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 * *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여기는 자리가 좋지 않군. 함께 장소를 좀 옮기시겠소.”
“그러시게.”
시현은 선선히 답하고서 단을 보았다.
“구해야 할 것이 더 있다 하였지. 호위를 두 사람 남겨둘 테니 너는 마저 시장을 돌아도 좋고….”
단은 그러겠노라 답하려 했다. 하지만 거기서 시현은 말을 잠깐 멈추더니 갑자기 눈썹을 내려뜨리며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아니면… 혹시 나와 같이 가주겠느냐?”
이건 또 뭘까. 단은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어쨌든 방긋 웃었다.
“원하시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요, 나리님.”
“그래 주겠느냐!”
시현은 기쁜 얼굴을 하고서 원진을 향했다.
“어디로 가시겠는가? 내가 머무는 소빈당이 조용하여 이야기하기에 나쁘지는 않소마는.”
“됐소. 나는 그 마을 구석까지 갈 시간이 없소. 찰령군 군영으로 오시오.”
원진은 시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휙 등을 돌려 길을 앞장섰다. 뒤따라 발길을 내딛는 시현의 좌우를 원진이 이끌고 온 병사들이 우르르 둘러싸고 함께 걸었다.
대놓고 이쪽을 위압하려는 태도에 율비가 보낸 호위들의 표정이 바로 안 좋아졌다. 시현만 태연자약하게 같은 보폭을 유지했다.
원진은 소빈당을 마을 구석이라 했지만, 찰령군 군영 역시 시장에서 가깝지는 않았다.
시장이 서는 마을 중심으로부터 똑같은 거리를 두고, 찰령군 군영은 동쪽에, 원곡군 군영은 서쪽에 대칭으로 지어져 있었다.
또한 율비와 지역 군인들이 주둔한 마을 관아는 남쪽에, 소빈당을 비롯해 마을에 머무는 땅인들을 위해 지은 기와집들은 북쪽에 있었다. 암시장이 생길 때부터 있어 온 여러 세력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배치였다.
군영 안팎에는 원진이 이끌고 온 병사들 외에도 기세 좋은 하늘인 병사들이 잔뜩이었다. 마을에 머물기에는 너무 많은 수인데, 세를 보이느라 데리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군영 객당 앞에 이르자 단과 시현의 호위들은 알아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시현은 걸음을 멈추고 단을 불렀다.
“단, 너도 오거라.”
원진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나를 만나는 자리에 종자를 동석시킬 참이오?”
“내가 항시 데리고 다니는 이이니 양해하시오.”
“하 나 원…. 마음대로 하시오. 객당에서 잠시 기다리면 내 곧 가리다.”
원진은 단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툴툴거렸지만 막지는 않았다. 시현과 단은 시중꾼의 안내에 따라 객당으로 들어갔다.
군영의 객당은 소빈당보다 더 크고 사치스러워 이런 작은 마을에도 군영 내의 시설로도 어울리지 않았다. 색색깔로 화려하고 금칠을 아끼지 않은 집기들은 대운관의 유행을 따른 것들이었다. 다만 그 물건들은 어째 비싼 것을 닥치는 대로 가져다 놓은 듯 배치에 두서가 없었다.
시중꾼은 시현을 접객용 탁자 앞으로 안내하고 차를 낸 다음 자리를 떴다.
주위가 비자 단이 물었다.
“뭔데? 나는 왜?”
시현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상인이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무 태연해서 신분이 드러난다고. 그래서 주눅 든 척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서.”
“나를 끌고 들어가는 거의 어떤 부분이 주눅 든 척인데?”
“나는 불안하고 마음이 안 좋을 때는 너와 호란 생각을 하니까. 그럴 때 할 만한 행동을 해본 것이다. 부자연스러웠느냐?”
단은 복잡한 기분이 되어 턱을 매만졌다. 일단 이 자식이 주눅 드는 기분이 뭔지 모른다는 사실 한 가지는 알았다.
“솔직하게 말해줘? 주눅은커녕 반대로 완전 뻔뻔하고 경우 없게 보였어.”
“그랬느냐.”
시현은 조금 실망한 것 같았다. 단이 픽 웃었다.
“근데 너무 경우 없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거 같긴 하다. 왜 돈 있는 집안에서 갓 격에 오른 도련님 아가씨한테 교육받은 반민 두셋씩 비서로 붙여주잖아. 공부만 하느라 물정 하나도 모르는데 갑자기 관리 노릇 하고 사람 만나야 하니까, 무슨 실수 하면 비서들이 옆에서 주워 담으라고. 딱 그걸로 보였을 거야.”
“아, 남들도 그렇게 하느냐?”
“땅인들이 많이 하는 일인데 네가 모르냐? 본 적 없어?”
“한 번도 없다.”
“하긴 그렇게 경우 없는 인사들은 네 주위까지 도달을 할 수가 없겠군. 일단 급 나뉜 것 못 넘어가기는 땅인도 마찬가지인가.”
그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서 단은 입을 다물었다. 유세하듯 쿵쿵거리는 발소리는 보나 마나 원진일 것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원진이 들어왔다. 그는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인사치레 말도 없이 시현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탐색하는 시선으로 시현을 빤하게 보았다. 자기가 먼저 부르고서도 말을 꺼낼 기색이 없었다.
시현이 자연스럽게 잡담을 꺼냈다.
“원래 부사께서 오늘 밤 소빈당에 머물 예정이었는데, 내가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방을 가로챈 모양이 되었다고 들었소. 미안하오.”
원진의 입술이 실룩했다.
“흥. 소빈당에 머물기로 되어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원곡부사 그치요. 그자야 마을에 누가 왔다 하면 무슨 줄이라도 될까 하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니 그쪽이 편하겠지. 하지만 군인이면 군영에 머물러야지. 그래야 무슨 일이 있을 때 재깍재깍 대응할 것이 아닌가. 아니 그렇소?”
시현은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의 관점에선 이미 발령받은 주둔지를 떠나 이 마을에 와 있는 시점에서 찰령부사든 원곡부사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진이 물었다.
“아랫것들이 없는 자리니 다시 묻겠소. 이제라도 신상을 밝힐 생각이 없으신가?”
“어렵소. 양해하시오.”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관성에서 오셨을 듯하오만.”
“어떻게 생각해도 좋소.”
“급히 피난하는 것 치고는, 차린 모습에나 태도에나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이시는데.”
“그래 보이는가? 의외라 생각하겠지만, 정말로 여유가 없는 이들은 피난조차 못 한다네. 나도 여행을 나서고서야 알게 된 일이네만.”
시현이 한마디 한마디 받아치자 원진은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비서 없이 혼자서는 사람도 못 만나겠다는 이가, 말은 아주 번드르르하게 잘하시는군. 혹시 율사신가?”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원진은 그것을 보고 마음대로 결론을 지었다.
“하! 그럴 것 같더라니. 대관성 율사들이야 고개 뻣뻣하기가 극상보다 더하지. 그 눈에 나 같은 지방 출신 법군이 상격으로 보이기나 하겠나?”
원진의 목소리에 더욱 감정이 실렸다. 시현이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대의 격을 무시한 일이 없소마는.”
“됐소. 허나 말해두겠는데, 율사들 세도가 먹히는 건 대관성에서요. 여기처럼 싸움이 많은 변방에서는 실전에서의 능력만이 의미를 갖소. 격은 장식으로 두고 법문 장난질로 권력을 꿰찬 율사니 판관이나, 원곡부사처럼 실력도 없으면서 정치질로 자리를 얻은 자가 행세하고 다닐 수 있는 동네가 아니란 말이지. 하물며 변고가 난 이 마당에는!”
보아하니 원진은 여기서 시현이 무슨 이야기를 더 꺼낸들 원곡부사에 대한 험담으로 몰고 갈 것 같았다. 한이 없겠다 싶어진 시현이 먼저 물었다.
“그래서, 나를 불러 하실 말씀이란 것이 무엇이오?”
“큼.”
원진도 자신이 본론에서 벗어난 걸 깨달았는지 올라가던 언성을 낮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온 곳을 말할 수 없다면, 목적지는 말할 수 있소?”
“귀수관이오.”
“그럴듯하긴 한데 너무 무난한 대답이군. 이 마을엔 언제까지 머물 예정이신가?”
“여행이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는 대로 곧 떠날 예정이오만.”
“준비만 끝나면 내일이라도 바로?”
“그러고 싶소만은 확정된 것은 아니오.”
“허.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원진은 또 무언가 멋대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가 험악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좋소. 자꾸 발뺌만 하니 이쪽에서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모레 경매에서 대릉읍 참석에 입찰할 생각이라면 그만두시오. 이건 아주 진지한 경고요.”
시현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한씨 율지에게서 복잡한 일이 있다는 말은 들었소만, 나는 경매에 참가하러 이 마을에 온 것이 아니오.”
“하! 피난하시는 분이라고? 앞뒤는 맞지. 근데 그건 너무 한씨 율지 머릿속에서 나올 법한 생각 아닌가? 그자가 수작 부리는 방식은 내 잘 알아서 하는 말인데.”
시현은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피난하는 땅인으로 위장한다는 것은 실제로 율비가 생각해낸 것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시현이 침묵하자 원진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대도 그래. 내 다 알아보았소. 경매에 관심 없는 척 밤 시장에 마력석을 사러 갔던데, 정작 싸구려 잡돌만 사들였더군? 그런 돌로는 피난길에 거석과 싸울 수 없소. 우리 병사들과 싸움이 있을 때를 대비한 호신 용도면 모를까!”
시현의 눈이 커졌다. 그가 충격받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이런 오해를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디가 오해요? 내 말에 틀린 데가 있다면 말해 보시오.”
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엇을 말한들 그대가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대릉읍 참석을 노리고 이 마을에 온 것이 아니오.”
“물론 그렇겠지. 그렇게 시치미를 떼다가, 준비가 늦어져서 하루 더 머물게 됐느니 어쩌니 하며 경매장에 머리를 들이밀고 판에 끼어들 셈이겠지. 그런데 일이 그렇게 쉬울까?”
원진이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쪽은 이미 돌을 얻으면 대관성의 신임 총치께 바치기로 이야기가 다 되어 있소. 당신이 누구를 뒷배로 두고 여기 왔든, 뒤늦게 끼어들어봤자 득이 되기는커녕 화만 입을 거란 말이오. 알겠소?”
시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원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뜻은 잘 알겠네.”
“아니, 보아하니 못 알아들으신 것 같소만. 나도 이 일에 목숨을 걸었어. 내가 찰령부 주둔군과 원곡부 주둔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할까?”
“그 이야기도 한씨 율지에게 들었소.”
“그럼 이제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게 됐군. 남은 것은 당신의 현명한 판단뿐이오.”
시현은 원진을 향해 빙긋 웃었다.
“꼭 고려하겠소. 용건은 그것이 전부인가?”
“…전부요. 가보셔도 좋소.”
계속 기세를 올리던 원진은 더 할 것이 없어지자 오히려 태도가 수그러들었다. 눈을 부라리고 으르렁대고 할 수 있는 협박을 다 해도 시현이 낯을 바꾸지 않자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시현은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남기고 군영을 나섰다. 그가 단에게 말했다.
“율지의 말로는 찰령부사와 원곡부사가 대릉읍 참석을 두고 손을 잡았다 하지 않았느냐? 손을 잡았어도 사이는 전혀 좋아지지 않은 모양이구나.”
“뭐 흔한 일이지요.”
“그렇기는 하다만, 이 제휴가 아무래도 오래가지는 않겠다.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모른 척 떠나기는 어려운데….”
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은 말했다.
“이미 외곽까지 나와버린 것, 일단 소빈당에 돌아가지 않겠느냐? 너와 호란과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다.”
“그러시죠.”
하지만 소빈당에 돌아와서도 이야기할 틈은 나지 않았다.
시현이 대문을 넘기도 전에, 처소에 남겨두었던 종자 하나가 달려 나와 고했다.
“나리마님, 원곡부사께서 만나러 오셨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단과 시현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단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 네. 저 스스로 이 마을에 걸어 들어온 이상, 피할 수 없는 재앙이라 이거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