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 * *
궁으로 돌아온 시현은 바로 태화관을 향했다.
교연은 얼굴을 보였던 5층 창 앞에 그대로 있었다. 창 앞에 햇빛을 등지고 선 교연이 시현을 보고 빙긋 웃었다.
“어찌 그리 급작스레 행렬을 빠져나오셨는가? 개선식은 아직 한창일 텐데. 주위가 당황했겠어.”
시현은 천천히 교연에게 다가갔다.
넓은 창은 전망을 위해 턱을 낮춰 아래쪽의 처형장이 훤히 보였다. 창 너머로 차가운 바깥 공기와 함께 아직 끝나지 않은 행사의 풍물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시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왜 나를 대운관에 불렀는가?”
“왜라니? 새삼스럽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란 걸 확인한 줄 알았는데. 함께 돌 인간의 근거지를 찾고, 함께 싸우기로 했지 않아.”
교연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그대가 나를 위해 준비해준 이유이지. 그대에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내게? 무슨 이유?”
“그것을 내가 지금 묻고 있는 게 아닌가. 그대는 나와 손잡고 돌 인간과 싸우는 것보다, 나를 견제하는 데 더 진심인 것 같은데. 그럴 양이면 애초에 왜 나를 대운관에 불렀는가?”
교연은 난처한 듯이 웃었다.
“내가 아무 저의 없이 깨끗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같이 돌 인간과 싸우자는 것은 진심인데. 어째서 그대의 기분이 그리 상했을까? 혹시 시중들던 이들을 상의 없이 참하여서 그러는가?”
교연은 창밖의 머리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오해하지 말게. 저들은 정말로 죄가 있어. 궐 안팎에 역적도당을 짜고 그대를 염탐한 것도 사실, 물건을 훔치려 한 것도 사실이네. 내가 그런 자들을 내버려두어야겠는가?”
“역적도당이라니. 소세 물 뜨고 바느질하는 아이들까지 말인가?”
“썩은 데를 도려낼 때는 닿은 부위를 다 도려야지.”
교연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표독스러워졌다.
“저자들은 내 뜻을 제멋대로 넘겨짚고, 위가 바라는 일을 앞질러 한다며 임의로 도당을 짓고 시키지 않은 일을 벌였네. 나는 그런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아.”
교연은 시현에게 다가붙으며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만 알아두게. 정씨 해인의 납치를 주도한 자가 저들의 우두머리네. 죄목이 부족하지는 않지?”
걸린 머리 중에서 연화를 발견했을 때, 시현도 이 처형이 벽명관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했다. 하지만 정말로 벽명관 일이 문제였다면 연화의 처벌은 더 일찍 이뤄졌을 것이다.
무슨 이유를 대거나 교연이 하는 모든 일은 시현을 의식한 것이었다.
시현이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가 없는 죄를 만들었다고 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내가 성을 나가 돌 인간과 싸우지 않았다면 저들은 아직 살아있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군.”
“어휴. 그대도 정말 깐깐하다니까.”
교연은 장난스럽게 픽 웃더니 말했다.
“정 깊은 이야기를 해야겠다면… 조금 걸을까? 호위는 떼어 두고.”
교연이 걷자는 것은 태화관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라 광장 쪽 누각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로 가자는 뜻이었다.
시현이 청에 응하자 교연은 시종을 시켜 자신과 시현이 덧입을 모피 갖옷을 가져오게 했다. 두 사람은 호란과 교연의 호위들을 구름다리 입구에 남겨두고 외부 회랑으로 나갔다.
좌우가 트인 구름다리에 오르자 칼 같은 찬바람이 두 사람의 장포 자락을 흔들었다.
회랑 양옆에는 장대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대운궁의 아름다운 안뜰, 궐 담 밖의 광장과 거리, 방금 나온 화려한 태화관이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하유관의 금탑에라도 오르지 않는 한 이만큼 다채로운 광경을 볼 수 있는 장소는 세상에 없을 터였다.
교연이 잡담 같은 말로 말문을 열었다.
“이 태화관의 유래를 알지? 중시조들이 머물렀던.”
“그것을 머물렀다고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군.”
시현은 딱딱하게 말을 받았다. 교연이 웃었다.
“그래. 그건 굉장히 얼버무린 말이지. 그리고 ‘중시조들’이라고 하는 것도 얼버무린 말이지…. 팔대관성의 여덟 중시조가 아니라, 대운관을 제외한 일곱 관성의 중시조가 이 건물에 인질로 갇혀서 젊은 날을 보냈지.”
지씨 왕가는 온 세상을 영토로 삼아 땅 위의 유일한 나라를 만들었지만 그 권력과 행정력은 온전하지 못했다. 수도와 떨어진 관성에서는 여전히 호족과 마법 명문가들이 세력을 떨쳤다.
왕은 각 관성에 명하여 지역 세도가의 후계자들을 대운관에 보내도록 했다. 인재를 교육하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인질이었다.
대운궁의 태화관은 그 인질들을 위무하는 동시에 왕가의 위세를 보이기 위한 건물이었다.
여섯 층 커다란 건물 안팎이 화려하게 꾸며지고 온갖 사치스러운 물건이 가득했지만, 인질들은 왕의 허락 없이는 태화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답답함을 달랠 수 있도록 전망 좋은 다층 누각과 구름다리가 있었으나 그마저도 의도적인 장치였다.
인질들이 누각에 나오면 궐 밖 광장에서 그 모습이 훤히 보였다. 대운관 백성들은 타관 명문자제들이 새장 같은 궁에 갇힌 모습을 보면서 지씨 왕가의 권세를 실감했다.
그러한 장소에 태화(太和), 큰 화합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지나간 시절의 지씨 왕가였다.
일곱 관성에서 끌려와 이곳에 갇혔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서로 우정을 쌓는 것을 넘어 손잡고 반역을 도모하기에 이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각 끝까지 걸어간 교연은 난간에 손을 올리고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간혹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 위씨 가문 중시조 위성수 인께서는 어째서 태화관을 태상사의 공관으로 삼았는지.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라지만 일종의 감옥이 아니었냐면서 말이야.”
“거기엔 나도 동의한다. 이 건물의 구조에서는 왕가의 악의가 느껴져.”
시현은 광장을 향해 날개를 펼친 듯 뻗은 두 개의 구름다리를 보며 불쾌한 듯 말했다. 그는 이 장소에 오를 때마다 구경거리가 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교연은 시현의 대답에 오히려 즐거운 듯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위성수 인의 입장을 생각해 보아. 여덟 중시조라고 한데 묶이고는 있지만, 위성수 인만은 태화관 인질 출신이 아니었지 않아.”
다른 관성의 중시조들은 모두 인질로 지내다가 제 관성에 돌아가 반란군의 주축이 되었다. 하지만 대운관의 중시조 위성수 인은 본디 말왕의 측신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다른 중시조들의 적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왕을 배신하고 지씨옥의 수장고를 걸어 잠갔다. 그것으로 반란의 판세는 완전히 결정이 났다.
지씨 왕가의 근거지였던 대운관이 반란군에게 초토화되는 것을 면하고 초대조약의 한 주체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위성수 인의 공로 덕이었다.
다만 그 내력 탓에 위성수 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다소 엇갈리는 편이었다. 그것은 당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교연은 살짝 자조하는 투로 말했다.
“대운궁이 반파되고, 왕이 끌어내려지고. 여기 태화관은 새 시대의 상징이 되었지. 대운관 백성들은 태화관을 올려다보면서 이곳에 머물렀던 일곱 중시조들이 얼마나 비범하고 정의로웠는지를 논하며 칭송했다고 해. 그런데 그 명성도 권위도 명분도, 정작 대운관의 새 통치자가 된 위씨 가문의 것은 아니었지 않아.”
교연이 살포시 웃었다.
“어찌해야겠어? 좋은 것인데 내 것이 아니라면, 부수든가 차지해야지.”
“위씨는 차지하기를 택했다는 건가.”
“그래. 중시조께선 초대 총치총령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스스로 태상사가 되어 태화관에 들어갔어. 태화관은 우리 위씨와 함께 대운관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점차로 태상사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지.
보아. 200년이 흐른 지금, 이제 대운관에선 아무도 태화궁을 보면서 옛 중시조들을 떠올리지 않아. 특히 내가 저 자리에 처형장을 만들고 나선.”
교연이 아래쪽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모두가 두려워서 태화관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해. 난 그게 아주 마음에 들어.”
시현이 얼굴을 깊이 찌푸렸다. 그는 교연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문의 권위도 그런 방식으로 손에 넣겠다는 것인가? 어떻게? 나는 그대에게 부서져 줄 수도 없고 그대의 것이 될 수도 없다.”
“그대도 참!”
교연이 탓하는 목소리를 냈다.
“기껏 사람이 돌려 돌려 말하는데, 그렇게 직설을 해야겠는가?”
“타인의 귀가 없는 곳으로 데려온 것은 그대이지 않나.”
“내가 듣지 않아. 내 기분을 생각해야지.”
교연이 나이에 맞지 않게 입을 삐죽였다.
“좋아. 나도 그대의 기분 따윈 제치고 솔직하게 말해주지. 나는 그대를 이용하려고 대운관에 불러들인 것이 맞아. 돌 인간과 싸우는 데에 끼워 넣고, 그 김에 명성에도 살짝 흠을 내주자는 생각이었지.”
“대운관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말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내 속셈은 대단한 게 아냐. 우리 집안이 태화관을 다룬 것과 같아. 그저 원하는 것에 약간의 흠을 내고, 한동안 내 곁에 두는 거지.”
교연은 시현의 어깨를 건드릴 것처럼 손을 들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사람들은 세상에 문이 둘 있는 것에 익숙해지겠지. 그대의 소문을 듣고 환상을 가졌던 백성들은 완씨 시문이 있다고 세상이 갑자기 천국이 되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될 거고. 나는 그 정도면 만족해.”
교연이 시현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의 표정이 차고 단호해졌다.
“그리고 그대도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해.”
“무엇을 만족하라고.”
“물론 우리의 거래에 대해서지. 내가 내 부하를 언제 어떻게 죽이거나, 그대에게 무슨 손해가 갔는가? 우리의 협의는 그대로야. 나는 돌 인간과 손을 잡는 대신 그대에게 협조하기로 했고, 지금도 수많은 대운관 병사들이 심산을 뒤지고 있어. 곧 우리는 함께 적에게 맞서겠지. 내가 그대에게 제공한 이익이 부족한가? 내 선전에 약간 이용되는 것이 그렇게 불쾌할 정도로?”
시현은 외기에 차가워진 주먹을 꾹 쥐었다.
“내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목숨이 희생되지 않았는가!”
“대운관의 통치를 위해서, 내가 계산하고 내가 결정한 희생이야. 그것이 정치가 아닌가?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 타협과 포기와 희생을 하는 것.”
“그대가 희생하는 것처럼 말을 틀지 말라. 그대가 희생시키는 것은 그대에게 의지하는 백성의 목숨이다.”
“하하. 역시 이런 말장난에는 안 넘어가네. 하지만 결국은 다를 게 없어. 정치란 항상 죽을 사람을 결정하는 일이고 그것은 그대도 다를 바가 없지.”
교연이 어깨를 덮은 모피를 쓰다듬었다. 그가 기분 좋은 듯 말했다.
“만약 내가 자존심만 내세워 그대와 정면으로 다투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대는 그대가 어제 구해온 남방군의 목숨을 그대의 손으로 직접 거둬야 했을 거야. 이미 벽명관에서 그 일이 일어났겠지. 하지만 나는 내 목적을 위해 타협했어. 그렇지 않나?”
시현은 교연을 똑바로 보았다. 그는 교연이 자신에게 무엇을 강요하고자 이야기를 몰아가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교연이 물었다.
“그대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 앞에서 작은 정의를 떨치는 것인가? 아니겠지. 돌 인간을 격파하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선택을 요구당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시현의 대답은 대충 정해져 있었다. 그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물론 나는 세상을 구하고자 하네. 하지만 그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을 구한다는 뜻이네. 그대가 나를 무엇에 이용하든, 나와 함께하고자 한다면 내가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미리 다 죽여버리지 말라는 것이야. 그대야말로, 이 이야기가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우리의 협의를 깨겠다고 위협해야 할 정도로?”
“…….”
교연은 잠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처형당한 이의 죄목을 다시 늘어놓거나, 군권과 사법권과 자치권의 이야기를 꺼내 말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먼저 선택지를 좁힌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시현은 선택하는 쪽을 교연으로 바꾸었다.
교연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그대가 너무 직설적인 점이 싫어.”
“유감이야. 나도 예전엔 그대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교연이 픽 웃었다. 그가 졌다는 듯 대답했다.
“그대가 머무는 동안, 더는 오해 살 일이 없게 주의하지.”
“믿겠네.”
시현은 더 말 없이 등을 돌렸다. 교연은 누각에 선 채 구름다리를 건너는 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교연이 돌아오지 않자 시종들이 화로와 바람막이를 가지고 누각으로 나왔다.
시종이 걸쳐주는 모피 한 겹을 덧입으며 교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부술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다라. 흠…. 꼭 그럴까? 그러고 보니, 시문의 명령패를 내가 갖는 것도 그렇게 나쁜 생각은 아닌데.”
멋대로 시문의 명령패에 손대려 했다는 이유로 교연이 수십을 학살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시종들은 토를 달지도 표정이 변하지도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