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44
244화
* * *
단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귀찮은 일의 낌새를 포착한 그가 얼른 부인했다.
“아, 그건 아닙니다. 우리 나리님은 경매에는 참가 안 하실 겁니다.”
“어어? 그래?”
“예. 따로 작게 구하실 것이 있어 들르신 것뿐이라서요. 그저 하루 이틀 머물다 가시게 처소 같은 편의만 봐주시면 좋겠는데요. 가급적이면 조용하게요.”
단은 조용하게란 말에 힘을 주며 군인을 빤히 보았다.
“아아…. 그, 그건 어려울 거 없지만.”
군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수레와 제 손에 든 금폐 주머니에 번갈아 시선을 보냈다.
주머니에 든 것은 혼자 먹었다간 틀림없이 탈이 날 고액이었다. 윗전과 나눠 먹을 소개비로 여기고 냉큼 받았는데 이쪽의 요구가 제 생각과 다르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단은 살짝 후회했다. 띠를 한 머리길래 요령이 좀 있는 놈일 줄 알았는데. 쓸데없이 큰돈을 건넸나?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겠다고 어중간한 푼돈을 건네면 그거대로 나중에 귀찮아진다. 이게 다 수레 안에 있는 양반의 품위 유지 비용이 비상식적인 탓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추운 날에 뭐 한다고 방문객을 막아서고 있는가. 귀한 손님이 오신 모양인데.”
“치, 치읍감님!”
군인들이 뒤를 돌더니 화들짝 놀라서 허리를 숙였다.
단은 호란과 함께 마부석에서 내려와 예를 갖추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변방 마을에서 치읍감은 또 왜 튀어나와? 근방에 치읍감이 주재하는 소읍이나 읍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잡으나 하루 이상 거리였다.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나타난 것은 키 큰 하늘인 호위 두 명을 거느리고 모피 갖옷을 입은 여자였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밀색 머리에 담황색 피부, 알이 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여자는 탐색하는 눈으로 일행을 살폈다. 으리으리한 수레에도 눈길이 갔지만 그것은 일순이었다. 그가 눈여겨보는 것은 두 사람, 특히 호란이었다.
탐색은 짧았다. 여자가 활짝 웃더니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눈길에 고생이 많았다! 수행은 너희가 다냐? 수레 안에는 몇 분이 계시냐?”
“한 분입니다. 수행은 저희 둘뿐입니다.”
“아하….”
여자는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뿌리면서도 어딘가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침을 꼴깍 삼키고서 물었다.
“안에 계신 분께서 아아주 먼 길을 힘들여서 오셨을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느냐?”
말하는 투를 보면 여자는 수레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이제까지도 오만 데서 얼굴 보였다 하면 바로 정체를 들켰는데, 이제는 얼굴도 보이기 전에 정체가 들통 나는군. 단은 짐짓 난처해 하는 미소를 띠고 공손하게 답했다.
“예.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여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띠를 한 군인에게 말했다.
“그러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뭣 하느냐? 어서 뛰어가서 소빈당 문을 열고 손님 뫼실 준비를 하라 일러라. 지금 바로.”
군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빈당 말씀입니까? 준비야 되어 있겠지만, 오늘 밤 부사께서 도착하실 게….”
그 말을 들은 여자가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리며 군인이 든 금폐 주머니 쪽에 턱짓을 했다.
“아이고, 그런 소리 하기엔 그 손아귀가 무겁지 않아? 받은 게 있으면 값을 해야지.”
“아, 그, 저, 이건….”
군인은 주머니를 숨기지도 내놓지도 못하고 큰 손아귀에 엉거주춤 감췄다. 여자가 말했다.
“받아도 괜찮다. 너희가 오늘 큰 은전을 입은 것이다. 영광으로 여기되, 왜 베푸셨는지를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철저히 단속하거라. 알았지?”
“예, 예!”
“어서 움직이거라!”
군인들은 빛과 같은 속도로 마을 안으로 달려갔다.
여자가 생글거리는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단이 공손하게 말했다.
“위를 뵈시겠습니까.”
여자는 바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나 같은 것 때문에 한길에 나오시게 해서 되겠나. 처소에 드신 후 내가 인사드리러 가겠다. 나는 대릉읍 치읍감 한씨 율지다.”
그는 다시 한번 친근하게 웃어 보이더니, 제 호위 두 사람에게 일행의 안내를 맡기고 혼자 종종걸음으로 동구를 향했다.
호란이 마부석에 도로 오르면서 소곤거렸다.
“저 사람, 수레 안에 계신 게 시문 님인 걸 눈치챈 거 같지?”
“아무렴요.”
“어떻게 수레만 보고 알았을까? 대운관에서 준 새 수레가 좀 화려하긴 하지만.”
“수레를 보고 안 게 아닙니다. 호란 호위를 보고 눈치채신 거죠.”
“나?”
“당연하죠.”
단은 여건이 닿는 대로 수레를 교체해야 할지, 그게 과연 효과는 있을지를 잠깐 고민했다.
특정당하기 쉬운 일행이었다. 수레는 호위대 두 무리를 끌고 다녀야 어울릴 만큼 거창한데 호위는 딱 한 사람, 그것도 아직 소녀티를 다 못 벗은 십 대다. 세상에 어린 몫꾼은 많지만 어린 몫꾼이 고관의 호위를 혼자 맡는 경우는 없었다.
더구나 정변 이후 대운관 속령의 주둔군은 관성 소식에 잔뜩 민감해졌다. 정세를 전하는 하늘인 파발꾼들이 밤낮으로 뜀박질을 하는 겸사겸사로 완씨 시문이 대운관을 나서 북쪽을 향했다는 말도 퍼졌을 것이다. 일행이 어떤 구성인지도 알려졌을 것이고.
덕택에 이제 귀찮은 일에 얽히는 것은 거의 확정이었다. 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앞서가는 하늘인들을 따라 말을 몰았다.
마을 안은 바깥보다 더 북적거렸다.
곳곳에 막사와 가건물이 잔뜩 서 있고 마을 중심에는 장이 서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도 마을이 아니라 소읍 수준으로 많았다. 돌아다니는 하늘인 군인들도 계속 눈에 띄었다.
더 깊이 들어가자 커다란 병영 두 곳과 작은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와집 서너 채가 있었는데, 모두 새로 지은 것 건물이었다.
단이 앞서가는 호위에게 말을 건넸다.
“지도에 적힌 것보다 마을 규모가 훨씬 크군요. 너덧 배는 되는 것 같은데.”
“필요에 의해 커진 것이다.”
호위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갑자기 커진 마을을 관리하느라 읍감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아무 문제 없다.”
“그래도 밀려난 원주민들이 불평을 좀 했을 것 같은데…. 그리고 군인들도, 소속이 다르면 서로 충돌하거나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경쟁 같은 게 붙으면 더 그렇죠.”
“아무 문제 없다. 치읍감께서 전부 관리하고 계신다.”
“네. 인상만 봐도 유능해 보이시더군요. 휘하들에게도 너그러우신 거 같고.”
단이 넉살을 부려 보았지만 호위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단은 이미 알고픈 것을 전부 가늠한 뒤였다.
오가는 군인들의 복색이 뒤죽박죽인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역시 이 마을에 주둔해 있는 것은 하나의 통일된 부대가 아니었다.
소빈당은 마을 안쪽 기와집 몇 채가 모인 곳 중에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갈하게 지어진 방 셋짜리 가옥으로, 작은 집 규모에 비해 담이 높고 뜨락이 넓었다.
소빈당 뜨락에는 아까의 군인 세 사람이 종자 몇 사람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수레가 도착하자 군인 머리가 단에게 말했다.
“처소는 모두 갖춰두었다. 일 잘하는 일꾼을 몇 사람 모아봤는데, 머무시는 동안 처소에 둘 사람을 네가 고르거라. 다 써도 좋고.”
수레에서 내린 단이 처소를 한 번 둘러보고 군인에게 말했다.
“다른 일꾼은 괜찮습니다. 잔일은 제가 하면 됩니다.”
“경비도 더 남겨놓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호란도 곧바로 말했다. 군인은 뭐라고 말을 더 붙여보려 했으나, 생글거리는 단에게 전부 차단당하고 종자들과 호위들과 함께 대문 밖으로 쫓겨났다.
호란이 대문을 닫고 돌아오니 시현은 수레를 나와 섬돌을 오르고 있었다.
그가 단을 돌아보며 곤란한 듯 웃었다.
“안에서 들으니, 이 마을은 보통 사연 많은 곳이 아닌 듯한데. 어떡하느냐. 네가 경로를 짤 때 대운관군과 안 얽히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일단 안으로 드시죠…. 그리고 그런 말씀 하실 때 웃지 마세요. 화통 터지니까.”
방 안은 필요한 세간이 전부 갖춰지고 청소가 끝나 있었다. 방 한켠 좌탁에는 물이 찬 주전자가 있고 군불까지 때어 두어 방 전체에 훈기가 돌았다.
손댈 것 하나 없이 몸만 들어가면 되도록 준비된 방안 모습에 단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앉은 뒤 시현이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밀수가 조금 활발한 관문 마을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아닌 모양이구나.”
“어.”
“네가 길을 정할 때, 특정한 읍성이나 광산 주둔군의 세력권이 아니면서 길이 잘 난 곳으로 이 마을을 고르지 않았느냐. 귀수관으로 이어지는 골목이고. 그 입지가 좋다고 생각한 것이 너만이 아닌 모양이다.”
단이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게 다 내가 자초한 재앙이라는 이야기를 꼭 그렇게 강조해야 할까?”
“그런 게 아니다. 내 이야긴, 여긴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입지를 골라서 암시장으로 조성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야 그렇지. 이 정도로 대놓고 하면 암시장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보나 마나 마력석 밀거래를 위해 만든 장소겠지.”
호란이 물었다.
“마력석?”
“그래. 이런 변방 마을에서, 다들 땅인 고관을 손님으로 맞는 게 당연하단 투였잖아. 땅인이 직접 와서 물건을 봐야 하는 거래가 마력석 말고 또 뭐가 있겠냐? 그렇게 보면 이렇게 군인들이 득실거리는 것도 이해가 가지.”
“하지만 대운관에선 마력석 거래가 금지라고 하지 않았어? 광산에서 생산된 마력석은 전부 관의 소유라고….”
“바로 그래서 암시장이 이 정도로 커진 거야. 대운관 대관성에서 마력석을 가져갈 때 지역 광산에 보상을 제대로 했겠냐? 마력석 값은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사람이면 당연히 딴생각이 나지.”
단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해도 이 마을은 너무 심하지만. 들켜서 모가지 날아갈 게 겁나지도 않나. 위교연이 알았으면 바로 돌아버렸을 텐데.”
“무엇이 무섭겠느냐. 어차피 교인은 대운관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는데. 유일한 위험은 관성 정가에 고발을 당하는 것인데, 아마 그 때문에 두 개 이상의 파벌이 공동으로 시장을 연 게 아닐까 싶구나.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걸 막기 위해서.”
시현이 말했다. 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운관에서 공공연한 담합은 언제나 비밀보다 안전했다.
“변고 직후 마력석 거래가 금지됐다고 하면, 그 후 반년이 훌쩍 넘게 지났으니 시장이 고착화될 시간은 충분했겠지. 마력석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니까 다른 밀수품도 따라서 모였을 거고. 그래서 아예 암시장 전문 마을이 됐을 거고…. 그건 이해가 가는데. 근데 문제는 그놈의 경매야. 일이 귀찮아질 거 같은데. 완전 촉이 안 좋아.”
“특상품의 마력석이라도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굳이 우리가 연관될 필요가 있겠느냐? 네 말대로 경매에는 참가를 안 하고 소소한 물자만 구해서 떠나면 될 것 아니냐.”
“와, 이렇게 자각이 없어요. 그게 되겠냐?”
단이 헛웃음을 흘렸다.
“치읍감이라는 인간이, 네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아주 득달같이 친한 척을 하면서 처소다 시중꾼이다 극진하게 가져다 바치고 있는데. 너한테 바라는 게 없겠냐?”
그때 바깥에서 대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오너라!”
쾌활한 목소리는 아까 동구 밖에서 만난 율지라는 여자의 것이었다.
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봤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