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 * *
“시… 문. 네가… 시문인가? 누가 마법사지?”
석상의 얼굴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솟아난 석상과 일행 사이에는 청마대 병사들이 겹겹이 서 있었다.
눈동자 없는 눈에서는 시선이라 할 만한 것도 느껴지지 않아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시현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딛자 사이에 있던 병사들이 앞을 틔워주었다. 시현이 말했다.
“내가 완시현 문이다. 너는 감람이 아닌가? 네가 감람이라면 나를 알아보아야 할 텐데.”
“나… 는 감람… 이야. 다만… 시문과 대면한 적이 없는 부분….”
석상이 시현 쪽으로 머리를 조금 움직였다. 눈동자 없는 눈에 초점이 생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감람을 자칭한 석상이 중얼거렸다.
“시문… 완시현문…? 아. 이번 시대의 인간은 이름을 여럿 쓴다고 했지. 시문이란 건 약칭인가? 아니면 계정 접속용 이름 같은 걸까?”
그가 말하는 사이, 짓뭉개져 있던 발음이 점점 또렷하고 유창해졌다.
시현이 물었다.
“그대가 나를 만나고자 했다고 들었다. 무언가 할 이야기라도 있는가?”
“할 이야기… 랄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팔을 들어 주위를 가리켰다.
“사람이 너무 많아. 나는 너만 데려가고 싶다.”
“안 돼.”
호란이 곧바로 말했다. 산우도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그렇다! 우리 북방군 청마대는 결코 시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괴물 놈이, 시문께 무슨 위해를 가하려고 수작을 부리느냐!”
“곤란한데…. 사람 숫자라도 좀 줄일까?”
감람이 중얼거렸다. 말뜻을 알아들은 병사들이 모두 긴장해서 살기를 뿜었다.
시현이 말했다.
“너희는 이 장소에서 무력 충돌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원하지 않아. 하지만 사람을 많이 못 데려가는 데는 이유가 있어.”
“그렇다면 이유를 대고 설득을 해라. 다짜고짜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지 말고.”
“미안해.”
시현이 쏘아붙이자 감람은 의외로 순순하게 사과했다.
그가 새삼스러운 듯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렇지. 너희는 모두 생명이었지. 숨이 끊기면 그것으로 존재가 사라졌다 여기고, 계속 살아남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죽이면 다른 개체에게 원망을 사지. 응. 맞아. 점점 기억이 나.”
감람의 움직임은 부쩍부쩍 부드럽고 인간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목소리 역시, 감정적이고 조급한 어조가 없는 것을 제외하면 다천관에서 만났던 감람의 것과 거의 비슷해져 있었다.
감람이 주위의 병사들을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죽이려고 한 것은 다시 사과할게. 산 것을 대면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랬어. 나는 시문과 싸우지 않고 말하고 싶어.”
“말해보아라.”
감람이 이제는 완전히 유창해진 언술을 풀었다.
“설득을 하려면 먼저 정보를 공유해야겠지? 내가 시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 별의 가장 깊은 상처야. 영영 망실된 것. 그럼에도 이 별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왔는지…. 우리에게 최대의 위협인 너에게, 사실을 공유하고 최소한의 협조를 구하고자 한다. 다만 이것은 무작위의 인간에게 알리기엔 위험하고 충격적인 정보다. 내가 데려갈 수 있는 사람 수에 한계도 있어. 시문만 데려가고 싶다.”
“시문 님을 혼자 보낼 순 없어!”
호란이 다시 소리쳤다. 시현은 어깨를 살짝 잡아 호란을 말리고 감람을 보았다.
“데려간다면 어디에?”
“위치는 알려줄 수 없어. 하지만 결코 네게 위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시문이시여. 이 괴물 놈의 말을 믿어선 안 됩니다! 차라리 싸우시지요!”
산우가 나섰다.
“이미 수색대가 장소를 특정했지 않습니까. 놈을 없앤 뒤에 쳐들어가면 됩니다!”
“아니야. 너희가 파 들어오고 있는 장소는 우리의 묘지야. 거기도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곤란하기는 하지만, 내가 시문을 데려가려는 장소와는 달라.”
“뭐가 됐든, 시문 님 혼자서는 못 보내!”
호란이 목소리를 냈다. 그는 아예 감람과 시현 사이를 가로막듯 서 버렸다.
감람의 얼기설기한 이목구비가 처음으로 표정 비슷한 것을 나타냈다. 꼭 짜증 내는 것처럼 보였다.
“알았어. 그러면 시문 외에 두 사람만 더 따라와.”
“받아들이지.”
시현이 대답했다.
따라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호란은 곧바로 잠잠해졌다. 반면 산우는 좀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시문이시여, 고작 둘만으로는 만약의 일이 있을 때….”
“괜찮다. 호란은 혼자서 백 명 몫을 한다.”
시현의 말에 선우는 곧바로 등을 세웠다.
“저희 청마대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은 거석 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청마대를 먼저 말하는 것을 보면 직접 갈지 부하를 보낼지 결심을 아직 못 한 게 빤히 보였다.
시현이 바로 옆에 서 있는 단에게 말했다.
“단, 수레에 가서 네 짐을 챙겨오거라. 움직일 때 필요할 만한 것은 뭐든.”
“예.”
단이 말하고 수레 쪽으로 갔다. 산우가 입을 뻥 벌렸다.
“예? 저희를… 데려가시는 게 아닙니까?”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에 가는데, 당연히 길잡이가 있어야지 않겠느냐.”
“하지만 호위가!”
“말하지 않았느냐. 호란은 혼자서 백 명 몫을 하느니.”
시현이 빙긋 웃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산우는 입이 열리자 거의 넋두리에 가까운 만류의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시현은 전부 무시했다. 진심도 구체성도 없고 전부 나중에 책망을 듣게 될 때 변명을 삼기 위한 말뿐이라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곧 단이 돌아왔다. 그는 대운관에 있는 동안 내내 입고 있던 단정한 의복을 벗어버리고, 원래 입던 주머니 달린 두루마기를 걸치고 걸낭을 메고 있었다.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단이 호란에게 묵직한 마력석 대련을 건넸다.
“나리님 거예요. 호란 호위가 가지고 계십쇼.”
“응.”
준비가 다 된 것을 알자 시현이 감람을 향해 다가갔다.
“그대들은 우리와 적이지만 항상 신의를 지켰지. 녹렴에 대한 사의의 뜻으로 한 번만 믿어보겠다. 내가 이 결정을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해다오.”
“아, 녹렴 이야기를 꺼내는 건 반칙이야.”
감람이 투덜거리며 시현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시현이 그 손을 잡은 순간, 감람과 세 사람의 발밑 지면이 크게 열렸다. 땅속은 황금색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으, 으악!”
마지막까지 시현을 따라오며 걱정하는 말을 붙이고 있던 산우가 도망치듯 뒤로 물러섰다.
뒤에 있던 청마대 한 사람이 산우를 끌어당겨 보호하며 물러섰다.
산우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을 때는 지면이 깨끗이 닫혀 아무 흔적도 없었다. 감람이 솟아올랐던 자리에 흙과 자갈이 흐트러져 있을 뿐이었다.
“저, 전갈을 보내라.”
침을 꿀꺽 삼키고 산우가 말했다.
“제일 빠른 자가 가서 후발대에 전해라. 어서 교문께 자초지종을 알려! 그리고 나머지는 수색대가 조사하던 광산을 향한다!”
시현의 호위로 산우를 보내면서, 교연은 이 일을 잘 해내면 수년간 비어 있던 대장군의 자리가 그에게 돌아올 것을 암시했다. 그것이야말로 산우를 비롯한 네 명의 사방장군이 서로 물고 뜯으며 염원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산우는 교연을 알 만큼 알았다. 그가 일을 시키면서 상을 언급할 때는, 실패할 때의 벌도 그만큼 크다는 것이었다.
산우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현이 간 곳을 찾아내야 했다.
* * *
“시문 님! 시문 님, 괜찮으세요?”
시현의 어깨를 잡은 호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만… 잠깐만 호란아. 목소리를 줄여다오. 흔들지 말아라. 머리가 울린다.”
시현이 중얼거렸다.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토굴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호란이 벌떡 일어나서 감람에게 따져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바로 방금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아니….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진짜로 몰랐어. 미안해. 정말….”
감람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비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았다.
일행은 땅속에 뚫린 빈 공간에 있었다. 주위의 벽은 모새와 함께 광산에 갇혔을 때처럼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감람이 당황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제부터 너희를 데리고 갈 곳은 보통 사람의 신체로는 버틸 수가 없어. 압력도 강하고 산소도 없고…. 하지만 몸 안에 마력을 가득 채워 넣으면 서너 시간 정도는 괜찮거든. 그래서 그런 건데….”
“와. 몸속에 마력을 넣는다고…. 나리님을 죽이려고 작정한 놈들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는데.”
단이 물병의 물을 천에 적시면서 말했다.
심산 산자락에서, 감람은 세 사람을 빛의 구체에 감싼 채 한없이 땅속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도중에 시현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바람에 급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했는지 감람은 순식간에 넓은 공간을 만들고 공기까지 채워넣어 시현을 쉬게 해주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지금 몇십 길 아래인지 모를 땅속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로 방금, 그 고생을 해서 겨우 나은 시현의 신이명을 감람이 악의 없이 터뜨렸다는 게 밝혀진 참이었다.
단은 벌써부터 감람의 초청에 응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래서 일방적인 강자와의 거래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무엇을 약속했든, 악의가 있든 없든 그런 관계는 대체로 이쪽이 조지고 끝나기 마련이었다.
감람이 다시 사과했다.
“정말로 고의가 아니야. 미안해. 예전에 같이 간 인간들은 괜찮아서 너희도 괜찮을 줄 알았어. 실제로 너희 둘도 괜찮잖아? 왜 시문만 그러는 거야?”
“나도 별로 안 괜찮거든?”
열 오른 시현의 이마와 목에 젖은 천을 대어주며 단이 불평했다. 호란이 화들짝 놀랐다.
“단도? 아파? 열 나? 왜 말 안 했어!”
“아니, 난 대단한 거 아니니까 호들갑 떨지 마. 약간 멀미같이 속이 울렁거리는 거뿐이야. 가라앉고 있고.”
감람이 세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여자 쪽은 평소에도 몸 안에 순환하는 마력량이 많아서 괜찮은 거구나. 나머지 둘은 적응을 못 하는 거고…. 그렇다고 해도 시문은 너무 심하게 반응하는데.”
“시문 님은 마력을 민감하게 느껴서 그래. 자극이 너무 강하단 말이야.”
감람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와, 정말? 이번 시대의 마법사는 마력을 구체적으로 지각한단 말이야? 어떻게? 인간에겐 초물리계를 감지하는 감각 기관이 없잖아?”
“그런 소린 몰라! 어떻게 할 거야?”
호란이 펄펄 뛰었다. 시현이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괜찮다. 점점 괜찮아지고 있다.”
“시문 님, 신이명 재발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 어지러운 일은 법술을 과하게 쓴 뒤에도 가끔 있었다. 쉬면 차차 가라앉는다.”
시현이 감람을 보았다.
“그보다 어떻게 할 셈인가? 이대로라면 네가 목적한 장소에 내가 갈 수 없겠는데.”
“음…. 할 수 없지. 가까이 가진 못하더라도 멀리서 들여다볼 수 있는 틈새가 몇 군데 있어. 거기라도 가야지. 나머지는 말로 설명하고.”
“이미 조금은 알 것 같구나.”
시현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등을 폈다.
“네가 내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 별의 원천인가? 이 별의 원천이 상처를 입었다는 건가?”
“원천이 뭐예요?”
호란이 물음에 답한 것은 시현이 아니라 감람이었다.
“세상 모든 기운의 근원이지. 별 표면의 모든 생명이 태어나 살게 하고, 별의 형체를 지탱하고, 별이 공전의 고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는 힘. 별의 중심.”
그의 목소리가 음울해졌다.
“맞아. 상처 입고 망실된 것은 원천의 핵이야. 그게 우리가 너희와 싸우기 시작한 이유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