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2
022화
* * *
그 증거로 모들은 아까보다 지쳐 보였다.
모들은 한숨을 후 내뿜더니 손부채질을 하며 장군석의 발등에 앉았다.
작은 몸이 내뿜던 터질 것 같은 기세가 한결 수그러들어 있었다.
시현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 기운을 써서 돌을 일으킨 것인가! 애초에 거석이 생겨난 것부터가 저들의 소위였던가!”
호란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호란의 힘으론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다.
만약 모들이 지쳐서 아까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면 그게 유일한 가망이었다.
호란은 자세를 틀지 않은 채 곁눈질만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둘러싼 거석 무리에서 금방 이길 수 있는 상대와 경사면에 서 있어 잘 움직이지 못할 상대를 파악했다.
호란은 두 사람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작게 소곤거렸다.
“시문 님, 단하고 여기 잠깐만 있으세요. 보니까 한쪽은 뚫리겠어요. 도망칠 수 있어요.”
그런데 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호란. 내게서 떨어지지 말아라.”
시현의 시선은 모들이나 거구가 아닌 장군석에, 정확히는 장군석의 가슴에서 빛나는 나선무늬에 똑바로 꽂혀 있었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뻗어라. 깊이 뻗어라. 섞이고 품으며 내 뜻을 일러라.”
호란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시현의 목소리가 어떤 때 지금 같은 울림을 갖는지 호란은 알고 있었다.
“나오라!”
시현이 장군석을 향해 곧게 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덜걱, 장군석의 상체가 어긋났다.
가슴의 빛 덩어리가 무언가에 밀려나듯 몸 밖으로 새어 나오려 했다.
모들과 거구가 경악했다. 모들이 외쳤다.
“마법이다! 어떻게 아직도 마법을….”
“쟤 마력석 갖고 있어!”
거구가 시현을 가리켰다.
시현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호란은 곧 늘어뜨려진 매듭술의 빛깔을 알아보았다.
떠날 때 경재가 건넨 향갑 노리개였다.
저 노리개 덕택에 시현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듯했다.
시현이 다시 외쳤다.
“뿌리 다른 혼이여, 그 백으로부터 갈라져라. 네 근원의 부름이다. 나오라!”
장군석의 빛이 덩어리를 이루며 공중으로 줄줄 끌려 나왔다.
빛 덩이가 빠져나올수록 견고하던 장군석이 틀을 잃었다.
다리가 기울어지고 어깨에 금이 가더니 팔 하나가 아래로 떨어져 굉음을 울렸다.
거대한 장군석은 천천히 뒤로 기울며 산면에 기대는 형태로 허물어졌다.
“안 되겠다!”
거구가 모들을 강아지 들듯 달랑 들어 올렸다. 도망칠 태세였다.
모들이 몸부림쳤다.
“잠깐만! 싸울 거야, 그까짓 마력석….”
두 사람의 실랑이를 끊듯이 시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발하라!”
공중에 뭉쳐 있던 빛 덩이가 일순 불꽃처럼 타오르더니 십여 가닥으로 갈라졌다.
불덩이가 사방으로 뻗으며 무리를 둘러싼 거석에 내리꽂혔다.
골짜기가 빛과 폭음으로 뒤덮였다.
불덩이 하나하나가 거석의 기결을 정통으로 꿰뚫으며 폭발했다.
사방에서 거석들이 쩍쩍 갈라지며 쓰러졌다.
폭음이 그쳤을 때 골짜기에 서 있는 거석은 하나도 없었다.
장군석은 완전히 빛을 잃고 절벽에 기댄 채 멎어 있었고, 대장석 두 개와 다른 거석들은 조각난 바위더미로 변해 있었다.
두 괴인도 그새 종적을 감췄다.
“마, 마법….”
“그 많은 거석을, 한 번에….”
하늘인들이 혼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안도와 기쁨이 아닌, 경악과 두려움이었다.
시현이 소리 높여 명했다.
“호란! 괴인들이 산 아래로 도망쳤다! 뒤를 쫓되 따라붙지 말고 어디로 가는지 보고 오거라!”
“네!”
호란은 거구의 기척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땅인에게 마력석이 있다! 죽여!”
호란은 소스라쳐서 돌아섰다.
외친 것은 방금 시현 덕에 목숨을 부지한 하늘인 소년이었다.
호란은 한달음에 골짜기로 돌아왔다.
이미 성한 하늘인들이 시현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는 시현의 팔을 붙잡으려는 찰나였다.
호란이 벽력같은 소리로 고함쳤다.
“시문께서 방금 너희 목숨을 구했어!”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호란은 성난 걸음으로 다가와 시현과 단을 무리 밖으로 이끈 후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목숨 값은 살과 피로 갚는 것이 하늘인이야! 목숨을 구함 받고서 곧바로 해를 끼치려 하다니. 그런 짓은 방랑족도 안 해!
호란이 매섭게 꾸짖자 몇몇이 시선을 피했다.
띠를 한 소년이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그는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흉흉한 눈으로 시현을 노려보았다.
“목숨 빚도 빚 나름이지. 땅인은 못 믿어. 싸우기 싫다면 가진 마력석을 다 내놔라.”
“마력석은 이제 없다. 애초에 하나뿐이었다.”
시현이 손에 든 노리개를 내어 보이며 말했다.
금과 비취로 화려하게 세공되어 있던 향갑의 한가운데가 불에 녹은 것처럼 이지러져 있었다.
옆에 선 하늘인 중 한 명이 쏘아붙였다.
“누굴 속이려고! 마력석 한 개로 어떻게 그런 위력… 을….”
말하던 중에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주춤대며 다시 물었다.
“시문…. 남운관 완씨 시문? 진짜로?”
“완시현 문이다. 명령패를 보겠느냐.”
시현이 품에 손을 넣어 패를 꺼냈다.
하지만 아무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방금 그 가공할 위력을 보고서 다른 방법으로 상대를 분별하려 한다는 게 오히려 우스웠다.
뜻밖에도 분위기는 더욱 차갑게 식었다.
시현을 바라보는 하늘인들의 눈은 이제 두려움을 넘어 적의를 담고 있었다.
띠를 맨 소년이 수하에게 소리쳤다.
“당장 몸을 뒤져! 돌, 금속, 패물 비슷한 건 모조리, 아니다. 뭘 숨겼을지 모르니 자락 긴 옷과 허리띠도 뺏어!”
“죽을 줄 알아!”
호란이 온 힘을 모아 고래고래 고함쳤다.
머릿속으로는 누구부터 패야 할지 순서를 재고 있었다.
“시문 님이 없다고 하시면 없는 거야! 만약에 있으면, 너네가 시문께 손을 대고 살 것 같아!”
둘러선 하늘인들이 모두 주춤하며 물러섰다.
시현이 곤란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정말로 이제 없다. 설령 마력석이 있다 해도 내가 너희를 해칠 리가 없지 않으냐.”
솔직한 시현의 말에 단이 더 이상 눈빛을 간수 못 하고 시선을 돌렸다.
상전의 머릿속이 너무 꽃밭이라 북방에 가서 화훼 장사를 하면 큰 부자가 될 것 같았다.
단의 속도 모르고 시현이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너희가 왜 나를 경계하는지 모르나. 나는 치풍관에 아무 나쁜 뜻이 없다. 여행 중에 물과 식량을 사고 쉬어가고자 했을 뿐이다. 이쯤 하여 오해를 풀어다오.”
“시문 님이 너네 성에 쳐들어오려는 장군석이랑 거석 다 부숴 줬잖아! 괴인도 쫓아내 줬잖아! 감사를 하지는 못하고….”
호란이 삿대질을 하며 끼어들자 시현이 호란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말렸다.
“그것은 도리를 한 것이다. 감사받을 일은 아니다.”
단은 다시 시선을 피했다.
이제까지 온 길을 꽃으로 다 뒤덮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예쁘고. 알아서 돌아가라고 내버려두고 내 갈 길 가기도 좋고.
소년이 시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몸수색은 미뤄주지. 일단은 널 성으로 압송해서 여기 온 목적을 조사할 거야. 널 어떻게 할지는 그 후에 정하겠다.”
“따르마. 너희는 치풍관을 외적에게서 지키는 이들이니 그를 요구할 수 있다.”
시현이 수긍했다. 하지만 호란은 눈에 불을 켜고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시문 님께 해 끼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해. 아니면 여기서 헛싸움이 난다.”
호란은 한 사람이고 치풍관 병사들은 성한 자만도 열 명 가까이 되었다.
하지만 호란은 두려워하기는커녕 혼자서 다 죽이겠다는 기세였다.
호란의 눈을 빤히 보던 소년이 말했다.
“내 이름은 수리야. 너는?”
“호란.”
“호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호란. 대신에 너도 저자를 조사하는 데 방해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네 쪽이 먼저야.”
“저자가 치풍관에 해 될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도 해 끼치지 않을 거야. 하늘에 걸고 맹세한다.”
“우리 셋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나도 다투지 않을 거야. 하늘에 걸고 맹세할게. 이 맹세를 어기면 비가 와도 내 발치만 빼고 젖을 거야.”
맹세를 나누고 나자 하늘인 두 명이 다가와 각각 시현과 단의 팔을 붙잡았다.
일행은 그대로 치풍관 병사들의 손에 끌려 산 위를 향했다.
호란이 당장 누구를 물어뜯을 것처럼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시현이나 단을 대하는 손길은 거칠지 않았다.
하지만 초소에 도착한 후론 죄인 취급이 시작됐다.
사방이 쇠창살로 가로막힌 수레를 가져오더니 타라고 으르댔다.
“죄인도 아닌데 이런 데 들어가란 말이야?”
“되었다. 산꼭대기까지 걷는 것보다 낫지 않으냐.”
호란이 화를 냈으나 시현이 냉큼 수레에 올라버리니 도리가 없었다.
호란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수레에 들어가 시현이 앉은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 뒤로 단이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 따라들어왔다.
수리가 수하의 부축을 받아 절뚝이며 굳이 오더니 창살을 잡고 호란에게 말했다.
“몫꾼은 안 들어가도 되는데. 어차피 이런 창살로 널 가둬둘 수도 없잖아.”
“시끄러워. 난 시문 님 옆에 있을 거야.”
호란이 얼굴을 찌푸려 보이자 수리는 웃으면서 물러났다.
곧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나마 여유가 생긴 김에 호란은 바로 시현에게 궁금하던 것은 물었다.
“시문 님, 깜짝 놀랐어요! 이젠 마법을 못 쓰게 되신 것 아니었어요? 그 노리개는 대체 뭐예요?”
“이것 말이냐.”
시현이 품에 넣었던 노리개를 다시 꺼내 보였다.
“이 갑에는 마력석이라 불리는 돌이 들어 있다. 법력을 머금는 성질을 갖고 있어 필요할 때 단 한 번 안에 든 기운을 내어 쓸 수 있지.”
“그럼 그 돌만 있으면 얼마든지 마법을 쓰실 수 있는 거네요?”
호란은 기대에 찼다. 하지만 시현은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남방에서는 전혀 나지 않는 귀한 돌이다. 한 개가 지닌 힘도 크지 않다. 얻기도 어렵고, 있다 해도 한두 개로는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거다.”
“하지만 방금 엄청 세셨잖아요!”
시현이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방금 전은… 내가 운이 좋았다.”
어떤 방식으로 운이 좋아야 장군석 하나와 거석 십여 개를 말 몇 마디로 쓸어버릴 수 있는지 호란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시문 님이 하는 말의 절반쯤은 이해를 못 했기 때문에 더 묻지 않고 넘어갔다.
그보다는 단에게 신경이 쓰였다.
차분한 얼굴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시현과는 대조적으로 단은 구석에서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란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호란에게 말했다.
“호란 호위님, 왜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맹세를 받아주셨습니까. 이제 우린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