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45
245화
* * *
“봤지? 벌써 방세 받으러 온 거 봐라. 얼마나 비싸게 부를지 생각하니 내 간이 다 쫄리네.”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쪽이 무얼 바란들 내가 그것을 들어줄 이유도 없지 않으냐. 이야기 정도야 들어보겠다마는.”
“글쎄, 쉽게 거절할 수 있을까. 여긴 군벌에게 점령된 무법지대나 마찬가지라고. 아무리 너라도 방세 떼먹게 두진 않을걸.”
“어쨌거나 이야기를 들은 다음의 일이다.”
호란은 율지를 맞아들이러 대문으로 나갔다.
율지는 호위도 종자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였다. 아까 입었던 모피 갖옷과 융복 대신 솜을 넣은 누비 도포와 치마를 입고, 팔에는 보자기로 감싼 광주리와 커다란 찬합을 겹쳐 끌어안고 있었다.
율지가 활짝 웃으며 호란에게 말했다.
“아이고 추워라! 이것 좀 받아 주겠느냐?”
“아, 네!”
호란이 두 팔을 벌려 짐을 받아 들었다. 광주리에서는 따스한 김과 함께 고기 삶은 냄새가 올라왔다.
율지는 잘 아는 사람을 대하듯 스스러움 없는 투로 말했다.
“위께서 저녁은 아직이시지? 수육이랑 찰밥을 가져왔으니 두었다가 나중에 올려드리거라. 양이 넉넉하니까 너희도 먹고.”
빠르게 말을 마친 율지는 호란을 지나쳐 성큼 섬돌을 올랐다. 단이 대청에 서 있다가 율지가 들어갈 때 방문을 여닫아주었다.
시현은 보료에 앉은 채 율지를 맞았다. 시현을 본 율지는 무엇에 놀랐는지 잠깐 눈을 크게 했지만, 곧 몸가짐을 가다듬고 엎드려 절했다.
“…대운관의 한율비 지가 위 없는 이를 뵙습니다. 무궁한 영광입니다.”
“예는 약례로 족하다. 고개를 들고 자리에 편히 앉으라.”
“은혜를 받듭니다.”
율비가 보료 앞 방석에 앉았다. 그는 그때까지 꽤 엄숙하고 정중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얼굴을 풀고 웃었다.
“아휴! 이거 보통 긴장되는 게 아니군요. 저 같은 촌구석 무관이 땅 위에 가장 높은 분을 뵐 날이 오다니요.”
시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주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율비는 딱히 무안한 기색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소는 어떠십니까?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위를 모시기엔 누추한 곳입니다만, 그래도 이 동네 가옥 중에서는 제일 깨끗하고 따뜻하답니다.”
“충분히 안락하다. 환대에 사의를 표하겠다.”
“무슨 말씀을요, 무상을 모시게 되어 저희가 무량한 영광이지요! 제가 촌사람이라 식견이 짧아 준비가 부족한데, 무엇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 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제가 도움 드릴 일이 있으면 그것도 편하게 말씀 주시고요.”
넉살을 부리는 율비의 모습은 벼슬아치가 아니라 무슨 상인처럼도 보였다.
그렇다고 이상할 것은 없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나 결국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 관인 중에는 이런 유형이 의외로 흔했다.
시현이 천천히 말했다.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 내가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는가.”
“예, 물론이지요! 소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쉬고 물자를 장만하여 여행을 계속할 생각이다만, 그 하루 동안 내가 머문다는 사실을 이곳의 다른 이들에게 비밀로 해주었으면 한다.”
“아….”
율지는 대답하려고 입을 벌린 채 굳어졌다. 시현이 빙긋 웃었다.
“그대도 이해하겠지? 공연한 방문객이 늘거나, 번거로운 일에 얽히는 것을 피해 하룻밤이라도 푹 쉬어가기 위함이다.”
“물론 이해합니다마는…. 아이고.”
율지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시현이 가볍게 농을 섞어 물었다.
“왜 그러는가. 무슨 어려운 점이라도 있는가?”
“아하하, 이거야 원. 점수부터 따놓으려고 수작을 부리다가 문께 선수를 빼앗겼군요. 아무래도 제 속셈도 이미 들여다보신 것 같고.”
율지는 졌다는 듯이 두 손을 펴들었다.
“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외람되오나 소생은 무상의 위광을 빌어볼 요량으로 문을 이곳에 모셨습니다. 신원을 감춰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리하면 제 속셈을 이룰 길이 없어져서 곤란하네요.”
율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현에게 다시 절했다.
“소생의 뻔뻔함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제 청도 한번 들어봐 주십시오.”
시현이 낮게 웃었다.
“빠르게 자백한 것은 참작하지. 수작하려는 속내를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일종의 솔직함으로 보아도 좋을까. 말하기를 허하겠다.”
“은혜가 한이 없으십니다!”
율지가 재깍 고개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소리 없이 방문이 열리고 작은 다상을 든 단이 들어왔다.
단은 시현과 율지의 사이에 상을 놓고 찻잔을 채운 다음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방문을 닫기 전 율지의 머리 위로 시현에게 살벌하게 눈총을 쏘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현의 표정이 미묘해진 것을 빠르게 포착한 율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차를 들라.”
시현이 찻잔을 들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율비는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찻잔을 입술에 대는 둥 마는 둥 하고 내려놓더니 하려던 말을 꺼냈다.
“말씀드리기 황공합니다만, 여기 흰바위 마을에서는 지금… 뭐라 해야 좋을까. 일종의 시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말을 에두르지 않아도 좋다. 마력석 밀거래를 하고 있겠지.”
“아, 역시 눈치채고 계셨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대운관과 그 속령의 사정을 모르지 않아 한 번 눈을 감고 지나가는 것이다. 본디는 엄벌에 처해야 할 일이다.”
“물론이지요! 물론입니다만…. 저희 사정도 이해해 주십시오. 군을 유지하고 백성들이 굶지 않게 하려면 교역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대관성이 요구한 대로 마력석을 전부 바쳤더라면 지역이 모조리 폐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눈감는다 말한 것이다.”
시현이 딱딱하게 말하고 율비를 보았다.
“본론을 듣겠다. 네 청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은 문께 드리기에는 꽤나 무례한 청입니다만.”
율비의 얼굴에서 넉살 좋은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긴장한 사람처럼 소맷자락을 꼭 쥐고 말했다.
“모레 있을 마력석 경매에서, 문께서 물건 하나를 입찰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부탁이었다. 시현은 눈을 깜박였다.
“경매에 나온 상품을 구매해 달라는 말이냐?”
“예. 매수 가격이 아무리 올라가든 간에 괜찮습니다. 상품의 출품자는 저, 정확히는 저희 대릉읍이니까요. 대금은 적당히 치르는 시늉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물건을 사라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내 명의로 위장 입찰을 하여 경매를 무산시키는 것이 목적이로군.”
“그렇습니다. 참으로 무례한 일임은 압니다만….”
“그대가 내 위광을 빌려 하려는 일이라는 게 그것인가.”
“예.”
율비가 눈을 내리깔았다.
“짐작하셨겠지요. 돈이 아닌 권력을 가지고 물건을 사려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력이겠습니다만.”
“예의 경매품을 탐내는 무력 집단이 있다는 뜻이구나. 상품이란 마력석인가? 대체 어느 정도의 것이기에.”
“참석입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율비가 말했다. 시현은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석의 가치는 크기와 순도에 좌우된다. 상대적으로 큰 마력을 머금은 고순도의 마력석은 참석이라고 불리며 값이 몇 배로 뛰었다. 크기까지 크면 말할 것도 없었다.
“헌데 그대가 거느린 군으로는 대응이 어려운가? 그대 역시 이 지역의 책임자가 아닌가.”
“아이고. 변고 후로 치읍감 같은 행정관료는 깡그리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실권은 모두 광산 밀집지에 파견된 주둔군 부사들에게 넘어갔지요.”
율비가 처량맞게 웃고는 하소연을 했다.
“대군을 거느린 부사는 지역에서 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든 멋대로 사람과 물자를 징발하고, 정해진 주둔지 바깥 광산까지 점유해서 대관성에 올릴 채굴량을 가로채지요. 저 역시 인접 지역에 주둔한 찰령부사님께 꼼짝을 못 합니다.”
시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교연이 마력석 모으기에 급급한 사이 엉망이 된 것은 대관성과 속령을 가리지 않았다.
율비가 설명을 이어갔다.
“대릉읍에 딸린 조그마한 광산들은 산출이 작아 이제껏 주둔군의 관심 바깥이었습니다만. 지난달 초 폐광 직전의 광산 밑바닥에서 거대한 참석이 채굴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횡재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저희가 감당할 물건이 아니더군요. 어떻게 정보를 캐냈는지 찰령부사가 바로 압력을 걸어왔습니다. 값을 후려치는 것도 아니고 아예 강탈을 하려 드는데 어디 호소할 데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찰령부사는 그 돌을 밀거래하는 대신 대운관 대관성에 바칠 생각이었거든요. 돈이 아니라 커다란 참석을 채굴해낸 공적을 가로채는 게 목적이었죠.”
율비는 자못 분한 듯 주먹까지 쥐어 가며 감정을 드러냈다. 시현도 무심결에 이야기에 빨려들었다.
“그래서 어찌하였는가.”
“그런데 그때 대관성에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죄인 위교연은 죽고 찰령부사의 가장 큰 뒷배 노릇을 하던 세도가도 함께 날아갔지요.”
“아….”
저와 제 일행이 급전개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시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물건을 바치려던 대상이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로구나.”
“예. 그래도 저희 쪽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찰령부사의 세가 약해진 틈을 타 다른 부사 한 사람이 돌에 탐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마터면 대릉읍을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질 뻔했지요. 제가 어찌해야 했겠습니까? 품 안의 백성들이 그런 일에 휘말리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실로 그렇다.”
“이해하시지요. 그래서 심산의 북방군 탈영병들이 모인 군벌을 판에 끌어들여 보았습니다. 내친김에 더 먼 지역의 토호들에게도 대단한 물건이 있다고 소문을 내고, 귀수관 상인들도 여럿.”
“…….”
또다시 사고를 더 큰 사고로 밀어내는 전개였다. 율비는 시현의 복잡한 표정을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방편이 또 먹히지 않았겠습니까? 정면충돌을 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두 분 부사님은 결국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군을 물리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흰바위 마을에서 문제의 돌을 경매에 붙이기로 합의하셨지요.”
“그러면 다 해결된 것이 아닌가? 경매를 하고 그 낙찰금을 받으면 대릉읍에도 큰 이득이 될 텐데.”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요.”
율비의 어깨가 처졌다. 그가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투로 말했다.
“경매를 코앞에 두고, 직전까지 싸움만 하시던 두 부사님이 손을 잡으셨습니다. 마을 인근에 찰령과 원곡의 대부대를 주둔시키고 경매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심산의 북방군 군벌도 한발 물러났고요. 이대로 두면 두 분은 틀림없이 경매 때 담합을 해서 가격을 낮출 겁니다.”
“과연 횡포가 과하구나. 있을 법한 일이기는 하다만.”
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동정적인 태도를 알아본 율비가 눈을 빛냈다. 그가 활기를 보이며 말했다.
“이제 제 생각을 아시겠지요? 다른 사람은 경매에서 낙찰을 받는다 해도 참석을 가지고 무사히 마을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께서 돌 인간과 싸우기 위해 참석을 낙찰 받으신다 하면, 감히 그 누가 손댈 엄두를 내겠습니까.”
“그대의 말은 모두 알겠다. 허나 경매를 마친 뒤에는 어찌할 셈이냐? 결국 거래는 시늉뿐이고, 처치 곤란한 돌이 그대 수중에 남을 뿐인데.”
율비는 활짝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예, 두 분 부사님이 물러가시길 기다렸다가, 미리 약속을 해둔 귀수관 상인에게 몰래 팔아치울 겁니다. 그래야 저도 돈을 좀 만지지요!”
“…….”
시현은 이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몇 번 말을 잃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조금 후에야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다시 물으마. 그러면… 대체 왜 내가 그 일을 도와야 할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