다.
해성이 시현에게 속닥거렸다.
“어사란 호칭도, 사실 옛날에 왕이 보내는 관리를 말하는 거잖아? 그이는 왕이 되고 싶은 건지 문이 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시현의 심정을 말하면 둘 다 하지 말아주었으면 했다. 물론 교연은 둘 모두를 하고 있었다.
전령과 남의가 하는 수작을 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창희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현은 말에서 내렸다.
창희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대운관이 얼토당토않은 수작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령이란 작자가 어사를 앞에 놓고 큰 소리로 명을 읊는데, 변란에 맞서 완씨 시문과 함께 앞일을 의논하고 싶으니 벽명관에 있는 전군은 시문을 호위하여 대운관에 모셔오라지 뭡니까!”
“나를?”
시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예. 벽명관에서 무작정 철수할 수 없으니 명분을 삼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만… 시문께서 도를 넘어 휘말리게 되는 일이 아닙니까! 더구나 이렇게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건, 대놓고 벽명관과 문의 사이에 불씨를 던지는 짓이지요!”
창희가 분개하고 있을 때, 남의는 공개적인 명을 다 들은 뒤 그에게만 따로 전해진 봉서를 열고 있었다.
실수로라도 엿보는 비례를 범하지 않도록 주위 모두가 얼굴을 가리고 물러났다.
남의는 떨리는 손으로 봉인을 떼고 봉서를 펼쳐들었다. 곧바로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시현이 보인 위력에 압도되었던 감정이 사라지고 그가 발 딛고 선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백지 위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대는 어느 문의 명에 복종하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