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5
025화
* * *
호란이 감시병에게 물었다.
“시문 님 겉옷 어딨어?”
“이봐, 지금 줄줄이 나가겠다는 것만도 황당한데 압수한 물건까지….”
“압수?”
항변하는 감시병을 상대로 호란이 도끼눈을 했다.
“몸수색은 마력석 때문에 한 거잖아! 옷을 왜 뺏어? 니네 방랑족이야? 떼강도야?”
감시병은 곧바로 성난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무슨 소릴! 우린 치풍관 몫꾼이다!”
“근데 몫 없는 물건을 왜 가져가? 돌려줘!”
“…….”
감시병은 잠시 말을 못 잇더니 허탈한 얼굴이 되어서 옆방을 가리켰다.
“문제없는 물건은 옆방에 놔뒀어. 열어줄 테니까 문 뜯지 마.”
안에 들어가니 탁자 위에 시현과 단의 옷가지가 있었다.
두 벌 장포를 덧입고 매무새를 정돈하는 시현에게 단이 자기 두루마기를 내밀었다.
“나리님, 그 비단 도포 너무 눈에 띄어서 못 돌아다니십니다. 이걸 위에 걸치세요.”
“알겠다.”
단은 저고리를 걸치면서 혀를 찼다.
옷만 있고 빼앗긴 짐이니 도구는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계단을 내려가 대영관을 나갔다.
중간에 한 사람이 일행을 알아보고 불러세워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맨 앞의 호란이 너무 당당하게 가고 있어 말을 내지 못했다.
단이 슬쩍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시현에게 물었다.
“서문 앞 전황을 알고 싶으신 거지요?”
“그렇다.”
“그럼 이리 오십시오.”
단은 주위를 이리저리 건너보며 길을 잡기 시작했다.
시현이 놀란 얼굴을 했다.
“치풍관 지리도 아느냐.”
“예까지 들어와 본 적은 없습니다만, 지도는 눈에 익혀 두었습니다.”
단이 대수롭잖은 듯 대답했다. 시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볼수록 모를 이구나, 너는.”
“모르실 게 뭐 있고 아실 건 또 뭐가 있습니까. 그저 목숨 부지하려고 발버둥치는 가련한 반민 놈입지요.”
단은 북쪽 중간 문을 빠져나와 이리저리 길을 돌더니 서쪽 성벽 한쪽의 탑루로 일행을 인도해갔다.
성곽에 가까워지니 밖에서 함성과 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탑루 입구에는 반민 장정들이 근심 어린 얼굴로 창대를 쥐고 서 있었다.
“나리께서 전황을 보려고 하신다. 비켜드려라.”
단이 태연하게 말하자 반민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길을 비켰다.
일행에 하늘인이 있어 외지인이라고 생각을 못 한 것 같았다.
단이 문을 열자 별생각이 없는 호란도, 남이 길을 비켜주는 데 아무 의문이 없는 시현도 자연스럽게 탑루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단이 문을 걸며 중얼거렸다.
“이럴 때 어색하게 굴지 않지 않는 것만은 좋군요.”
“뭐가 말이냐?”
“아닙니다. 오르시지요.”
망루 위에도 반민 병사가 둘 있었다.
단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어 둘을 내려보낸 뒤 누대로 시현을 인도했다.
전선은 아직 성곽과 거리가 있었다.
커다란 대장석 두 개, 고만고만한 거석 여러 개가 쿵쿵 굉음을 울리며 전선을 몰아치고 있었다.
이미 깨어져 빛을 잃고 흩어져 있는 거석도 여럿이었으나 성한 것들이 더 많았다.
치풍관 병사들의 전략은 지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전열이 굵은 철봉을 내찔러 대장석의 접근을 막고, 그사이에 후열이 거대한 철추나 철구를 휘두르거나 던져 몸체를 깼다.
그러나 대장석이 주먹질을 하면 철봉은 금방금방 못 쓰게 되었다.
거석들은 벼랑을 허물고 서로 디딤돌이 되어주며 둔덕을 기어올랐다.
대장석을 저지하는 사이 더 작은 거석들이 기어 올라오면 막을 사람이 부족했다.
보고 있는 동안에도 거석 하나가 둔덕을 오르는 데 성공했다.
흐트러지는 대열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호란이 주먹을 쥐었다.
“이래서 수리가 몫꾼이 더 필요하다고 했구나.”
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시현이 말했다.
“호란,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느냐.”
“네!”
호란이 답하자 시현이 손을 뻗어 전장을 가리켰다.
“네 힘이면 대열의 허리에 짓쳐 드는 거석들을 어찌할 수 있겠지.”
“그럼요. 부수고 올까요?”
“그래주면 좋겠다.”
“잠깐만요, 나리님, 호란 호위님.”
단이 끼어들었다.
“시문 나으리, 이자들이 그러잖아도 호란 호위에게 눈독을 잔뜩 들였지 않습니까. 호란 호위가 거석을 한주먹에 깨는 걸 보여주기까지 하면… 일이 좋은 방향으로 갈 거란 생각이 안 듭니다요.”
“하지만 위급한 싸움 중이다. 저들은 목숨을 걸고 있다.”
시현이 설득조로 말했다.
“우리도 지금은 치풍관의 성벽에 의탁한 처지가 아니냐.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느니.”
단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지금 처지는 의탁이 아니라 감금이라 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시현에게 말로 통하려 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게 바로 전이었다. 그는 그냥 고개를 젓고 입을 닫았다.
“다녀올게요!”
호란은 아래를 가늠해보고 망루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적당히 벽을 닫으면 곧 전장 위였다.
“왼몸 하나!”
호란이 참전 신호를 외치는 것까지 본 시현은 등을 돌렸다.
“이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돌아가자.”
“잠깐만…. 잠깐 있어 봐.”
단은 그새 망루 아래의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신경질을 내며 뺐다.
“젠장, 연필까지 가져가는 놈들이 어디 있어! 연필도 본 적 없나!”
단은 탑루에서 몸을 쭉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전장이 아니라 성곽과 그 아래의 암벽, 아래로 향하는 지형이었다.
바깥에 시선을 고정해둔 채 단이 시현에게 물었다.
“야, 너 혼자 돌아갈 수 있어?”
“어렵겠다. 오면서 길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 어련하시겠어. 한평생 가마만 타셨으니 길 찾을 줄을 알 리가 있나.”
단이 투덜거리더니 몸을 안으로 들였다.
“가자. 어영부영하다가 트집 잡히면 털리는 건 나야.”
콰앙 하는 충격음과 함께 아래에서 환성이 터졌다.
굳이 내려다보지 않아도 호란이 밑에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 * *
거석 무리를 모두 물리치고 호란이 돌아왔을 때는 저물녘이었다.
시현과 단은 방 안에 얌전히 앉아 가져다준 음식 접시를 비워놓고 있었다.
호란이 두 사람의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하늘인 무리가 밀어닥쳤다.
“큰머리가 땅인을 보자고 한다. 당장 따라와라.”
세 사람은 곧바로 총치전으로 이끌려갔다.
총치가 정무를 보던 천정이 높은 정전에 수십의 하늘인이 도열해 있었다.
수리를 비롯해 색 띠를 맨 대장도 여럿 보였다.
시현이 걸어 들어오자 분위기는 곧바로 흉흉해졌다.
다들 주먹을 쥐고 눈에 불을 켜는 것이 땅인에 대한 미움이 켜켜이 쌓인 듯했다.
마흔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총치의 좌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이 사람이 땅인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큰머리인지, 얼굴과 몸 절반에 걸쳐 벼락에 지져진 흉터가 참혹하게 새겨져 있었다.
주문에 다친 후 치료가 온전하지 못했던 듯 일어서는 동작이 느리고 불안정했다.
아무리 몫이 커도 운신이 불편할 정도로 몸을 다치면 큰머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사람은 여전히 큰머리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인망과 지휘력이 남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당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현에게 말했다.
“치풍관 큰머리 사비가 완씨 시문을 보오.”
시현이 선 채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남운관의 완시현 문이다.”
사비는 다리를 끌며 천천히 당 아래로 내려와 시현 앞에 섰다.
그가 양 주먹을 맞대고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그대가 산 남측에 나타난 장군석과 거석 무리를 쳐서 좌군 대장 수리와 몫꾼 열여섯 명의 목숨을 구했다 들었소. 감사드리오.”
“마땅한 일을 한 것이다. 감사받을 일이 아니다.”
“목숨 값에 대한 보답을 하겠소. 치풍관과 나의 명예를 걸고, 지금부터 사흘간 그대의 무사와 안녕을 보장하겠소. 치풍관을 떠나도록 허할 수는 없으나 손님으로 대접할 것이오.”
정중한 사의에 붙은 의미심장한 단서에 호란의 표정이 변했다.
시현이 차분하게 물었다.
“사흘이 지나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이제부터 논의할 일이오.”
“그 논의에 내가 참여할 여지가 있겠느냐.”
“그 또한 논의하기에 달렸소.”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내게 물을 것이 있으면 묻거라.”
치풍관 사람들의 관심은 골짜기에 나타난 두 명의 괴인에게 있었다.
모들이 거석을 일으키는 광경을 치풍관 몫꾼 여럿이 목격했기에, 그들이 여러 도시에 거석을 몰고 온 주범이란 추측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사비 큰머리가 시현에게 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바가 있소? 피부색이 짙다는 걸 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중부인일지도 모르겠군.”
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다르다. 그들의 외모도 기색도 내가 본 어떤 이들과도 달랐다.
더구나 그들이 지닌 기색은 마치 하늘족과 같이 강성하나 제 몸 안에 든 기운을 밖으로 내어 거석을 일으킨다는 것은 일찍이 어디에서도 들은 바가 없다.
과연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대와 두 명의 수행은 그들의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왔다고.”
“그렇다.”
사비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오늘은 전투가 두 번이나 일어나 내가 일이 많으니 이만 자리를 물리겠소. 식사와 침소를 준비하게 할 터이니 쉬도록 하시오.”
“그리하마.”
시현은 짧게 답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총치전을 나갔다.
호란은 다른 무리의 큰머리를 대하는 예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서둘러 시현의 뒤를 따라 나갔다.
시종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단만 다시 한번 허리를 굽힌 후 자리를 떴다.
시현이 나간 후 사비가 곁에 선 몫꾼에게 몸을 기울여 물었다.
“저자가 다른 땅인마냥 마법을 못 쓰게 된 게 틀림없나?”
“아마… 그럴 겁니다. 몸을 철저히 뒤졌는데 마력석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사비가 혀를 찼다.
“인물은 인물이다. 남운관 완씨 시문이 법술로도 인품으로도 만인지상이라더니. 이 많은 몫꾼들이 죽일 듯 살기를 발하는데 눈썹 하나 까닥 않는군. 누가 보면 힘이 온전한 줄 알겠다.”
그날도 치풍관에는 사상자가 많았다.
벌어진 일을 수습하고 앞으로를 논의하고 나니 밤이 깊어 있었다.
사비는 근심에 차 침소를 향했다.
땅인 총치총령이 쓰던 넓고 호화로운 방은 볼 때마다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이만한 시설을 사용하지 않기도 뭐했다.
그들의 것을 다 차지하겠노라 결심하였으니 억지로라도 누려야 했다.
탁자 앞에 앉은 사비는 차려진 술잔을 기울이며 종에게 손짓했다.
“아까 말한 놈을 불러와라. 제 주인에게는 비밀로 무얼 고하겠다는지 모르겠군.”
“예, 이미 옆방에 기다리게 해놓았습니다.”
문이 열리고 하늘인 몫꾼의 감시하에 한 사람이 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사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간략하게 말해라. 나는 피곤하다.”
“물론입지요. 나리. 어찌 저 따위가 길게 시간을 뺏겠습니까요.”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단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