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 * *
호란은 자신이 이제껏 그 생각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단은 복수를 원할 것이다.
호란 역시 단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다. 교연에게 복수할 것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현의 생사를 확인하고 구해낸 다음의 일이었다. 시현만 무사히 돌아온다면 교연에 대한 복수는 쉽게 할 수 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단은 그렇지 않았다. 단이 시현이나 호란의 도움으로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한참 전에 무엇이든 말했을 것이다.
그는 반대로 행동했다. 대운관에 머무는 동안 단은 교연을 완전히 모르는 척했다. 단은 내내 이 문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단은 태청을 통해 교연의 반대파와 접촉하고, 태화관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대운궁과 태화관 경비의 허점을 찾아냈다. 그 외에 또 호란이 모르는 무엇을 했을지 모른다.
그것은 태화관에 갇혀 있는 시현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교연에게 접근하기 위한 길이기도 했다.
호란은 단이 대운궁 처소의 수렛간에 총통이 든 함을 묻었던 것도 떠올렸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단의 말에 생각나는 일은 해 보라고 말한 것은 호란 자신이었다.
이제 단에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해도.
단에 대해 더 생각했어야 했다. 단의 감정에 대해.
호란이 얼어붙어 있자 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고통으로 기진맥진해져 있었지만 호란의 경악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호란은 억지로 시현에게 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시문 님. 이제 빠져나갈게요. 흔들릴 때 아프시더라도 참으셔야 해요.”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호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호란은 시현을 안아 든 채 조심스레 벽란실을 나왔다.
지금 자책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시현을 데리고 탈출한 뒤 단을 찾을 것이다. 이제까지 대로라면 탈출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호란은 기색을 죽이고 계획된 탈출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빈 복도를 다 빠져나오기 전에 가던 방향에서 사람 모습이 나타났다.
“누구냐!”
덩치 큰 반민 경비병 여러 사람이 호란을 보고는 소리치며 달려왔다.
호란은 당황하지 않고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를 대비한 제2, 제3의 탈출로도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반민 경비병들이 호란의 달음질을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경로를 잡아도 얼마 못 가 다른 경비병들이 나타났다.
경비병들의 숫자는 점점 늘었다. 호란은 이 복도 저 복도로 내달렸지만, 아래층에 도달했을 때는 사방이 거의 가로막혀 있었다.
어느새 태화관 안팎에 훤하게 불이 밝혀졌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되면 눈감아주기로 했던 법군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껏 경비병들과 충돌을 피해 움직이려고 한 보람이 없었다.
“저쪽이다! 잡아라!”
정문 쪽에서 무기를 꼬나든 반민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것을 보고 호란은 할 수 없이 남은 한 방향으로 내달렸다.
반민 경비병 따위 아무리 많아도 호란의 적은 아니었지만 안아 든 시현이 문제였다.
호란은 내심 후회했다. 처음에 들켰을 때 한두 놈을 걷어차 버리고 창이든 벽이든 부수고 뛰쳐나갔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벽란실에서 시현을 구했을 때 들키는 걸 감수하고 창으로 뛰쳐나왔어야 했다. 그쪽도 위험은 컸겠지만, 최소한 그렇게 도망치는 건 호란의 특기 분야였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단이 경비병들과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단이 하라는 대로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렸기 때문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빈 회의장을 가로지르고 큰 복도를 지나 호란은 태화관 한쪽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앞으로 더 가면 어찌 됐든 바깥이었다.
소란을 떨면서 호란을 쫓아오는 것은 아직 반민 경비병들뿐, 들키면 나타날 거라던 법군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전방의 화려한 장식문은 외부와 통하는 곳인데도 이상하게 경비병이 없었다. 마치 함정 입구처럼 보였다.
알면서도 호란에겐 전진 외의 선택이 없었다.
“시문 님, 저한테 얼굴 묻으세요!”
호란은 소리치면서 한 발을 앞으로 쭉 뻗어 문을 걷어찼다.
색유리가 산산이 깨지고 단단한 나무 문틀이 빠그라지면서 앞으로 나가떨어졌다.
문 바깥은 수없이 켜둔 횃불로 대낮처럼 밝았다.
눈앞에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태화관 앞뜰이 펼쳐져 있고, 그 뒤에 높다란 담벼락이 서 있었다.
직선으로 달려 담벼락을 뛰어넘으려던 호란은 목덜미를 때리는 예감에 급히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수 발의 벼락이 호란의 앞에 벽을 치듯 떨어졌다.
“멈추어라!”
“죄인은 꼼짝을 말라!”
불호령은 위쪽에서 들려왔다.
호란은 시현을 꼭 안아 제 품에 붙인 채 천천히 돌아섰다.
색색 포석이 깔린 뜨락 양옆으로, 앞에는 웅장한 태화관이 섰고 그 양편으로 여섯 층 공중 회랑이 팔을 벌리듯 좌우를 가로막고 있었다.
호란은 두 사람은 궁궐 바깥담에 면한 태화관 앞뜰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연과 시현이 거닐던 회랑에는 법군과 병사들이 깔려 있었다.
처형장이 있을 담벼락 너머로부터도, 뜨락 주위로부터도 병사들이 속속 나타나 호란을 포위했다. 비상시라선지 평소 태화관에 접근할 수 없다는 하늘인 병사들이 다수였다.
공중 정자 3층에 선 법군 한 사람이 호란에게 소리쳤다.
“죄인은 순순히 투항하라! 당장 위에게서 손을 떼어라!”
마치 시현을 다치게 한 것이 호란이라는 말투였다.
막막한 와중에도 호란은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소리쳤다.
“죄인은 너희야! 시문 님을 해친 건 위씨 교인이야!”
“이놈! 피칠갑된 두 손이나 감추고 말하여라 이 대역무도한 것아! 네가 궁에 침입하여 극상을 납치하고, 일이 틀어지자 흉수를 뻗은 것을 우리 모두가 보았는데 어찌 그리 뻔뻔하게 거짓을 말하느냐!”
옆에서 다른 법군도 소리쳤다.
“더 이상 죄를 늘리지 말라! 당장 위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겠느냐!”
법군들은 번갈아 목소리를 키우며 호통을 쳤다. 시현을 가둔 것도 해친 것도 모두 호란에게 뒤집어씌울 속셈인 것 같았다.
그런 건 무섭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에게 보일 명분 쌓기가 끝나면 곧바로 체포 명령이 떨어질 것이고, 호란에겐 당장 포위를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차오르는 절망과 싸우던 중에도, 호란은 뚜렷한 시선 하나를 느끼고 위를 보았다.
어느새 태화관 5층의 큰 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창가에 선 인영은 교연이었다. 길고 치렁치렁한 금색 머리칼, 새하얀 장포가 사방에서 일렁이는 횃불 빛을 받아 희게도 노랗게도 빛났다.
하지만 가장 환하게 빛나는 것은 교연의 웃는 얼굴이었다.
교연은 이제까지 호란이 본 중 가장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가는 환희로 올라가고 두 눈은 별처럼 빛났다.
항상 처형장을 내려다보던 바로 그 자리에서 시현이 궁지에 몰린 모습을 보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였다.
교연은 기쁨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옆에 선 시종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아래를 손가락질하며 창밖으로 몸을 조금 뺐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32. 잿더미
수런거리던 뜨락은 총성과 함께 죽음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사이를 두고 총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두 번째 총성이 울렸을 때는 이미 교연의 몸이 앞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얀 형체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창 아래로 추락했다. 짧고도 긴 그 순간 아무도 소리 내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땅에 떨어진 신체는 퍽 소리를 내고 튀어 오른 뒤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왜 죽는지 누구에게 죽는지 모르고 죽었다.
적막은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깨어졌다.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이 들렸다. 주위의 병사들이 살기에 차서 무기를 꼬나들었다. 하지만 명령이 없어선지 교연의 시신이나 호란에게 바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호란은 고개를 들어 총성이 났던 곳을 보았다.
공중회랑 6층에 장총을 쥔 단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단의 뒤로 횃불을 든 하늘인 병사 여럿이 나타나 주위를 훅 밝혔다.
그 앞에 장군복을 차려입은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걸어와 섰다.
“모두 멈춰라!”
하늘과 땅을 한 번에 뒤흔드는 우렁찬 목소리가 태화관 앞뜰에 퍼졌다.
태청이 소리쳤다.
“교문은 죽었다! 이제 세상에 문은 시문 한 분밖에 없다! 모두 무기를 내리고 시문 주위에서 물러나라! 함부로 문께 범접하려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대역으로 다스릴 것이다!”
포위를 좁혀오려던 병사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대운관에서 대역이란 말은 사람을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태청이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죄인 위교연은 감히 문을 참칭하고 마력석을 독점하며 난시에 백성을 돌보지 않았다. 또한 완씨 시문께서 이 일을 질책하시자 감히 위를 거슬러 시문을 해하려 했다. 이에 시문의 명을 받들어 대역죄인 위교연을 벌하고 위아래를 바로잡고자 한다!”
태청이 쐐기를 박았다.
“이것이 문령을 증거하는 명령패다! 세상에 하나뿐인 문령패다!”
시현의 명령패가 태청의 손에서 높이 치켜 들렸다. 횃불 불빛에 옥이 지닌 여러 빛깔이 언뜻언뜻 보였다.
태청의 말이 끝나자 회랑 위아래에 있던 땅인들이 모두 호란과 시현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문령을 받듭니다!”
“무상 완씨 시문의 문령을 받듭니다!”
그중에는 직전까지 호란이 시현을 해쳤다며 으르대던 자들도 있었다.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엎드리는 이들이 반,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이들이 반이었다.
태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이제 위교연과 함께 대역에 가담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간신배를 처단할 차례다! 우리와 뜻을 함께할 이들은 총령부로 가자!
또한 그간의 사정에 밝은 이들은 당장 위교연의 거처를 수색하라! 그가 횡령한 마력석을 감춰 둔 곳을 알아내는 자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이 말에 태청을 따르지 않는 병사들의 눈빛도 변했다.
말이 수색이지, 대놓고 내려진 약탈령이었다. 태청의 입장에서는 사전에 편을 맺지 않은 병사들, 특히 저와 파벌이 다른 병사들을 제 편으로 돌리는 데 그만한 방법이 없었다.
태청을 따르는 병사들이 벼락같이 함성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병사들도 약탈에 한몫 낄 생각이든, 대역에 얽히기 싫어서든 뜨락을 빠져나갔다.
태화관 안쪽에서도, 담벼락 바깥에서도 함성과 소란이 들려왔다. 교연의 파벌과 태청의 파벌, 수도경비대와 남방군이 각각 충돌을 시작한 것 같았다.
시시각각 상황이 급변하는 사이 호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회랑에 선 단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이 태청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하늘에 닿을 공을 이루셨습니다. 문께서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태청이 제 손에 쥔 명령패에 시선을 보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명령패를 도로 제 품에 넣었다.
그가 형형한 눈으로 단에게 말했다.
“약속을 잊지 말아라.”
“어찌 잊겠습니까. 제 짧은 목숨줄을 나리께서 쥐셨습니다.”
그리고 태청의 목숨줄은 시현이 쥐고 있었다.
태청이 아무리 강하고 인망이 있어도 다른 사방장군과 이번 일에 가담하지 않은 땅인에게도 각자 가진 힘이 있다.
명분 없이 대운관을 통째로 삼킬 몫은 태청에게 없었다. 누구에게도 없었다.
이미 사전에 움직일 계획이 서 있었는지, 태화관에 있던 법군들과 태청은 저마다 휘하를 이끌고 반대파를 급습하러 떠났다. 태화관 뜨락에는 태청이 남겨든 남방군 수십만이 주위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백 발자국의 법도 때문인지 호란과 시현에게 접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교연의 시신도 방치된 채 그대로였다.
회랑의 바깥쪽 계단을 내려온 단이 뜨락에 들어와 천천히 호란 쪽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장총 형태의 총통 두 정이 들려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