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22
222화
* * *
감람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원천의 기운을 뽑아내는 정도면 몰라도. 인간이 원천을 직접 제어하는 건 불가능해.”
“어째서인가? 네가 말하지 않았는가. 원천은 그저 아주 거대한 기운이 응축된 덩어리일 뿐이라고. 그러한 것을 다루는 기술을 사람들은 아주 예전에 개발했다.”
시현은 호란이 멘 대련에서 굵은 마력석 하나를 꺼냈다.
그가 주문을 외우자 공동 안의 허공에 커다란 빛무리가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작은 구체로 응축되었다.
빛의 구체가 계속 작아지다가 손톱만 한 크기에 이르고, 내뿜는 빛마저 줄어드는 것을 보고 감람이 탄식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
시현이 위를 향해 뻗었던 손을 내렸다. 구체는 다시 빛무리로 퍼졌다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기운을 순정한 형태로 응축하고 여러 법술에 응용하는 기술을 계속 연구해왔다. 인력을 발생시킬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반면에 너희는 대지를 매개로 기운을 제 몸같이 다루면서도, 기운 그 자체를 감지하거나 다루는 능력은 갖지 못한 것 같더군.”
“그건 사실이야. 자아가 강할수록 기운과 동조하는 능력이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니 나와 함께라면 너희가 시도해보지 못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현은 양손을 펼쳐서 기둥에 새겨진 회로들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 기둥은 원천으로부터 기운을 추출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지. 그러면 역으로 지상의 기운을 원천으로 흘려 넣을 수도 있는가?”
“원천의 핵에 직접? 구조상 가능하긴 할 테지만….”
“그러면 내가 이 심산의 마력석 광맥의 기운을 응축하여 원천에 내려보낸다고 해보자. 회로를 끊을 때 새어 나올 기운을 그 기운으로 대신할 수 있겠는가?”
“마력석 광맥? 한참 부족하지!”
노래하는 듯 높은 목소리는 뒤쪽에서부터 들려왔다.
뛰듯이 뒤를 돌아본 호란이 헉 소리를 냈다.
기둥을 둘러싸고 멎어 있던 수백의 돌 인간들이 하나씩 하나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이 꺼졌던 기결에 빛이 감돌고 무너졌던 돌무더기가 사람의 형상을 되찾았다.
처음 목소리를 냈던 형상이 기지개를 켜듯 팔을 뻗으며 움직였다.
사람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의 적색 석상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감싼 흰 천이 치렁치렁 늘어지자 흙먼지가 우수수 쏟아졌다.
석상이 일행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누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서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들을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잖아.”
“실리카. 오래전에 되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직 의식이 남아 있었구나.”
감람이 놀란 듯 말했다. 실리카라 불린 거인이 책망하듯 말했다.
“너 또 잊어버렸지? 애초에 우리가 여기 모인 건 이 추출구를 인간들에게서 지키기 위해서잖아. 다른 건 몰라도 인간이 오면 깨어나야지.”
그가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뭐, 이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 놈들이 더 많은 모양이지만.”
실리카의 말대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돌 인간은 전체의 반수 이하였다. 그래도 그 수는 충분히 많았다.
아직 형태를 못 갖춘 돌무더기가 웅얼대는 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좋다기보다, 이만하면 됐다에 가깝지. 어쨌든 우리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오래 별이 버텼잖아. 나는 슬슬 별이 종말을 맞아도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돌 인간들도 저마다 몸을 움직이며 제멋대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야, 그렇게 말하면 종말을 막으려고 아직 열심히 하고 있는 애들이 마음 상해.”
“마음 상한다고…. 그래. 그런 게 있었지. 거의 다 잊어버렸어.”
“인간의 마음이야 신경 써줘야 하지만, 우리끼리도 그런 걸 챙겨야 되나? 우린 속상하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순식간에 백 명 넘는 돌 인간에게 둘러싸이게 된 일행은 기가 질렸다. 잔뜩 긴장한 호란이 단을 시현 쪽으로 밀면서 앞에 붙었다.
검고 땅딸막한 돌 인간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며 호란에게 말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해치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너희는 우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거잖아? 인간치고는 아주 기특해.”
“어머, 인간들 한 명 한 명은 대부분 기특해. 장기적 관점에서 해악이라서 그렇지.”
실리카가 높고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쿵 쿵 소리를 내며 걸어와 세 사람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원천의 기운을 다룰 수 있다고 한 인간이 누구야? 요즘 인간은 다 그런 걸 할 수 있나?”
“아니, 나뿐이다. 아마도 현존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시현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실리카는 한동안 시현을 관찰하다가 감람을 보고 물었다.
“그러면 꼭 사출구를 건드리는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애만 죽이면 한 세기 정도는 괜찮은 것 아니야?”
“안 돼. 해치지 않기로 약속했어.”
“아, 약속을 했어? 그러면 할 수 없지. 사출구나 부수자.”
실리카는 호란이나 시현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빠르게 입장을 바꿨다.
그가 시현과 눈을 마주쳤다.
“기특한 인간 아이. 원천에 힘을 보충해주겠다는 네 발상은 나쁘지 않아. 하지만 고작 마력석 광맥에 깃든 힘 정도로 원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원천의 겉껍질 정도밖에 읽지 못한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면 어찌해야 한다 생각하는가?”
시현이 묻자 실리카가 웃음을 지었다. 짧은 사이 형태가 선명해진 석상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가 제 몸에 두른 흰 천을 풀어 헤쳤다. 가슴 한가운데에 꽃이 핀 듯한 형태의 나선무늬가 드러났다.
“우리 자신을 네게 맡길게. 원천으로 보내줘. 우리의 힘이면 사출구가 사라질 때의 충격을 상쇄하고도 남을 거야.”
시현의 얼굴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그가 물었다.
“그건… 그래야만 할까? 너희 수십이 희생해서 얻을 기운이 광맥의 힘보다 클 것 같지 않다.”
“어머. 우리를 굉장히 과소평가하네.”
실리카가 놀리는 것처럼 말했다. 감람이 끼어들었다.
“걔는 우리하고 싸워 본 적이 있어서 착각하는 거야. 자아를 구성하는 부분만이 우리인 줄 알거든.”
“아, 그러면 착각할 수 있지.”
실리카가 시현에게 다시 말했다.
“내가 건네겠다고 하는 건 자아와 의지를 잊고 대지와 연결된 우리야. 여기 있는 우리와, 저기 잠든 우리와, 이전 시대에 자신을 잊고 지맥을 떠도는 수많은 우리까지. 조금만 생각하면 알 거야. 우리는 너희의 관점에서는 영원한 삶을 영위하고 남을 존재들이야. 고작 수천 년 응축된 마력석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지.”
“다 좋은데 그걸 네 맘대로 정해?”
땅딸막한 돌 인간이 투덜거렸다. 실리카가 그를 보았다.
“뭐 어때? 안 될 거 없잖아? 원천에서 사출구를 빼내는 건 다들 바라던 거고.”
“상관없긴 하지.”
땅딸막한 돌 인간이 말했다. 주위의 수많은 돌 인간들에게서도 불만이나 반대는 나오지 않았다.
시현은 여전히 확신을 못 가진 것 같았다.
“허나… 아직 내 가설이 실행 가능한지 확인해보지도 않았다.”
“응. 신중한 건 좋아. 하지만 너는 다른 인간들이 사출구의 존재를 알고 원천을 탐내는 걸 걱정하지 않았어? 그걸 생각하면 시간이 별로 없어.”
시현의 표정이 변했다.
“대운관군이 오고 있나?”
“누구인지는 몰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어. 이곳에서 멀지 않은 땅속 굴에도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어.”
무리 속에서 옛 왕조 시대의 조복을 입은 돌 인간 하나가 걸어 나와 덧붙였다.
“수백의 하늘인. 땅인 마법사들도 많다.”
하늘인 병사들이 수백이라면 산자락에 남겨놓고 온 청마대 외에도 더 많은 병사들이 와 있다는 뜻이었다.
시현은 당혹한 얼굴로 호란과 단을 보았다.
호란은 뭐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시현에게 다가가 소맷자락을 잡았다.
단이 말했다.
“대운관군이 아직 이곳을 발견한 건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서둘러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하. 그래. 이게 인간들이 서로 마음을 써준다는 거지. 오랜만에 보니까 훈훈한데.”
땅딸막한 돌 인간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너희가 마음 쓸 필요 없어. 우리는 죽는 것도 희생하는 것도 아니야. 단지 존재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뿐이야.”
“대순환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오히려 이쪽이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진작에 이렇게 했으면 좋았어.”
“내 생각도 그래.”
“애초에 왜 자아 같은 게 눈을 떴는지도 모르겠고.”
주위의 돌 인간들이 차례차례 말했다. 동의의 말과 아무 말이 웅성웅성 퍼져나갔다.
결국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리하마.”
실리카가 웃었다. 그의 다리가 형태를 잃으며 지면에 뿌리박혔다.
다른 돌 인간들도 차례차례 몸을 허물며 대지와 연결되었다. 기결의 불빛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깜박이고, 낮은 진동이 우릉거리며 공동을 흔들었다.
시현이 천천히 실리카에게 다가갔다. 실리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현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의 드러난 기결에서 팔을 타고 빛줄기가 죽 뻗어 내려왔다. 곧 펼쳐진 손바닥에 기결과 같은 빛무늬가 돋아났다.
시현은 천천히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감람이 기둥에 다가가 마력회로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원천과의 통로를 열게. 모두가 원천으로 이동한 다음, 핵에 별 이변이 없으면 곧바로 사출구의 회로를 끊을 거야.”
감람은 말하면서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곧 마력회로에 빛이 돌고 거대한 기둥에 서서히 금빛이 차올랐다. 금빛은 흰빛이 되었다가 천천히 먹물 같은 어둠으로 바뀌었다.
“사출구의 마력 이동 방향을 역전했어. 이제 시작해도 좋아.”
감람이 말한 뒤 기둥에서 물러났다. 그가 단과 호란에게도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호란은 시현의 얼굴을 보았다.
시현은 실리카의 손을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가끔 입술이 움직였지만 주문의 말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로 바꿀 길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는데도 이마에서는 이미 진땀이 배고 있었다.
단이 호란의 어깨에서 마력석 대련을 가져갔다. 호란이 쳐다보자 단은 말없이 턱짓만 한번 하고 뒤로 물러났다.
호란은 그 자리에 선 채 시현의 소매를 쥔 손에 괜히 힘을 주었다.
시현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가 실리카에게 물었다.
“남길 말 같은 것은 없는가?”
“누구에게 무엇을 남겨? 결국에는 모두가 같아질 텐데.”
실리카가 방긋 웃었다. 시현이 다시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실리카의 기결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빛은 불길보다 격하고 용암보다 붉었지만 열도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쉬지 않고 뻗는 빛이 둥글게 돌며 기둥 전체를 감쌌다. 곧 기둥 안의 새카만 어둠 속으로 빛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되돌아가라. 그대들이 원하는… 아니….”
시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주문 같지 않았다. 그나마도 중간에 끊겼다.
그래도 실리카의 가슴에서 끝없이 솟아 기둥을 향하는 빛은 멈추지 않았다. 기둥은 이제 빛으로 꽉 차올라 있었다.
“순리대로.”
시현이 작게 속삭였다.
다음 순간 실리카만이 아니라 모든 돌 인간의 기결에서 빛줄기가 폭발해 기둥을 향했다.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게 된 호란은 두 손으로 시현의 팔을 꽉 붙잡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