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20
220화
* * *
시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원천이 상처 입다니. 그것이 가능한가?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건 인간들이….”
감람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그가 좀처럼 말을 잇지 않자 호란이 재촉했다.
“설마, 그것도 옛날 인간들이 그랬다는 거야?”
“그럴 건데…. 미안. 기억이 안 난다. 그 기억은 죽은 쪽이 가져갔나 봐.”
“뭐어?”
“우리의 자아는 경험을 재료로 하니까. 자아가 둘로 분리되면서 기억도 나뉘어졌거든.”
감람이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할 수 없지. 묘지로 가자. 내가 전에 쓰던 몸에도 남은 기억이… 있을 거….”
감람의 음성이 다시 뭉개지면서, 바닥에서 솟아나 있던 몸체가 느리게 내려앉았다. 돌로 된 몸체는 바닥에 불룩 솟은 요철만을 남기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감람이 마지막에 바라본 벽이 얕게 흔들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돌과 흙이 좌우로 밀리며 앞쪽으로 긴 굴이 뚫렸다.
토굴 벽면이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엷은 빛으로 물들었다.
호란은 빈 통로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저 길로 오라는 걸까요?”
“그런 것 같구나.”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란은 그를 부축해주려고 다가갔지만 시현은 손을 저어 사양하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괜찮으세요? 어지럽지 않으세요?”
“괜찮다. 다 가라앉았다.”
“무리하시면 안 돼요.”
“아니다. 내 몸 상태는 알아. 움직이자꾸나.”
단이 나침반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자침이 정상으로 움직인다는 전제하에… 이 굴은 심산 중심 방향으로 뚫려 있는데요. 일단은 가볼 수밖에 없겠네요.”
셋은 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감람이 사라진 틈을 타서 호란은 줄곧 신경 쓰이던 일을 입에 올렸다.
“저게 진짜로 감람일까요?”
“자기가 그리 말하지 않느냐.”
“하지만 성격도 전혀 다르고…. 그리고 시문 님, 눈치채셨잖아요? 저 감람에겐 기결이 없어요.”
처음 감람이 형체를 갖추었을 때, 호란은 반사적으로 적의 약점이 될 기결을 찾았다. 하지만 돌 인간은 물론 거석에게마저 반드시 있는 기결이 감람의 몸에는 끝까지 생겨나지 않았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새를 대할 때와 같았다. 자기 육체와 대지의 구분이 없고, 기결의 형태도 위치도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 싸웠던 감람은 옷 아래에 틀림없이 기결이 있었어요. 자기도 그렇게 말했고요.”
한 발짝 뒤처져서 따라오던 단이 말했다.
“감람이 자아를 둘로 분리했다고 말했잖아. 둘이 되면서 기결은 저쪽으로 넘어간 거 아닌가?”
“그건 아닐 거야.”
“어떻게 알아?”
“어, 그….”
호란이 잠깐 머뭇거렸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난 기결이 돌 인간 그 자체라고 생각해. 돌 인간이 두 명이 있으면 기결도 두 개가 있는 거고, 기결이 하나면 몸이 두 개 세 개라도 그 돌 인간은 하나인 거야.”
단이 시현을 쳐다보았다.
“맞아요?”
“호란이 그렇게 느꼈다면 맞을 거다. 거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세운 가설도 그와 같다.”
시현이 말했다.
“학자들이 오래도록 고민한 것이, 사람과 수원을 공격하려는 거석의 의지는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과 동물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활동한다. 하지만 거석은 수원을 파묻은 뒤 다시 돌과 흙으로 되돌아가버리지 않느냐.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마치 죽기 위해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이젠 밝혀졌지요. 그놈들은 돌 인간의 명령을 따르는 거잖아요.”
“하지만 황야 한가운데서 혼자 일어난 거석도 조악하나마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지 않느냐. 각각의 개체가 의지를 가진 것은 분명해 보였지.
그래서 학자들은 관점을 조정했다. 거석이 수원을 파묻으면, 돌로 된 몸체는 벌레의 고치처럼 땅 위에 버려지고 기결에 맺힌 기운만이 물과 함께 땅 밑으로 파고들어 간다. 그렇다면 거석의 본체는 돌 부분이 아니라 기결에 맺힌 기운인 것이다.”
“맞아. 거석은 팔다리를 떼어 버려도 기결만 살아 있으면 아무 돌하고나 이어 붙어서 도로 움직이잖아.”
호란이 보충했다. 단이 말했다.
“흠. 기결은 그냥 심장이나 동력원 같은 역할인 줄 알았는데. 뇌도 겸하는 거였구나…. 그럼 거석의 머리 부분은 무슨 역할을 하는 건데?”
“몰라. 그냥 달려 있어.”
시현이 대신 대답했다.
“금강이 돌 인간의 모습은 사람을 본떠 취한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거석 또한 마찬가지로 그저 모양을 따서 갖춘 것이겠지.”
“문자 그대로 머리는 장식이군요.”
“거석에겐 그럴지 모르지만 돌 인간에겐 그렇지 않을 거다. 신체의 형태가 고정되지 않은 모새와 지금의 감람은 다른 돌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자아가 희박하지 않으냐. 그것을 보면 고정된 신체에 고정된 형태로 기결을 묶어놓는 것이 자아의 유지에 필요한 것 같다.”
“전부 다 맞아. 설명이 필요 없어서 좋네.”
굴 저편에서 선명하게 울려온 것은 감람의 목소리였다. 까마득히 길게 뻗은 토굴 끝에 감람이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일행은 서두르지 않고 감람에게 다가갔다.
감람은 홍은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모도 머리 모양도 입은 복장까지 같았다. 다만 얼굴에 어린 표정은 훨씬 부드러웠다.
감람은 세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앞장서서 토굴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감람이 뒷말을 이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자아가 있는 인간하고는 달라. 자아를 형성하려면 기억과 경험이 필요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면 자기 자신을 제한해야 하지. 우리는 자아가 확고해질수록 대지와의 연결을 잃어. 형상도 능력도 한정된 형태로밖에 지닐 수 없어. 반대로 대지로 돌아가려 하면 기억과 자아가 흩어지지. 둘 다 가질 수는 없어.”
감람이 자신을 소개하는 것처럼 한 손을 상체에 얹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둘로 나뉜 이유도 그거야. 대지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과, 남아서 체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양립이 안 됐지. 고민하는 사이 저절로 갈라지기 시작하더라고.”
호란이 물었다.
“그럼 네가 본체야? 우리가 먼저 만난 쪽은 네 일부인 거야?”
“글쎄? 그런 구분은 생각 안 해봤는데. 이 돌이 나라고 쳐 봐.”
감람은 허공에서 꺼내 온 것처럼 손안에 주먹만 한 돌을 들어 보였다. 그가 양손으로 힘을 주더니 돌을 깨끗하게 두 쪽으로 갈랐다.
“이렇게 둘로 나누면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난 둘 다 똑같은 나라고 생각해.”
“하지만 똑같다고 하기엔… 그 감람하고 너는 굉장히 다른걸.”
“아, 그건 갈라질 때 가져간 기억이 달라서 그래.”
감람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걔가 부정적인 쪽의 기억을 많이 가져갔어. 그래서 성격이 그 모양이 된 거야…. 안됐지만 의무감을 느낀다는 건 그런 거지.”
“기억을 버리고 대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그리 긍정적인 성향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만.”
시현이 말했다.
“너희의 자아가 기억으로 구성된다면, 기억이 점점 흩어진다는 것은 언젠가 자아가 소멸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죽음과 다를 바가 없을 텐데.”
“그렇게도 볼 수 있지. 하지만 죽음이 나쁘다는 것도 너희 생명 있는 존재들의 관점이잖아? 나는 끝이 있는 것이 꼭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우리 중 많은 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이 감람은 종말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에 나서는 다른 돌 인간들과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많은 수라는 말은 시현의 신경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시현이 약간 망설이다 감람을 떠보았다.
“너희 돌 인간은 전체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던데.”
“그건 관점에 따라서 달라. 다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많기도 하고, 손으로 꼽을 만큼 적기도 하지.”
“무슨 뜻인가?”
“보면 알 거야.”
감람이 앞쪽을 손짓해 보였다. 저 멀리에 토굴의 끝이 보였다. 멀어서 잘 알 수는 없지만 통로 밖은 더 넓은 공간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감람은 조금 발걸음을 빨리했다. 세 사람도 입을 다물고 그를 따랐다.
통로 입구에 다다르자 감람이 말했다.
“나는 우리가 자아를 잃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반면에 금강이나 모들처럼 자아가 강한 쪽은 그걸 죽음이라고 부르며 상실로 여기지. 그래서 걔들은 여길 묘지라고 불러.”
앞을 본 세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과 천장을 잇는 반투명한 기둥이었다.
통로 밖에는 광활한 공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가운데에 탑과 같은 형태의 굵은 기둥이 서 있고, 기둥과 벽면 전체에 마력회로가 뻗어 푸른색과 은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공간도 설치된 마력회로도 홍은산의 봉인고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다.
그러나 일행을 놀라게 한 것은 공동 자체가 아니었다.
공동 바닥에는 기둥을 둘러싸는 형태로 수백의 돌 인간들이, 정확히는 돌 인간이었던 것 같은 형상들이 앉거나 누워 있었다.
형태는 완전한 사람이지만 흙과 돌로 되돌아간 것도 있었고 아까 감람이 산자락에 나타났을 때처럼 인간의 형태를 하다 만 것도 있었다. 드물게는 큰 돌덩이에 기결이 있었던 흔적만 남은 것도 있었다.
어떤 모양이든 바닥에 자리한 수많은 형상들이 한때 살아 움직이던 돌 인간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의 형태를 취했지만 더 이상 어떤 점에서도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수백의 돌 형상이 고요히 멎어 있는 광경은 묘지라는 말을 바로 이해하게 했다.
호란이 겨우 물었다.
“전부… 죽은 거야?”
“아니, 다들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인간 식으로 말하면 멍하니 있는 거야.”
감람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사람의 관점에선 충격적인 광경인데도 감람에겐 그렇지 않은 듯했다.
“내려가자. 너희가 내려가기엔 높은가? 내가 임시로 뚫은 통로라서. 경사를 만들어 줄게.”
일행이 선 통로는 바닥에서 두 장 정도의 높이에 있었다.
감람은 먼저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더니 벽면의 회로에 한 손바닥을 대고 다른 손으로 무언가 조작하는 듯한 움직임을 했다. 곧 지면이 일어나 벽에 붙은 경사로를 만들었다.
일행이 경사로를 내려가자 감람은 공동 중앙의 기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눕거나 앉아 있는 돌 인간들 사이를 훌쩍훌쩍 가로지르거나 뛰어넘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뒤를 따라가는 일행은 감람처럼 거리낌 없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형태가 선명하게 돌 인간들은 마치 잠든 사람처럼도 보였다. 의복 바깥으로 드러난 기결에 흐리게 빛이 머문 이도 있었지만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현은 노인의 모습을 한 어느 돌 인간의 옷자락을 밟지 않으려고 빙 돌아서 겨우 감람을 따라잡았다.
돌 인간들에게 항상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그였지만 지금만은 얼굴에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 이건 마치… 집단 자살과도 같지 않은가.”
시현의 물음에 감람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뭐? 전혀 아니야! 이건 그런 거랑 완전히 달라. 멍 때리는 거라니까?”
“하지만 이건… 멈춘 채 죽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시현은 주위의 형상들을 돌아보았다.
반 이상의 형상에 이미 기운이 어렸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기결이 형태를 갖춘 개체도 있었지만 그 안에 맺힌 기운은 순환이 극도로 느렸다.
언젠가 그 순환마저 멈추면 기결의 형태를 이루었던 기운은 순리대로 흩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감람이 말하는 자아의 끝이었다.
시현의 표정을 보고 감람이 미소 지었다.
“자기 상황에 대입해서 그렇게 금방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도 인간의 재미있는 점이지. 암장은 너희의 그런 점을 좋아했어. 하지만 우리한테 이건 너희가 느끼는 것만큼 비극적인 상황이 아니야.”
“어떻게 말인가.”
“우리는 너희와 달리 살기 위해 움직일 필요가 없잖아. 배가 고파지지도 추위를 타지도 않아. 욕망이나 호기심, 목적이 있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없어진다면 그냥 멈출 수도 있는 거지. 딱히 할 게 더 없으니까.”
“하지만 자아가 흩어져 없어진다고 했잖아.”
호란이 말했다.
“그렇게 사라지면 영원히 못 돌아오는 거잖아. 그게 죽는 것 아니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