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34
234화
* * *
말하는 동안 단은 그저 패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패를 싸는 비단 보 따위는 필요 없었다.
태청은 문령패가 그에게 건네줄 명분과 권위를 세상 누구보다 원하는 자였다. 진흙밭에 조약돌을 굴려 놔도 그것이 문령패라 하면 알아서 광채를 볼 터였다.
태청은 불태워버릴 듯한 시선을 패에만 꽂고 있었다. 공기가 따끔따끔해질 정도의 긴장이 전해졌다.
잠시 후 태청이 움직였다. 그는 단과 저 사이의 큰 탁자를 손끝으로 가볍게 밀어 치우고 빈 공간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허리를 세운 채 무릎을 꿇었다.
“대운관의 태청, 문령을 받들겠다.”
그리고 태청은 이마가 땅에 닿도록 패 앞에 절했다.
단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엄중했으나 속에서는 달성감과 열패감이 뒤엉켜 폭발할 것 같았다.
이게 되는구나. 이렇게 쉽구나.
위교연이 달마다 무고한 사람의 시체로 광장을 메우는 동안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있는 법을 무시해도, 없는 법을 만들어도 주위에서 즉각 명분을 붙이고 포장해 주었다.
벼슬하는 고관이나 길거리 품팔이꾼이나 하는 말은 똑같았다. 위에서 하는 일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원래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고,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입을 모았다.
사람들이 교연을 싫어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교연의 잘못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전부 알면서도 그것들이 아무 상관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돌덩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교연에게 위를 거슬렀다는 딱지가 붙는 순간 이렇게 쉽게 판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단은 제 입에서 대역죄로 누구를 벌하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대상이 교연이라니 말조차 되지 않았다.
시문이 아니라 시문이 갖고 다니던 돌 조각만 팔아도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이제껏 교연의 것인 줄 알았던 거대한 권력과 권위는 사실 교연의 것이 아니었다. 시현의 것조차 아니었다.
폭소가 나올 것 같았다.
태청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는 무릎 걸음으로 단에게 다가와 두 손을 내밀었다.
검은 눈동자는 조금 전의 불꽃 같던 열기를 잃고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결심의 순간은 지나가고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단은 최대한 정중하게 태청에게 패를 넘겼다.
“받들었다.”
태청은 말하고서 훌쩍 일어섰다. 이제까지의 정중한 동작이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한 가지 충고를 하지. 다음에 또 대언의 역을 지게 되면 그에 맞는 법도를 미리 익혀두어라. 최소한 문령을 입에 올릴 때 얼굴을 가려라.”
“말씀 감사합니다만 굳이 배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누구에게 이런 영을 전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요.”
“그 말은 내 마음에 꼭 드는군. 역시 눈치가 있는 놈이다.”
태청이 슬쩍 웃고 문령패를 제 품에 넣었다.
태청은 단이 내세운 문령이 실제 시현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시현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면 자신은 저절로 문령의 보위자요 무상의 첫째가는 공신이 될 것이다. 만약 실패하면, 그때에도 문령이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게 될 것이다.
태청은 별당 문을 열었다. 별당 사방에는 유백과 백사대가 한 사람씩 거리를 두고 서서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아별! 가마를 준비해서 금화도감 제조 문씨 고예 어르신을 모셔 와라. 지금 시간이면 대궐이 아니라 댁에 계실 거다.”
“예. 뭐라 말씀드리고 초청합니까?”
“저택의 정원 단장이 끝났고, 찾으시던 남포석 벼루도 얻었으니 구경 오시라 해라. 다만 뵌 다음 시급하고 은밀한 일이라고 몰래 귀띔해 드려라.”
“예.”
백사대 한 사람이 바로 움직였다. 태청은 그 외에도 몇 가지 명을 더 내리고서 문을 닫았다.
태청은 탁자를 도로 방 중앙으로 당기고서 의자에 앉았다. 그가 단에게 턱짓했다.
“앉아라.”
“예.”
“시문께선 태화관 3층 벽란실에 유폐되어 계신다. 남방군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다.”
“예.”
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청은 낮은 소리로 대운궁과 태화관의 경비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은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애써야 했다.
단이 알기로 교연은 집착과 통제욕이 심했다. 그가 시현을 제 손이 바로 닿는 태화관에 가뒀을 것은 이미 짐작한 일이었다.
태청에게 망설임 없이 문령패를 넘겨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운궁 내부에서 무엇을 도모하려면 남방군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태화관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문령패든 뭐든 써서 땅인들, 특히 내궁의 경비를 담당하는 땅인들을 끌어들여야 했다.
단은 문령패만 넘겨주면 그 뒤는 태청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청이 금화도감을 입에 올렸을 때는 탄성이 나올 뻔했다. 쾅쾅대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금화도감은 대궐의 소방을 담당하는 곳으로, 대운궁 안 각 건물의 배치도와 내부도를 전부 가지고 있는 부서였다. 한때 단이 연줄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바늘조차 들어가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도감의 책임자가 태청에게는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관료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게 교류를 맺어둔 사람이 고관부터 말단까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시현이 갇힌 장소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을 보면 태화관 내부에도 태청의 사람이 여럿일 것이다.
단이 교연을 멍청하다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교연은 누군가를 숙청할 때마다 상대의 재산과 이권을 몰수해다 주위에 뿌렸다. 떡고물을 탐내 공포정치에 동조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교연은 자신이 그들을 통제하고 있다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정치가 지독해질수록 대운관의 관인과 군인들은 한 사람 빠짐없이 파벌을 짓고 촘촘하게 결탁했다. 목에 칼날이 들어오려 할 때 서로 감싸고 반대파를 탓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교연이 멀리하는 하늘인들은 목숨을 걸고 줄을 댔다. 교연에게 다가갈 수 없으니 다른 땅인들에게 매달렸다.
교연이 뿌려준 부와 권한은 휘하들이 서로서로 뇌물을 먹이고 뒤를 봐주는 데 쓰였다. 그 하나하나가 교연이 노심초사 쌓아올린 체제에 구멍을 만들었다.
대운관의 세도가치고 사방군 중 어느 한쪽을 제 사병처럼 부리지 않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인들은 교연이 아닌 다른 땅인들과 운명 공동체가 되어갔다.
전부 교연이 자초한 일이었다.
되돌아 생각하면 남운관의 함경재는 눈 아래 사람이 없는 세도가치고 꽤 영리한 축이었다.
경재 역시 하늘인을 싫어하고 경멸했다. 그 사실을 숨긴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추선 딱 한 사람을 곁에 두어 이를 무마했다.
남운관의 하늘인들은 매번 경재에게 내쳐지고도 그게 제가 하늘인인 탓이 아니라 추선보다 뒤떨어지는 탓이라 생각했다. 추선이 누리는 총애를 보면서 더욱더 경재의 눈에 들고자 애썼다.
그에 비하면 교연은 얼마나 멍청한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이 보기에 위씨 교인이란 사람은 언제나 멍청하고 무능하고 시야가 좁고 불안과 두려움에 차 있었다.
그렇게 못난 자인데 그런 자를 상대로 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도록 짓밟히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단은 이제까지와 다른 자리에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자신이 혐오하는 모든 것에 몸을 담갔다.
문이 만인지상임을 내걸고, 위를 거스르는 자는 죽어야 한다 외치고, 교연 밑에서 전횡해온 군인과 관리를 디딤돌로 삼았다.
그게 먹혔다.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되었다. 스무 걸음 거리면 되었다.
문밖에서 태청의 부하가 금화도감 문씨 고예의 도착을 알렸다.
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물러났다. 흥분이 지나쳐서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아직은 억눌러야 했다.
속을 숨기는 것은 늘 하던 일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때가 온 뒤에는 아무것도 참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 * *
단이 한의 집에 돌아온 것은 밤이 새카맣게 깊어서였다. 광 안에 단이 발을 들인 순간 호란은 털썩 주저앉았다.
“단, 속이 타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
호란이 거의 울먹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단이 문을 닫았다.
“목소리 줄여. 한이 형 시켜서 전달했잖아. 늦을 거라고.”
“늦는다는 말 그거 하나뿐이었잖아! 얼마나 늦는지도 모르고,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모르고, 당장 단이나 시문 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광 바닥에 주저앉아 하소연하는 호란을 보고 단은 미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최소한 너한테는 유등이 있잖아.”
“응?”
“아니야. 지도는 다 외웠어?”
“다 외웠어.”
호란이 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하루 종일 들여다보았는지 손에 잡았던 자리가 번지고 구겨져 있었다.
“다 외웠는데 왜 안 없앴어? 그거 어디 흘리기라도 하면 이 집 한 살 애기까지 다 죽어.”
“아, 지금 태울게.”
“아니야. 줘봐.”
단은 호란의 손에서 지도를 가져가 낮에 썼던 제도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흑필을 들어 지도 위 비었던 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얗던 궁궐 내부가 차례차례 건물과 담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고 호란은 눈을 크게 떴다.
“궁궐 내부도야? 태청한테서 얻은 거야?”
“말 시키지 마. 까먹기 전에 다 그려야 돼.”
호란은 두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숨소리까지 삼켰다.
묻고 싶은 것이 산 같았지만 낮과 같은 초조함은 이제 없었다. 단이 하루 사이 이런 정보를 얻었다는 것은 태청과 이야기가 잘되었다는 뜻이었다. 시현에 대해서도 알아냈을 거였다.
단의 손은 빨랐지만 아까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궐내의 절반쯤은 채우지도 않고 비워두었다. 필요 최소한의 건물 배치만 표시한 뒤 단은 색연필을 꺼내 궁 안팎의 여기저기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표시를 마친 단은 지도를 집어 호란에게 내밀고 판 위에 새 종이를 펼쳤다.
호란은 외우라는 뜻으로 여기고 지도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단이 새로 그리고 있는 도면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단이 그리고 있는 것은 한 건물의 내부도였다. 건물 한쪽에 날개 펼친 듯한 형태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호란은 결국 질문을 참지 못했다.
“이거 태화관이지? 여기 시문 님이 계신 거야?”
“그래.”
단은 짧게 답하고 계속 도면에 집중했다.
호란은 펄쩍 뛰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시문 님이 살아 계셨다!
그거면 되었다. 시현이 살아만 있다면 호란에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단이 알려줄 것이다.
호란은 더 이상 다른 생각을 그만두고 지도에 시선을 꽂았다.
“여길 봐.”
지도 외우기에 열중했던 호란은 단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짧은 사이 태화관 내부도가 완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면에 올라 있는 것은 3개 층뿐이었다.
“왜 그림이 셋뿐이야? 태화관은 6층 아니었어?”
“나리님이 3층에 계시니까. 그 위층은 필요 없어. 질문하지 말고 듣기부터 해. 시간이 별로 없어. 한 시진쯤 있다가 바로 들어갈 거야.”
“오늘 밤에? 바로?”
“그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