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42
242화
* * *
34. 세밑
“아오, 시…!!”
단은 쳐들었던 주먹을 내리지도 휘두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나오다 마는 욕설을 끊고 그가 호란을 홱 돌아보았다.
“이래도 내가 빡치는 게 내 문제냐? 이게 진짜 전부 내 분노 통제력의 문제냐?”
“아니. 지금은 아니야.”
호란은 가능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는 창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인 집기들을 줍고 있었다.
적어도 이 사안에 관해서, 단의 모든 분노는 완전하게 정당했다.
어느 정도 침체에서 벗어난 단은 바로 떠날 준비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리고 행장을 들여다보자마자 화산처럼 폭발을 일으켰다.
교연은 시현을 납치할 때 일행의 수레를 끌어갔고, 명령패를 찾겠다고 짐을 온통 들쑤셔놓았다. 되찾아놓고 보니 수레도 짐도 엉망이 된 정도가 아니었다.
마력석은 모두 사라졌고 돈과 패물도 마찬가지였다. 짐은 다 흐트러진 채 모여만 있었다.
상한 물건도 많았다. 수레는 조각조각 뜯어놓아 새로 장만해야 했다. 말들도 죽었는지 어디로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상황을 안 유백이 당황하며 없어진 물건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하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난장판이 된 짐을 정리하고 상한 물건을 수선하거나 새로 갖추는 것은 이쪽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단은 짐을 추스르는 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화를 냈다. 이번만은 호란도 단의 끝없는 분노가 당연하다고 인정했다.
시현의 할머니가 지어준 백은색 겹도포가 터지고 상한 것을 보고서, 호란도 이건 수위 욕설까지 허용되는 사안이라 생각했다.
슬금슬금 귀중품 집어간 것도 그렇고 교연은 수하들마저 제대로 된 놈이 없었다. 최고 찌질이는 나비무늬 박힌 은숟가락 집어간 놈이었다.
단이 쉴 새 없이 성질내며 창고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누가 밖에서 창고 문을 두드렸다. 나가 보니 유백이었다.
그는 마당에 커다란 함과 궤짝을 가져다 놓고 말했다.
“태화관의 창고에서 죄인 위씨가 빼돌려둔 패물과 금전을 상당량 찾아냈네. 확인해 보게.”
하지만 단은 패물함은 쳐다보지도 않고 유백에게 물었다.
“부탁드린 장부는 찾으셨습니까?”
유백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단이 다시 말했다.
“금전 장부와 물품 명부, 제 관리일지 셋 중에 최소한 한 가지는 찾으셨겠지요? 그것부터 돌려주십시오. 물건 대조하고 행장 꾸리는 데에 필요하니까요.”
“그것은… 지금 찾아보고는 있는데. 태화관에 있는 모든 문서는 현재 사법서에서 관리 중이라….”
단이 혀를 찼다.
“조장 나리. 정말로 거짓말을 못 하십니다. 사실은 장부를 찾으셨지요?”
유백이 움찔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실토했다.
“장군께서 한 번 확인해 보시겠다고…. 살펴보고 곧 돌려주실 것이네.”
“설마요. 태청 장군 같은 분께서 시시콜콜한 장부 내용에 무슨 관심이 있으시겠습니까. 그 장부가 있으면 물건과 돈, 마력석이 얼마나 사라졌는지 실증이 되어버리니까 빼돌리신 거겠죠.”
“진짜야? 돈이랑 마력석을 훔친 게 태청이야?”
호란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끼어들었다. 유백이 기겁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날 밤 태화관에서 약탈당한 물건이 많아 아직 물건들의 행방을 다 못 찾았을 뿐입니다.”
“그 약탈을 시킨 것도 태청 장군님 아닙니까.”
단이 뾰족하게 말했다.
“결국 물건이 축난 것은 대운관 탓인데, 그것을 책임지고 채워 주기도 싫고, 축냈다는 소리 듣기도 싫으니까 물증이 되는 장부부터 빼돌린 것 아닙니까. 그래서 돌려주기 싫은 것이 어느 쪽입니까? 마력석입니까, 아니면 돈입니까?”
“…….”
유백의 어깨가 축 처졌다.
“나도 사정은 잘 모르네만…. 아마 마력석 문제겠지. 금품이야 누가 손댔더라도 메꿔드리면 될 것을….”
“정말로 사정을 잘 모르시는군요. 우리 나리님 수레에 있던 금전과 패물이, 그쪽이 메꿔주려고 하신다고 그렇게 쉽게 메꿔질 것들은 아닌데.”
유백은 계속 면목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단의 이 말에는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그가 반발했다.
“아무리 위를 모신다 해도 네가 너무 방만하구나. 지금 대 대운관을 상대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니냐?”
“예에. 그리고 조장 나리도 지금 남운관 완씨 시문의 재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심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수레 안의 귀중품은 윤지관 함씨 집안의 래인께서 채워 주신 것이고요.”
단은 이왕 방만하다 소리를 들은 것 아예 거만하게 나가기로 한 것 같았다. 그가 삐딱한 투를 숨기지 않고 유백을 몰아붙였다.
“약탈 핑계를 대시는데, 남운관에서 찍어낸 금폐와 온강의 패물은 잡졸들이 들고 나가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나리님이 관대를 대신하여 차시는 백색옥대 같은 것은 격 없는 이가 소지하는 것만으로 죄를 물을 물건인데, 대운관 같은 곳에서 병사들이 그런 것에 쉽게 손을 댔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런 시기에 이런 물건을 탐내는 사람은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편찮으신 시문 나리님께서 이런 일까지 신경을 쓰고 입에 담으시게 되면 그 또한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
“…….”
유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대운관의 정변은 정리되어 가고 있었으나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었다.
시현이 적당한 빌미를 주면 단순 도난 사건을 역심으로 뒤바꾸어 서로를 공격해댈 인사들도 태청의 주위에 없지 않았다.
단은 유백에게 제 말의 의미가 잘 전달된 것을 알았다. 그가 가져온 함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지금 한창 정리 중이라 혼란하니 일단 저건 되가져가 주십시오. 장부를 가져오신 다음에 확인하겠습니다.”
“…알았다.”
유백이 씁쓸하게 말하고 함과 궤짝을 훌쩍 짊어졌다. 그의 등 뒤에 대고 호란이 말했다.
“태청한테 말해. 부끄러운 줄 좀 알라고.”
* * *
유백에게 모든 보고를 들은 태청은 비딱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단의 장부 셋에다 단이 대운관에 머무는 동안 시종관에게 보관 주의를 요청했던 목록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래? 백색옥대를 딱 집어서 이야기했어? 탐낼 사람이 따로 있다고?”
“예.”
“눈치도 좋기는. 어떻게 독한 놈하고 편을 짰군. 보통 까탈스러운 놈이 아니야. 장부에 동전 한 푼 초 한 자루까지 다 기록해둔 것하며.”
잠깐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태청이 제 부관에게 명했다.
“아별, 이 일은 네가 알아서 전부 원상 복구해라. 물건을 찾아올 때 윗분께 양해 말씀도 충분히 드리고.”
“예. 전부 되돌립니까?”
“금폐 한 조각 남기지 말고 전부 복구시켜. 아, 이 장부 쪼가리들도 가져다주고.”
“예.”
“이렇게 된 것 시문이 대운관을 빨리 떠날 수 있게 최대한 협조해주도록 해라. 이제까지는 득이 됐지만, 한번 흠을 잡힌 이상 이제부터는 도리어 동티가 될 수도 있어.”
“예.”
아별이 책상 위의 장부들을 갈무리해 방을 나가는 동안 유백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멀거니 서 있었다.
문이 닫힌 후에야 유백이 겨우 물었다.
“장군님, 남운관의 금폐와 패물은 그날 밤에 약탈당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물건들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고 계셨던 겁니까?”
태청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충성스러운 것은 알지만… 그렇게 뭐든지 다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편한가?”
“…예?”
유백은 일순 반문했지만 곧 말뜻을 깨달았다. 그가 허탈한 얼굴이 되었다.
“호란 호위의 말이 맞았군요. 정말로 물건을 훔친 게 장군님이셨습니까.”
“하하. 대놓고 도둑이라고 불렀어? 호란답군.”
“하지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시문께서 장군님과 남방군을 구원하시고, 그러다가 죄인 위씨와 척 져서 그 고초를 겪지 않으셨습니까! 갚으려도 갚을 길이 없는데, 어찌 그분의 사재에 손댈 생각까지 하셨습니까?”
“그게 이상한 일이더군.”
태청이 어깨를 으쓱했다.
“위교연이 가지고 있을 땐 그렇게 크고 많아 보이던 것들이, 여럿이 나누려고 하니까 형편없이 모자라지 뭔가. 서로 몫을 맞추다 보니…. 그런데 너무 궁하게 굴긴 했지. 너무 단번에 들키니까 좀 후회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청은 별로 거리껴 하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유백이 망연자실해 있자 태청은 도리어 책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유백.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그렇게 순진한 척만 하고 있으면 앞으로는 곁에 두고 쓸 수가 없다. 스무 명 돌격대 데리고 거석 무리만 격파하면 끝이던 시절이 아니란 말이야.”
“…예.”
“됐다. 적재적소란 게 있으니까. 가보도록. 시문께서 떠나실 때까지 되도록 편의를 보아드려라.”
“예.”
유백은 조용히 자리를 물러 나왔다.
건물을 나온 뒤에야 유백은 부끄러운 줄 알라던 호란의 말을 태청에게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 그 말이 태청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충격을 받았어도 태청에 대한 유백의 충성심까지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태청은 유백과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고 대운관을 구해온 장군이었다. 유백이 존경하고 친애하던 용맹함과 끝없는 향상심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향상심이란 대체 어디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을까. 혹은 태청이 올라오고자 했던 곳은 처음부터 이런 곳이었던 걸까.
유백은 허한 기분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습관대로 근무처를 향했다.
환멸하고 실망한 뒤에도 그래도 그는 여전히 이 땅의 군인으로 살아야 했다. 어쩌면 태청도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유백은 애써 자위했다.
* * *
단이 한 번 어깃장을 놓은 후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태청과 대운관의 땅인들은 시현이 떠나는 걸 만류하지 않았다. 송별을 포함한 모든 예식을 사양하자 그 또한 냉큼 받아들였다. 이쪽에선 다행한 일이었다.
마침내 대운관을 떠나는 날, 호란의 마음은 정말로 후련했다. 모두에게 너무 괴로웠던 곳이었다.
단과 시현 사이의 낯가림인지 격리인지도 드디어 종료를 고했다.
시현이 수레를 타려고 처소를 나오자 채비를 다 마치고 마부석에 앉아있던 단이 눈인사를 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여 마주 인사하고 조용히 수레에 올랐다.
말은 여전히 안 했지만 용케 서로 얼굴을 안 까먹었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수레가 관성을 나가고 대운관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호란 역시 굳이 말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 한참을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수레를 세우고, 바람을 막을 천막을 세우고, 식사 준비를 마쳐 갈 때서야 단이 시현에게 처음 던진 말이 이거였다.
“야, 밥 다 돼 가. 멍하니 섰지 말고 상이라도 깔아.”
“알았다.”
시현이 대답하고 소반을 내리러 수레로 갔다.
호란이 얼굴을 찌푸렸다.
“단, 시문 님한테 계속 말 그런 식으로 할 거야?”
“땅인한테 굽신거리기 싫어….”
단이 억울하고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똑같은 얼굴로 호란을 보더니 덧붙였다.
“하늘인한테도 굽신거리기 싫어….”
호란에게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가 배신감에 차서 말했다.
“내가 처음에 말 놓자고 했을 때, 넌 사실 친구 되려고 놓은 게 아니었구나?”
“어.”
단은 망설이는 시늉도 안 하고 바로 답했다. 호란이 허탈해져서 핀잔했다.
“아닌 척이라도 좀 해 봐.”
“넌 사람한테 기대란 걸 참 쉽게 하더라.”
단이 기운 없이 말하면서 국을 저었다. 호란은 약이 올라서 제 가슴을 치고 싶었다.
그야 단이 가진 문제는 대부분 그가 겪은 고통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얄미운 소리만 골라 하는 건 원래 성격일 게 틀림없었다.
나쁜 놈. 지 인성이 저러니까 친구 사귈 때 남의 인성을 안 보지. 그게 공평하기는 하다.
그래도 호란이 최길 정도는 아니었다. 진짜 그건 아니었다.
“뭐 어떻느냐. 말씨쯤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시현이 천으로 소반을 닦으며 말했다.
“무엇하면 호란이도 내게 편하게 말하려무나.”
호란이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 이제까지도 네가 말하는 것은 하나도 예법에 맞지 않았단다.”
시현이 너그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찌나 너그러운지 호란은 공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역시 세상에는 좀 더 예의와 법도와 규범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앞으로는 호란도 좀 적극적으로 배워야겠다 싶었다.
그런 게 전혀 없고, 이 사람들이 솔직한 마음을 아무 때나 툭툭 말하기 시작하면 호란만 아무 대꾸 못 하고 구멍투성이가 될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