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 * *
무슨 일이든 단이 안 된다고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결론만 말하면 대운궁 심처를 남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맞았다.
그래서 일행은 그냥 대놓고 나가기로 했다.
오후도 반이 지날 무렵 시현은 호란과 단을 거느리고 처소를 나왔다.
세 사람이 처소의 일각문을 넘기가 무섭게 처소의 시종관, 관리관, 내궁과 외궁의 경비 책임을 맡은 법군, 궁내서 관리들이 차례로 달려왔다.
어디를 가시느냐, 가마를 대령하겠다, 수행할 호위를 대령하겠다고 따라붙는 사람들을 시현은 전부 물리쳤다.
“내가 답답하여 바람을 쐰다 하지 않았느냐.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 것이니 요란하게 가마니 호위니는 필요가 없다.”
“궁 밖은 어지럽고 위험합니다. 오늘은 바람도 찹니다. 정 출궁하시려면 호위와 시중들 수행을 더 거느리셔야 합니다.”
“지금 나를 수행하는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느냐? 이 둘이 친위로 모자란 데라도 있다는 말이냐?”
“그,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경비군 부장이 당혹해서 땀을 흘렸다. 시현이 짐짓 기분 상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남운관서부터 여기까지 이 둘만 데리고 안 다닌 데가 없다. 전장 한가운데서든 저잣거리에서든 감히 내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자도 없다. 쓸데없는 염려는 말아라.”
“하오나 위를 잘 모시는 것이 저희의 임무입니다. 시문께서 이대로 출궁하시면 저희가 교문께 크게 경을 칠 것입니다.”
“너희 역할은 궁 안에서 나를 제대로 시중하는 것이겠지. 궁 바깥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 일을 잘할 궁리나 하도록 해라.”
시현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교문은 오늘 안에 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게는 달리 일정도 없고 검토할 보고도 없는 것을 너희가 다 알지 않느냐. 할 일이 없어 바깥나들이라도 하겠다는데 이리 붙드는 이유가 무엇이냐? 설마 내가 어디를 오가는 데 너희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느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천부당한 말씀입니다!”
따라오던 땅인들이 허둥지둥 머리를 숙였다.
교연의 명에 따라 시현에게 바깥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차단해온 것이 그들이라 시현이 이렇게 나오면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이 앞으로는 우르르 따라오지 말거라. 호젓하게 다니겠다는데 쓸데없이 시선을 끌 일을 만드느냐.”
시현은 쌀쌀맞게 말하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이미 대운궁의 정문이 가까웠다.
무리 맨 앞의 궁내서 고관은 차마 시현에게 더 토를 달지는 못 하고 단을 붙들고 물었다.
“위께서 멀리 가실 것 같은가? 어디를 가실 것 같은가?”
“그것은 위의 마음에 달린 일이라 제가 잘…. 가끔 답답하면 이런저런 속마음을 말씀하시면서 오래도록 걸으십니다. 생각이 풀리면 일찍 돌아오시기도 하고요.”
단은 자신 없다는 듯이 말했다.
관리관은 앞서가는 시현의 차림새를 다시 곁눈질했다.
시현은 누비 창의에 도톰한 반수답호를 걸쳤을 뿐 털옷이나 방한구를 갖추지는 않았다.
따르는 호란과 단도 단출한 차림이었다. 소지품도 단이 작은 가죽 걸낭을 하나 멘 것이 다였다. 무게가 있어 보이는 것이 금폐라도 넉넉히 든 모양이었지만 부피는 크지 않았다.
찬 날씨에 밖을 오래 다닐 모양새는 아니라고 판단한 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잘 모시고 다녀오거라. 나들이가 길어지거나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아무 치안소에서 사람을 시켜 궁에 전갈하거라.”
“예.”
단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시현을 따라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내궁 관리관이 혀를 찼다.
“어쩌지요? 교문께는 이미 전갈을 드렸습니다만….”
“그러게 말이오. 공연히 우리가 질책을 받겠군. 젊으셔서 잠행하는 취미라도 있으신가. 극상이 저리 처신이 가벼우셔서야….”
“그래도 호락호락하신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부러 바깥 사정을 안 들여보내는 걸 아시고 직접 소문 수집이라도 하시려나 봅니다.”
“그런 거겠지. 저만한 행동력이 없으면 남운관서 예까지 단신으로 오셨겠는가.”
“그렇지요….”
관리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화관에 보내 둔 전갈꾼은 아직 답을 가져올 기미가 없었다.
대운관의 사족이라면 대체로 하늘인을 꺼리고 멀리했으나, 대운궁의 실질적 주인인 교연은 그 정도가 심했다. 하늘인이 내궁 안을 빠르게 뛰어다니는 것도 싫어하고 태화관을 드나드는 것은 더 싫어했다.
결국 반민 잡관들에게 넓은 궁 안을 종종걸음하게 시키다 보니 전갈을 주고받는 데는 항상 시간이 걸렸다.
명만 기다리지 말고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관리관의 눈길 끝에 외궁 경비대의 하늘인 머리 하나가 걸렸다.
그는 시현이 단신이나 다름없는 일행으로 출궁하는 것을 보면서도 법도 때문에 다가가지도 만류하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관리관은 그를 손짓해 부르고는 명했다.
“너희 중에 눈치 좋고 날랜 놈 하나를 뽑아서 위를 따라다니게 해라. 은밀히 호위하되, 위께서 싫어하시니 멀찍이서 따르고 들키지 않도록 해라.”
“예.”
시문이 소문을 조사하려 한다면 대로로 다닐 것이다. 거리엔 하늘인이 우글우글하니 아무리 기감이 예민한 이라도 특정한 사람이 따라오는 걸 알기는 어려울 터였다.
문제는 미행하는 놈이 요령이 있는가였다. 관리관이 힘주어 말했다.
“요령 좋고 입이 무거운 놈을 골라서 보내야 한다. 공연히 들키면 시문과 교문 양쪽에게 책을 들을 것이다.”
“은밀을 요하는 일입니까? 그러면 제가 경비대 옷을 벗고 직접 가겠습니다.”
“당연히 은밀해야지! 그래. 네가 뭘 좀 아는구나. 궁 경비대 머리라면 미행을 들켜도 걱정돼서 호위로 따라왔다 할 말이 있겠지.”
관리관은 만족한 어조로 말하다가 목소리를 바꿨다.
“흠, 말은 미행이지만 어디까지나 호위다. 감시 같은 게 아님을 유념하거라.”
“물론입니다.”
유백은 공손하게 절하고 물러났다.
* * *
세 사람은 궁을 나선 직후에는 대로 인파에 섞였으나 그것은 잠시였다. 단은 금세 후미진 골목으로 길을 잡았다.
낮 시간에는 사람이 뜸한 술집 거리였다.
미행을 잡아내려고 택한 길이었는데, 미행하던 이는 자기 쪽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오는 것이 유백임을 눈치챈 단은 시야가 가려지는 좁은 뒷골목으로 들어가서 기다렸다.
곧 유백이 따라 들어왔다. 그가 골목 안쪽에 선 시현에게 허리를 굽혔다.
“남방군 백사대 1조장 유백이 위를 뵙습니다.”
“신원을 대지 마라. 예를 따질 때가 아니다.”
시현이 빠르게 말했다.
“돌 인간에 맞서러 출정한 대운관군의 진군 경로를 단에게 아는 대로 전해라. 지금쯤이면 어디까지 갔겠느냐?”
유백의 눈이 커졌다.
“설마, 시문께서 친히 거동하십니까?”
“그렇다. 네가 오전에 호란에게 준 통행패가 있으면 신원을 밝히지 않고 성문을 출입할 수 있을 거라던데. 사실이냐?”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위께서는 눈에 띄는 일행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런가.”
시현은 약간 실망한 듯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다천관에서 단이 시현의 옷을 주문할 때, 언제나 고객의 숨은 요구를 귀신같이 알아보는 방씨 온의는 가격은 전혀 소박하지 않아도 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꽤 소박해 보이는 복장을 몇 벌 섞어 맞추도록 해주었다. 시현은 뭘 모르는 사람에 속해서 나름 만족하고 있던 차였다.
옷차림이 문제가 아니라, 이 시국에 선비 차림을 한 땅인이 관성을 나가는 게 시선을 끄는 일이란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유백이 말했다.
“한 각 후에 남3 치안소로 오십시오. 군용 수레와 여장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리하면 나중에 남방군에 책임이 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전장까지 가시려면 행장이 필요하십니다. 또한 시문께서 출궁하신 것이 알려지면 어찌 되거나 저와 남방군에 문책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문께서 빠르고 무탈하게 전장에 도착하시게 하는 것이 남방군을 위한 일입니다.”
유백은 결연한 태도였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지. 너는 미행 중에 내게 들켰고 내 명으로 모든 걸 준비했으며 내가 성을 나가기 전까지 내 명으로 함구를 당하여 보고가 늦었다 하라. 문령을 방패 삼으면 조금은 질책이 줄어들 것이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유백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서 단에게 돌아섰다.
“남3 치안소의 위치는….”
“남3이면 마시장 앞이지요? 가는 길은 압니다. 대신 행장을 준비하실 때 작은 자루 여러 장과 위께서 메실 만한 입구 넓은 대련 하나를 준비해주십시오.”
“자루와 대련? 내용물은?”
“빈 것이면 됩니다.”
“알았다.”
유백은 군인답게 실행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묻지 않았다. 그는 시현에게 약식으로 예를 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한 각 후 일행이 남3 치안소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날렵한 외바퀴수레에 물과 식량, 기본 행장은 물론 방한용품과 모피까지 들여놓았다.
원래 단은 수레도 행장도 전부 장물 시장에서 웃돈을 마구 얹어 사버릴 생각이었다. 돈보다 시간을 절약한 것이 좋았다.
유백은 아무도 없는 군 수렛간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이 들어오자 유백은 호란에게 군용 통행패를 건넨 뒤, 시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위께 청하겠습니다. 제게 문령으로 동행을 명해주소서.”
시현이 말했다.
“그리하면 네 처지가 더 어려워질 텐데.”
“각오하였습니다.”
“하나가 더 있다. 이제까지 네가 보고를 미루고 비밀을 지킨 것은 모두 네가 속한 남방군을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와 함께 가면 오직 나를 위해 함구해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교문은 물론 경우에 따라 남방장군에게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감수하겠느냐?”
유백의 눈에 잠시 갈등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오래 끌지 않고 대답했다.
“장군과 남방군을 구해주신다면, 이후로는 제 목숨의 절반을 시문께 바치겠습니다.”
“알겠다.”
그 뒤는 빨랐다. 성문을 통과한 뒤, 저를 알아볼 사람이 없어지자 유백은 바로 수레를 나와 호란과 함께 수레채를 잡았다.
하늘인 두 사람이 끄는 수레는 대관성에서 뻗는 잘 닦인 길을 타고 나는 듯이 달렸다. 유백이 방향을 알았기에 길을 묻느라 멈출 필요도 없었다.
대운관군은 일행보다 몇 시진 먼저 출발해서 빠르게 진군 중이었으나, 법군을 포함한 대군이라 속도에 한계가 있었다.
멀리 군의 꼬리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는 아직도 해가 남아 있었다.
시현이 수레를 멈추게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한참을 집중하여 기운을 읽은 뒤 눈을 떴다.
“남쪽과 남서쪽에서 거석 떼가 몰려오고 있다. 수도 기세도 엄청나구나. 이대로면 한 시진 안에 대운관군과 부딪힐 것이다.”
“전령의 말로는 장군석이 둘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유백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걱정한 대로 대운관군은 허허벌판 한가운데 진을 치고 두 방향에서 오는 거석 떼와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서 대비하라고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하시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다. 저쪽에도 법군이 있으니 늦기 전에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 끝까지 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무리겠지.”
단이 가져온 자루 몇 장을 펼쳐서 유백과 호란에게 건넸다.
“싸우기 전에 준비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돌을 주워서 이 자루를 채워주세요. 모양은 너무 울퉁불퉁하지 않고 고른 것이 좋고, 크기는 좀 다양한 쪽이 좋습니다. 손바닥만 한 것에서 주먹보다 큰 것까지.”
“돌을… 말인가?”
유백은 영문을 모르고 눈만 껌벅였다. 시현이 말했다.
“그게 네가 지켜야 할 첫 번째 비밀이다. 자루에 돌을 채우고 입구를 잘 여민 다음, 안에 든 것이 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려라. 그것은 내가 쓸 마력석 자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