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 * *
“교문!”
호란이 악쓰듯 고함쳤다. 단도 위를 보고 얼어붙었다.
“운모! 그만둬!”
감람이 소리치면서 흙벽으로 손을 뻗었다. 감람의 손이 반쯤 형태를 잃으며 흙벽과 엉키자, 벽에서 솟던 빛과 파동이 훅 줄어들었다.
“허억….”
시현이 잔 신음을 내뱉었다. 호란은 시현을 꽉 붙잡으며 이름을 불렀다.
“시문 님! 시문 님!”
“괜찮… 윽.”
시현은 호란의 팔을 붙들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시 발을 헛디디며 축 늘어졌다. 의식은 있지만 현기증을 이기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와아. 마력을 진탕시키는 거, 기대보다 더 효과가 제대로인데. 진작 해볼걸.”
아래를 보며 운모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가 옆에 선 교연에게 물었다.
“너는 괜찮아? 범위 바깥이라도 여파가 없진 않을 텐데.”
“됐어. 견디기 어렵긴 했지만, 저렇게 발작을 하고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어.”
교연이 미간을 누른 채 불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운모가 호기심 어린 얼굴을 했다.
“민감함의 차이가 많이 크구나? 아무래도 시문은 재능이 독이 된 모양이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기로 한 일을 해.”
교연이 싸늘한 소리로 말했다. 운모는 싱긋 웃고 아래쪽으로 손을 휘저었다. 쿠릉 땅이 울리고 다시 지면에서 빛이 솟으려 했다.
“큭…!”
감람이 다른 한 손을 벽에 붙여 한 번 더 파동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그가 위를 보고 운모를 향해 외쳤다.
“그만둬, 운모! 시문은 나와 다른 동료들을 도와줬어! 그리고 나는 시문과 약속했어,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그게 중요해?”
운모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차피 너는 묘지가 완전히 닫힌 뒤엔 다시 잠들 거잖아. 이제까지 일어난 일을 모두 잊고, 우리를 잊고, 너 자신조차 잊을 거잖아. 그러면 인간하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상관없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감람이 고함쳤다. 감람의 눈동자에 금색 빛이 돌자 주위의 대지가 성난 듯 우웅 울었다.
운모가 놀리듯 말했다.
“무리하지 마, 감람. 넌 언제나 남과 다투는 데는 소질이 없었잖아. 너도, 다른 한쪽도.”
그리고 감람의 두 팔과 연결되어 있던 흙벽이 쿨렁 물결치더니 그대로 감람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
감람은 급히 땅과의 연결을 풀며 물러나려 했지만 발밑이 쑥 빠졌다. 사방에서 흙과 돌이 모여들어 감람의 몸에 엉켰다.
얽힌 곳에서부터 감람의 몸과 흙벽의 경계가 사라져갔다. 마치 대지가 감람과 동화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 마! 운모!”
감람이 발버둥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둘 중 누구의 힘인지, 쿠르릉 소리와 함께 주위가 거칠게 흔들렸다. 지면의 틈새가 더 크게 벌어지면서 여기저기서 흙과 바위가 굴러떨어졌다.
“큭…!”
감람이 이를 악물었다. 기색만 보아도 그가 확연하게 열세였다. 감람이 호란에게 소리쳤다.
“안 되겠어! 너희끼리 도망쳐!”
“도망치라니, 어디로?”
호란이 황급히 되물었지만 감람은 답할 틈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호란의 팔을 잡은 시현의 손에 약하게나마 힘이 돌아왔다.
“호란….”
“시문 님! 괜찮으세요?”
“…버틸 수 있다.”
시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마력석 대련을 끌어안고 있었다.
대련의 천 안쪽에서 마력석이 타들어 가는 열기가 느껴졌다.
시현이 한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있거라. 내가… 저쪽 산면을 향해 길을 내겠다.”
“지금 주문을 쓰실 수 있어요? 무리하시는 게….”
호란은 중간에 말을 멈추었다. 시현을 말리고 싶어도 호란 혼자서는 상황을 돌파할 길이 없었다.
호란은 짧게 입술을 물었다 떼고 단을 불렀다.
“단! 단!”
호란의 외침에 단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이쪽을 보았다. 그는 그때까지 벼랑 위쪽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해? 이쪽으로 와! 어서!”
“아, 응….”
단이 반쯤 얼이 빠진 것처럼 말하고 주춤주춤 뒤로 빠졌다.
단이 선 장소는 시현이 주문을 쓰려는 방향에서 벗어난 자리기는 했다. 하지만 쓸데없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서는 게 호란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초조해진 호란은 다시 한번 단을 부르려고 했다. 그때 위로부터 살기가 느껴졌다.
철퇴처럼 떨어지는 적의 공격을 피해, 호란은 시현을 끌어안은 채 크게 뒤로 뛰었다. 쾅 소리와 함께 섰던 자리에 금이 쭉 갔다.
집중하던 도중에 머리가 흔들린 시현이 신음을 뱉는 것이 들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뛰어 내려온 것은 운모였다. 바닥에 팬 균열에서 발을 빼내면서 운모가 호란과 단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디 보자. 그래, 너희 둘. 시문도 시문이지만, 다른 두 명도 우리에게 문제 될 일을 많이 일으켰다지.”
운모는 둘 사이에 선 채 양쪽에 번갈아 눈길을 보냈다. 마치 물건을 고르는 듯한 태도였다.
운모가 느긋하게 말했다.
“산 채로 넘겨주기로 약속한 건 시문뿐이니까…. 너희 둘은 이 자리에서 정리할까.”
“운모, 안 돼…! 약…속….”
벽 쪽에서 감람이 저지의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신체의 대부분을 지면에 먹힌 상태였다.
운모는 거의 제압된 감람에게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호란에게 와 있던 운모의 시선이 천천히 반대편으로 옮겨 가 고정되었다.
호란이 안 된다고 외칠 틈도 없이, 운모가 단을 향해 사뿐하게 한 발을 내디뎠다.
“단!”
호란에겐 선택의 여지도 계산할 틈도 없었다. 그는 부축하고 있던 시현을 놓고 그대로 운모에게 내달렸다.
단 쪽으로 장난치듯 손을 뻗고 있던 운모가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돌았다. 딱딱한 손바닥이 호란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호란의 한쪽 주먹을 덫처럼 움켜쥔 채, 운모가 빙긋 웃었다.
“생각대로 움직이는 아이구나. 아주 착해.”
호란은 다음 공격을 하지 못하고 굳어졌다. 운모의 몸에는 칠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돌 인간의 온몸이 분화하는 듯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운모가 움직였다. 다른 한 손이 손날 모양이 되어 호란의 배를 향하는 동작이 호란에게는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정이여, 일어나 맥동하라!”
운모의 손이 호란에게 닿기 전, 등 뒤에서 시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표정이 변한 운모가 호란의 주먹을 놓고 시현을 향해 한 걸음을 디뎠다.
그때에는 이미 호란의 발밑 지면이 산산이 깨어지고 있었다. 아래로부터 세상을 다 휩쓸 듯 격한 힘이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호란은 몇 발짝 앞에 있는 단을 감싸기 위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멍청아, 나한테 오지 마!”
단이 고함쳤다. 시현을 보호하라는 뜻이었겠지만 호란은 큰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이제부터 덮칠 힘 앞에서, 자기의 작은 몸이 누구인들 지킬 수 있을까?
회의를 품을 틈도 길지는 않았다. 발아래와 등 뒤로부터 힘이 밀려들었다. 그보다 한발 앞서 빛인지 어둠인지 모를 무언가가 자신과 단을 감쌌다.
눈앞이 어두워지기 직전, 호란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사람의 품을 떠올렸다.
* * *
의식이 끊겼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호란은 잔돌이 구르고 땅이 울리는 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단! 시문 님?”
뛰어오르듯 몸을 일으키고서, 호란은 자신이 무너진 산비탈의 끄트머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앞에는 심산의 한쪽 면이 완전히 무너져 편평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갈색과 검은색 흙 위로 크고 작은 돌덩이가 계속 미끄러지는 것이 보였다.
호란의 옆에는 단이 있었다. 그 역시 창백해진 얼굴로 무너져내리는 산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둘 다… 다치지… 않은 것 같군….”
“감람?”
호란이 뒤를 돌았다.
등 뒤에는 지면에서 솟아난 거대한 흙인형 같은 것이 있었다. 머리와 상체, 두 팔밖에 갖추지 못한 그 형체는 단과 호란을 지키듯 두 팔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 외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바위와 수풀, 드문드문한 소나무 숲뿐이었다. 산면에는 그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호란은 심장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흙으로 된 형체에 달려들었다.
“너 감람이지? 시문 님은? 시문 님은 어디 계셔?”
호란의 손이 닿자 흙인형의 팔이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약속… 을… 지켰….”
말을 잇는 것만으로도 입술과 턱에서 흙이 흘러내렸다. 감람으로 추정되는 형체는 스륵 허물어지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어버렸다.
“감람? 감람! 시문 님은 어떻게 됐어? 감람!”
호란이 경악해서 외쳤지만 흙무더기에선 더 이상 답이 없었다. 호란은 망연해져서 비틀비틀 무릎을 꿇었다.
“아아아아악!”
옆에 주저앉아 있던 단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가 땅바닥에 거세게 주먹을 내리쳤다.
“시발! 빌어먹을! 위교연!”
“단?”
놀라는 호란을 단이 홱 돌아보았다. 눈이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왜 나 같은 걸 감쌌어? 뭐하러 그랬어?”
“단, 좀 진정해…!”
“구할 거면 시문을 구해야 할 거 아냐! 나 따윌 데리고 뭘 한다고! 위교연이 코앞에 있었는데!”
말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호란은 손을 뻗었다. 최대한 느린 동작으로 단의 입을 틀어막고 바닥에 지그시 눌렀다.
호란이 낮고 감정을 지운 소리로 말했다.
“단. 나한테 화내도 되고 욕해도 되는데, 그렇게 큰 소리로 고함치지 마. 잊었어? 이 산에 대운관군이 잔뜩 있다고 돌 인간들이 그랬잖아.”
대운관군이란 말이 나오자 단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호란은 시근거리는 그의 숨결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팔을 풀었다.
호란이 물러났는데도 단은 곧바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탈함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호박색 눈동자가 탁한 빛을 띠었다.
그가 누운 채 갈라진 소리로 말했다.
“넌 멍청한 짓을 한 거야.”
“뭐가.”
“몰라서 물어? 교문이 뭘 노리는지가 뻔하잖아, 거기서 나리님을 내팽개치고 나한테 오면 어쩌자는 거야?”
“단. 그때 내가 최선의 판단을 못 했을 수는 있어. 하지만 난 운모가 널 죽이려는 걸 막은 거야. 그걸 가지고 나한테 화를 내는 거면, 진짜 멍청이는 너야.”
호란은 뒤집어지는 속을 억누르며 말했다.
시현을 생각하면 호란도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럴 땐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일단 상황을 넘기고 나면 감정은 나중에라도 풀 수 있었다.
호란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서 말했다.
“운모가 한 말 들었어? 시문 님을 산 채로 넘겨주기로 약속했다고 말했어.”
“어. 들었어.”
“약속 상대는 당연히 교문이겠지. 놈들의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시문 님을 죽일 생각은 없는 거야. 시문 님이 붙잡히셨더라도 살아계실 거야. 우리가 이제부터 구해드리면 돼.”
“위교연은….”
단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호란이 다시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시문 님이랑 헤어진 데가 어디야?”
“시발,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단이 한숨 섞인 소리로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걸낭을 열고 나침반과 지도를 꺼내 짧게 들여다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제 몸처럼 끌고 다니는 걸낭 두 개를 다 가진 채였다.
조금 후 단이 지도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일단 장소 옮겨서 몸을 숨긴 다음에 생각하자. 대운관군 놈들이 어디서 나올지 모르니까 이렇게 트인 데 있으면 안 돼.”
“응.”
호란이 답하자 단은 곧바로 척척 걷기 시작했다. 화가 났든 돌았든, 단은 길을 찾는 일에서는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막막하고 절망적인 와중에 그나마 그게 구원이었다.
시문 님을 지키지 못했다. 몫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문 님이 무사하시기만 하다면 어떻게든 구해낼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단이 방법을 찾아줄 것이다.
호란으로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