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 * *
“네 말이 맞구나. 맺을 것은 맺어야지.”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속내가 어떻든 불화를 표면에 드러내는 것은 시현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결정을 반길 줄 알았던 시종장은 여전히 난처한 모습이었다. 그가 주뼛거리며 말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데리고 계신 이자 역시, 대운관의 법도로는 태화관에 들 수 없습니다….”
시현이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시현이 화가 났음을 아는 데에는 대단한 눈치가 필요 없었다.
시현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장난질이 도를 넘는구나. 법도를 핑계 삼으나 지금 내게 저지르는 비례가 법도가 아님은 너희가 더 잘 알 것인데.”
“혜, 혜량하소서…. 하오나 대운관의 법도로, 신원과 사상 양쪽이 검증된 선량한 자만이 위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반민은 이십 보, 하늘족은 백 보 바깥에서만이….”
“그것이 어디 대운관의 법도더냐. 지씨의 법도겠지.”
“시문이시여….”
왕가를 낮춰 부르는 호칭에 시종장은 더욱 어쩔 줄을 몰랐다.
시현이 말했다.
“답해보아라. 예전에 폐해진 왕실의 알현례까지 들먹이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내가 교문을 지씨와 같이 대하기를 바라느냐?”
시종장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그로서는 도저히 시현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왕 대접을 받고 싶으냐는 말만 해도 충분히 위험한 수위였다. 더욱이 이 시대에 법술사가 왕을 대한다는 말에는 다른 함의가 있었다.
팔관성 중시조의 자치 정신을 계승했다 자부하는 법술사로서, 왕을 대하는 제대로 된 방법이란 궁성을 다 엎은 뒤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먼저 싸움을 건 것이 교연 쪽이라는 것을 알기에 시종장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시현의 격에 맞춰 시종장 역할을 맡았으나 사실 그는 궁내부 제일의 고관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높은 두 사람의 자존심 다툼은 벼슬자리나 격이 조금 높다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땅속으로 꺼지고 싶었다.
뜻밖에 시종장을 구원한 것은 단이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분위기에서,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자자, 나리님. 조금만 마음을 푸십시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 이놈의 출신이 불량한 탓이 아닙니까. 그렇게 노하시면 제가 나리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시현이 인상을 썼다.
“왜 네가 그리 말하느냐. 교문이 지금 트집 잡으려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임을 알지 않느냐.”
“그게 꼭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이 실없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대운관 궁내부에서는 내궁에 발 들인 자의 신원과 행적을 예외 없이 조사합니다. 이놈의 출신이 불량한 것도, 흉험한 물건에 손을 대거나 높은 분들 앞에서 행패 부린 전적도 진작에 알았겠지요. 아무래도 그 태화관에 이런 놈을 들인다 하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단…?”
시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단은 그가 하유관에서 총령 계인에게 자결을 요구했던 일을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고위층의 수행으로서 돌이킬 수 없이 큰 흉허물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하유관이 묵비하여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이 되었다. 대운관이 조사해서 알았어도 언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이 왜 그런 약점을 스스로 내어놓는지 시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은 계속 자기를 깎아내렸다.
“더구나 저는 양가 출신이 아니라 노비였던 놈이 아닙니까. 원래 대운궁은 윗분들의 안전에 엄격하여, 저같이 근본도 모르고 행실까지 불량한 놈이 드나들 곳이 아닙니다. 저도 그것을 알아서 이제껏 처소에서 몸을 사렸습니다만…. 그래도 이제껏 이놈을 궁 안에 놓아둔 것은 다 나리님 때문이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단은 말하면서 시종장에게 눈짓까지 해보였다.
멍하니 있던 시종장은 뒤늦게 눈치를 되찾았다. 그는 구덩이에 동아줄이라도 내려온 듯 펄쩍 뛰며 나섰다.
“시, 실은 그렇습니다! 말씀드리기 어려웠습니다마는… 예. 맞습니다. 태화관에는 본디 경계와 보안을 위한 법도가 엄중하게 적용됩니다. 결코 시문께 무례를 범하려 한 것이 아니오라….”
“뻔한 핑계를!”
시현은 정말로 화를 내려고 했다. 그러나 단이 시현의 소매를 지그시 잡았다.
그가 나긋한 태도로 시종장에게 제안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전부 제 허물입니다만, 위께서 수행 없이 태화관에 드시는 것도 격에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제가 위를 수행하되, 태화관에 발 딛기 전에 신분패를 제출하고 몸수색을 받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단, 네가 그럴 필요가 없다!”
시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단이 미소를 지었다.
“나리님. 제가 송구하여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두 분께서는 서로에게 나쁜 뜻이라곤 전혀 없는데, 이놈이 모자란 탓에 일을 그르쳐서 되겠습니까?”
“…….”
단의 의도를 알고 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교연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주어 불화를 무마하되, 그것을 전부 수행인인 자신의 허물 탓으로 돌리라고 하고 있었다.
윗사람 사이의 불화가 드러났을 때 책임을 아래에 지우고 대충 봉합된 척하는 것은 시현이 진심으로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교연과 척 지지 않고 가겠다고 결정한 것은 시현 자신이었다. 단은 그에 맞는 방법을 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시현이 더 날을 세우면 단은 공연히 치부만 드러내고 마는 꼴이었다.
시종장은 무척 감동한 얼굴이었다. 그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시문이시여. 그렇게 하시지요. 제가 잘 조처하겠습니다. 거느리신 이가 위를 위해 진흙을 쓰는 것도 마다치 않으니 비록 출신이 낮으나 성품은 참으로 귀한 이입니다. 절대로 조사 때 난처한 일을 겪게 하지 않겠습니다.”
시현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것이 허락의 뜻임을 알고 시종장은 손짓하여 단을 불렀다.
한 각 틈을 두고 시현은 호란과 함께 태화관에 갔다.
태화관 월대 위에는 이미 대운관의 수많은 관인들이 시현의 환송례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월대 아래에는 단이 서 있었다. 시현은 말없이 월대를 올랐다. 호란은 계단 아래에 남고, 대신 단이 뒤를 따랐다.
시현은 관인들의 예를 받으며 태화관에 들었다.
1층의 천장 높은 대례실이 활짝 열려 있고 안에도 당상의 고관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당 위에는 상석 두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교연이 의자에서 일어나 활짝 미소를 피웠다.
“어서 오시오, 시문.”
밝은 웃음과 정중하면서도 친애가 담긴 음성에선 아무 유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겉만 보아서는 기싸움을 걸었다 여긴 것이 무슨 오해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교연은 시현을 맞으러 당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스무 보 앞에 이르자 뒤따르던 내관이 발을 멈추며 단에게 손짓해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일련의 행동들은 하나하나 시현에게, 그리고 주위 고관들에게 의미를 전하고 있었다.
시현은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이것은 교연의 말대로 정치였고 거래였다. 그는 교연에게 받은 것과 앞으로 받을 것이 있었다.
시현은 웃는 얼굴로 교연과 인사치레를 주고받고, 도열한 고관들 앞에서 대운관의 환대와 협조에 대한 사례를 하고, 교연과 우의의 잔을 나누었다.
전부 진심이라곤 없는 허례허식이었지만 이 허식을 갖출수록 교연이 뒤에서 칼을 꽂기 어려워진다. 그것 또한 정치였다.
시현은 예닐곱 살 때부터 부모의 필요에 따라 이런 자리에 나갔고 그 중요성과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이날 그는 전에 없이 지겨움과 피곤함을 느꼈다. 다소곳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멀찍이 서 있는 단이 신경 쓰였다.
교연과 작별하고 태화관을 나온 후에도 태화관 앞에서, 대운궁 밖에서 환송례가 또 있었다.
모든 겉치레가 다 끝나고, 행사용 수레가 아니라 원래 타고 온 수레에 오르게 되었을 때 시현은 살아난 듯한 기분이었다.
수레에 오르면서 시현은 곁에 선 단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 네가 많이 고생했다.”
“아닙니다.”
단이 가볍게 웃었다. 시현은 왠지 안도한 기분이 되었다.
“요즘 네 행동도 표정도 평소 같지 않아서 걱정했다. 오늘은 괜찮아 보이는구나.”
“그랬던가요?”
“그래. 너도 대운관이 불편했던 것이겠지. 그래도 이제 떠나면 한동안 돌아올 일이 없을 테니 마음 편히 갖거라. 변고가 해결된 후에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리님께서 상황대로 결정하시겠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단은 수레 문을 닫아주었다. 호란이 주위를 보기 위해 수레 옆을 붙잡아 매달리고, 단은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잡았다.
앞뒤에 대운관군을 호위로 둔 채, 세 사람이 탄 수레는 천천히 대운관 성문을 향했다.
남들이 보기에도 평소같이 행동하고 있구나. 단은 다행으로 생각하는 한편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심장이 쿵쾅거리지도 몸이 떨리지도 않았다. 말이나 행동이 막히지도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다는 게 솔직히 놀라웠다.
조금 전 태화관에서, 단은 처음으로 제 가족을 전부 죽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27. 망실
“우린 정말 복 받은 거야. 감사한 줄 알고 살아야 해.”
누나는 잊을 만하면 그런 말을 했다.
“집도 살 만큼 살고, 부모님 두 분 다 건강하게 일하시고, 교육도 남들보다 많이 받았고. 반민이 이러기가 쉬운 줄 아니? 더구나 너는 좋은 머리에다 재능까지 타고났잖아. 운 좋은 거야. 정말 감사해야 돼.”
돌아보면 누나는 누구에게 감사하라고 한 거였을까. 누나도 종교는 안 믿었는데.
그때 단은 별생각이 없었다. 감사해야 한다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어차피 그는 자기 삶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길에서 천것이라고 야료를 들으면 어떤가. 반민 놈이 법술서를 기웃거린다고 서점에서 쫓겨나면 어떤가. 심부름하다가 이유 없이 쥐어박히면 뭐 어떤가.
공방에만 들어가면 온 세상이 다 자기 거였다.
그 안에서는 뭐든지 해볼 수 있었다. 무얼 해내면 항상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어제보다 나아지는 기쁨. 반복 작업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의 만족감.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의 두근거림.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성공할 때의 폭발하는 듯한 쾌감.
하루하루가 완전했다. 남들은 이런 즐거움을 모르고 어떻게 사나 싶었다.
아버지의 공방에서 골목을 두 개 돌면 화려한 주점 거리가 있었다.
격은 있는지 없는지 음주가무로 소일하는 땅님들, 가게 관리한다며 행패 부리고 다니는 하늘인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걸 볼 때 단은 도리어 안쓰러웠다. 저런 이들보다 자기 인생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감사하라면 감사할 수 있었다.
복 받았다 운 좋다 하니까 좋은 줄만 알았다.
종잇장처럼 얄팍한 복에 검불만도 못한 운이었다.
반민이 복 받았다는 것은, 언제든 남의 뜻으로 그 모든 게 없느니만 못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 괜찮아?”
위에서 들려온 호란의 목소리에 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공구를 정리하던 손이 멎어 있었다.
“피곤해? 어젯밤에 또 잠 설쳤지.”
호란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아닙니다. 그 후에 금방 도로 잤어요.”
단은 웃는 얼굴을 해보이고 공구통을 닫았다.
주위에서는 대운관군이 아침 식사한 자리를 정리하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운관을 나온 지 나흘, 일행은 심산에서 반나절 거리까지 와 있었다.
북쪽으로 검은 암반과 소나무숲이 그리는 심산의 능선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산이 높아 멀리까지 보일 뿐 남은 거리는 보기보다 멀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