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38
238화
* * *
다음 날 오전, 호란은 좀 지친 채 처소 한쪽 석조 정자의 돌탁자 앞에 앉아있다.
내내 힘들어하던 시현이 겨우 잠든 참이었다. 의원도 의법사도 왔다 갔지만 차도가 기대만큼 크지는 않았다. 감염 증상도 있다고 해서 더 걱정이었다.
시중꾼이 방에 아침상을 들여준 지 한참이 되었지만 먹을 생각이 안 났다.
멍하니 앉아만 있는데 새벽부터 모습이 안 보였던 단이 처소 뜨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처음 보는 자흑색 중치막 차림이었다. 신에 흙이 많이 묻은 걸 보면 대궐 밖까지 나갔다 온 모양이었다.
단의 발걸음은 거칠었다. 얼굴도 온통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뜨락에 선 채 광다회를 아무렇게나 직직 당겨 끄르던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보았다.
단은 호란과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그가 성큼성큼 석조정자로 다가왔다.
“내가 뭘 보고 왔게? 교인의 머리통이 광장에 걸렸어. 태화관 앞마당 말고 대광장. 선대 태상사 위진선 시체도 관짝에서 끌려 나왔고. 뭐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만.”
“아, 응.”
호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이제 정말로 다 끝난 거구나….”
“일단 교인 쪽은 그렇지. 태청하고 그 무리는 또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교인은 확실히 죄인으로 못 박힌 거잖아. 잘됐어.”
“그렇게 생각해?”
단은 싱긋 웃더니 돌탁자 건너편에 털썩 앉았다.
“근데 어째, 너는 잘된 얼굴이 아니다?”
호란은 시선을 약간 떨어뜨렸다.
“시문 님이 걱정돼서 그래. 다치신 게 너무 심해서….”
“뭐야, 의법사 아직도 안 왔어? 태청이 해 뜨자마자 보내주겠다고 철석같이 얘기했는데.”
“왔어. 왔는데…. 의법사 말로는 마력석을 쓰더라도 한 번에 낫게 할 수가 없대. 상처가 많기도 하고, 교인이 이 며칠간 시문 님한테 안 좋은 쪽의 의법술이랑 약을 쓴 것 같다고. 몸속 기운의 흐름이 엉킬 수 있다고…. 사실 나는 설명을 잘 이해 못 했는데. 어쨌든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쳐야 한대.”
호란이 풀 죽은 소리로 말했다. 단의 눈썹이 꿈틀했다.
“고칠 데가 많아 봤자 대부분 외상이잖아. 대의약방 상격 의법사가 손도 못 쓸 정도는 아닐 텐데. 태청 이 새끼, 지들 파벌 싸움 하느라 무슨 돌팔이를 보냈나?”
“점심 때 또 올 거라고는 했어.”
“몇 번을 오면 뭐 해, 제대로 된 놈을 보내야지.”
단은 짜증스럽게 말하면서 겉옷 앞섶을 훌훌 풀어 헤쳐 저고리를 드러냈다.
호란은 여전히 조금 멍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늘상 하던 행동이 지금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시선을 느낀 단이 호란을 보았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호란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단의 표정이 비뚜름해졌다.
“아니, 너 나한테 할 말 있잖아. 어제부터 계속.”
“별거 아니야. 지금은 신경 쓰지 마.”
“나중에는 신경 써야 된다는 얘기?”
“지금은 괜찮아. 정말로.”
호란이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고 단이 픽 웃었다.
“너, 그렇게 티 내는 거나 처음부터 말로 하는 거나 결국 마찬가지라고.”
그가 탁자에 두 팔을 올리고 호란을 보았다.
“왜 그러는데. 위험한 다리를 건너긴 했지만 모든 게 다 뜻대로 됐잖아? 너는 나리님을 구했고, 나는 교인을 죽였고, 이만하면… 다 잘된 것 아니야? 너 평소 하는 식으로 말하면.”
“응. 나도 모든 게 다 잘됐다고 생각해.”
“그럼 뭐가 문제야?”
단이 물었다. 평소보다 살짝 말이 빨라서, 호란은 단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호란은 얼굴을 흐렸다. 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고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교연에게 복수하는 게 단에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란 걸 알았다. 복수에 성공했다고 해서 해묵은 마음이 바로 풀릴 리 없다는 것도 알았다. 단의 속이 가라앉을 때까지 되도록 마음 어지럽힐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채근을 받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단을 보았다.
“단. 교인을 유인해서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면 나한테도 말했어야 했어.”
“역시 그건가.”
단이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뒤로 뺐다. 그가 말했다.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역시 너는 시문… 나리님을 미끼로 쓰는 데 반대할 거 같아서.”
“단! 지금 미끼라고 말했어!”
호란이 탁자를 짚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단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새삼스럽게 왜? 너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 좋은 말로 바꾼들 내가 한 짓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호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단을 쳐다보았다.
물론 호란은 알고 있었다. 몰이를 당한 것처럼 태화관 뜨락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예감했고 총통을 든 단을 보았을 때 거의 확신했다.
있었던 일들을 새벽 내내 되짚어 보면서, 언젠가 단에게 이 일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란이 들으려고 한 건 이런 식의 말이 아니었다.
호란이 계속 쳐다보자 단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내키지 않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리님을 구하는 거하고 교인을 죽이는 건 따로따로 할 수가 없는 일이었어. 넌 대운관의 쫄보들이 얼마나 교인을 두려워하는지 몰라. 협조를 얻으려면 그날 밤 안에 반드시 교인의 목이 떨어진다는 보장이 있어야 했어.”
말하는 사이 단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그가 짜증스러운 듯이 말했다.
“게다가 태청이고 누구고, 대역자에 참칭자인 가짜 문을 치겠다고 큰 소리는 있는 대로 다 쳐놓고선. 막상 실행 얘기가 되니까 다 꽁무니를 빼는 거야. 교인이 문이든 인이든 극상격이니까 지들 손으로 목 따는 건 절대 못 하겠다는 거지. 결국 내가 직접 교인을 죽이는 것밖에 수가 없었어. 방법은 그때 그거밖에 없었고.”
호란이 물었다.
“도박 아니었어? 그때 교인이 끝까지 창가에 안 나왔으면 나하고 시문 님은 어떻게 됐을지 몰라.”
“교인은 강박적인 사람이야. 그 창에서 처형장을 내려다보는 일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어. 그리고 시문… 나리님도 이제까지 중에 교인이 제일 집착한 대상이었으니까. 상황을 맞춰 주면 틀림없이 제가 좋아하는 걸 보러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도박이라도 걸어 볼 만한 도박이었지.
그리고 최악을 막기 위한 대책은 마련해 놨어. 봤잖아? 거기 깔렸던 거 사실은 반 넘게 태청네 애들이었다고. 너한테 투항 권고하면서 교인이 나올 때까지 시간 끈 것도 우리 쪽 사람이었고. 교인이 끝까지 안 나왔을 때에 대해서도 다음 계획이 있었어.”
호란은 이마를 짚었다.
“그래. 아마 단 말이 다 맞을 거야…. 그래도.”
호란 생각엔 단이 하는 말이 전부 사리에 맞는 것 같았다. 듣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이해가 갔다. 다른 방법이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 어딘가에선 점점 실망감 같은 게 올라왔다.
호란은 단이 수단을 부려 상황을 움직일 때 항상 감탄했다. 하지만 단의 방식이 그리 철두철미하지 않다는 것도 막연히 알았다.
단의 앞에는 언제나 신분과 지위라는 벽이 있었다. 접근할 수 있는 정보와 쓸 수 있는 수단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로 사람의 욕망이나 두려움을 건드려 일부터 벌이는 방법을 썼다. 이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내버려 둔 채 필요한 것만 얻고, 속출하는 미지수는 임기응변하거나 그냥 감수했다.
단 스스로도 여러 번 말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조종할 수 없다고. 모든 게 다 뜻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그리고 이번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어땠을지 호란은 수도 없이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호란이 다시 물었다.
“뭐가 됐든, 나한테 미리 설명을 했어야 하지 않아?”
“반대할 거 같았어.”
“지금처럼 설득하면 되잖아. 같이 이야기하다가 더 좋은 생각이 날 수도 있고.”
“그랬을지도. 하지만 나도 여유가 없어서. 설득을 해놨어도 막상 닥치면 네 생각이 바뀔 지도 모르잖아. 너는 안 그래도 나리님 일에는 앞뒤가 없어지는데.”
“내가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야? 시문 님 때문에?”
“꼭 그렇다기보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려고 한 거지. 어쨌든 기회는 한 번이고, 변수는 적은 게 좋잖아?”
단이 턱을 괴고 웃음을 띠었다. 호란이 매일같이 보던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호란은 지금 앞에 앉은 상대가 너무 낯설었다.
호란이 물었다.
“단하고 나는, 친구가 맞아?”
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그가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단이 나를 믿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겠어. 지금은 나도 단을 믿기 어렵고.”
호란은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단이 아니었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 시문 님을 구해낼 수 없었을 거야. 난 단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무리를 책임질 줄 아는 몫꾼은, 자기 목적을 위해 무리를 일부러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아. 절대로.”
“…….”
단은 대꾸하지 않았다. 호란은 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난 지금 단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 고마워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어.”
단이 시선을 피했다.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니. 아니잖아.”
단을 보는 호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물었다.
“내가 단이라면,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해 저지른 일은 아무것도 잘못이라 여기지 않을 거야. 내 말이 틀려?”
“아….”
단이 두 손끝을 깍지 껴 입가를 덮었다. 그가 손안에서 중얼거렸다.
“할 말이 없네.”
호란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그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단, 지금 웃어?”
“아니…. 미안. 진짜로 미안해.”
단은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가렸다. 그는 어깨를 흔들며 소리죽여 웃기 시작했다.
호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더 이상 단과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호란은 돌아서기 전에 말했다.
“단. 나는 단이 그 사람을 죽인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야. 그것만은 절대 아니야.
그리고… 나는 아직 아무 결론을 안 냈어. 계속 생각해볼 거야. 단도 스스로 생각해봐. 생각하고 이번에는 나한테 말해줘. 부탁이니까.”
호란은 정자를 나와서 자기 방으로 갔다.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다.
힘이 나지 않아도 힘을 내야 했다. 지금은 단도 시현도 제 상태가 아니었다. 모두를 지킬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
그게 호란의 몫이었다. 지금 잘하고 있지는 못해도.
* * *
점심때 찾아온 의법사는 아침에 왔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았다. 잠든 시현의 기맥을 짚어 보고 법술을 시전한 다음 처방만 써주고 갔다.
그가 간 뒤에 보니 상처가 반 이상 아물고 염증도 다 사라져서 호란은 한시름을 놓았다.
오후에 시현이 눈을 떴을 때는 열도 깨끗이 내려 있었다.
시현의 기운이 돌아온 것을 보고, 단은 시현에게 대운관의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태청이 교연 주위의 땅인들과 손을 잡아 교연을 몰아냈고 다른 사방군도 모두 태청에게 붙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현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교연에게 붙잡혀 있던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은 태상사 밑에서 허수아비 노릇 하던 총치총령을 바꾸느냐 마느냐로 시끄러운 모양인데…. 저들끼리 나눠 먹고 편 가르느라 바쁜 건 우리가 신경 써 줄 필요가 없고.”
얘기를 마무리 지어가며 단이 말했다.
“미안한데 네 명령패 지금 태청이 갖고 있다. 지 맘대로 남은 위씨나 누구 숙청하면서 말이 궁해질 때마다 네 핑계 대고 있는데. 네 성미엔 안 맞겠지만 그냥 내버려 두는 걸 추천하겠어. 지금 죽이는 놈이나 죽는 놈이나 어차피 다 똑같은 놈들이거든.”
“…알겠다.”
시현이 허공을 본 채 말했다.
그는 침상에 베개를 쌓아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의식은 또렷해 보였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뭐 물어볼 건?”
단이 묻자 시현이 잠깐 망설였다.
조금 후 그가 말했다.
“호란이, 위교연이 너와 네 가족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짧게만 말해주었다. 네가 다시 말하고 싶지 않을 거라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