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56
256화
* * *
은실은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다. 앞길을 가로막히지만 않으면 추격이 아무리 많이 붙든 따라잡힐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앞을 가로막힐 걱정도 안 했다. 성품에는 일관성이 없어도 기감만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채 도련님이다. 채 도련님이 저 방향에 병사가 없다고 하면 정말 없는 거였다.
그래서 은실은 흰바위마을을 빠져나간 뒤, 숲에 몸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고 직선으로 질주했다. 이대로 고개를 몇 개 더 넘으면 앞서 마을을 빠져나간 일행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이놈의 대운관과도 영영 안녕이었다.
그런데 고개 하나를 넘기도 전에 등 위의 채원이 말했다.
“은실아. 누가 오는구나.”
채원은 두꺼운 모피로 몸을 덮고, 부딪혀 오는 바람을 피하려고 은실의 등 뒤에 딱 붙어 있었다. 목소리에 급한 기색이 없길래, 은실은 방향을 꺾으면 되겠거니 하고 시선을 앞쪽 멀리 꽂았다.
“어디요? 앞쪽이에요?”
“아니, 뒤.”
곧 은실도 뒤통수를 찔러오는 기세를 느꼈다. 은실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가 펄쩍 뛰었다. 마을 쪽에서 호란이 무서운 빠르기로 은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으아아아! 따라오지 마!”
은실은 소리치면서 속도를 최대한 올렸다. 마을 동헌에서 호란의 용서 없는 공격을 받아 본 은실은 대운관 추격대 수십 명보다 호란 하나가 더 무서웠다.
죽어라 달리는 보람도 없이 등 뒤의 기세가 차츰차츰 가까워졌다. 채원이 느긋하게 말했다.
“저 아이는 은실이 너보다 싸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도 빠르구나.”
“안 알려주셔도 저도 알거든요!”
“저 아이는 신체에 담긴 기운이 너보다 크고, 몸속의 기운을 빠르게 돌리거나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감각이 있다. 그래서 너보다 강한 것이다.”
“이유 분석 같은 건 더 필요 없고요!”
“왜 필요가 없느냐. 내가 네게 몸에 기운 담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 다 저런 경지를 위해서인데.”
“도련님, 좀….”
화통이 터진 은실이 일순 걸음을 흐트러뜨린 사이, 호란이 폭발하듯 속도를 높여 은실의 왼쪽에 붙었다. 은실이 원망스러운 소리로 외쳤다.
“으아아! 채 도련님! 진짜 도와주세요!”
“괜찮아. 안 때려.”
호란이 말했다. 그는 은실에게 달려들거나 채원을 붙잡는 대신 은실의 옆에서 속도를 맞추어 함께 달리고 있었다.
“어?”
“괜찮으니까 앞에 보고 뛰어.”
은실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속도를 일정하게 늦췄다. 그가 호란에게 물었다.
“우리 도련님 잡으려고 따라온 것 아니야?”
“음, 시문 님이 그러라고는 하셨는데….”
호란은 고개를 돌려 채원에게 물었다.
“채인 님, 돌 인간의 근거지를 찾고 계신다는 게 사실이에요?”
“그렇단다.”
“세상을 구하려고요?”
“그렇다.”
“가짜 율지 나리도요? 세상을 구하려고 사람들을 속인 거예요?”
“그래. 그이도 우리 학당 사람이다. 변고 이후 지은학당에 남은 모두는 줄곧 뜻을 같이하여 움직이고 있단다. 참여하는 동기도 일하는 방식도 각각 다르지만.”
“마을에 있던 사람들 말고도 지은학당 사람들이 더 많이 있는 거군요….”
호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채원과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그러면 제 생각에, 채인 님도 일행분들도 그냥 이대로 가셔도 될 거 같아요.”
“진짜?”
은실이 놀란 나머지 몸을 휙 틀었다. 거센 바람을 정면으로 받게 된 채원이 은실의 등을 두드렸다.
“잠깐 멈추거라.”
은실과 호란은 발을 멈췄다. 은실의 등에서 내려온 채원은 바람을 막아줄 만한 큰 암석 뒤로 자리를 옮겼다.
채원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위께서는 나를 추격하라 명하셨을 텐데. 너는 네 주인의 명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냐?”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호란이 말했다.
“채인 님이랑 다른 사람들은, 대운관에서 가져간 마력석으로 돌 인간이 기운을 숨긴 곳을 찾아내실 거지요? 그다음에도 또 뭔가를 하실 거고요.”
“그럴 계획이다.”
채원이 말했다. 호란은 웃는 듯 아닌 듯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여행하면서 힘들 때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고 모두를 구하려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나. 세상 전부가 걸린 일인데, 나서는 사람이 이렇게 없나…. 도와주는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은 자기네 삶터 지키는 일이 먼저였고요.”
“원래 자리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 더구나 지금은 그 일조차 버거운 시국이 아니냐.”
“하지만 어떨 땐 세상 모두가 시문 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걸요. 아무리 시문 님이라도 그건 너무 힘들어요. 누군가는 몫을 나눠 져야 해요.”
채원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호란은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되게, 기뻐요. 같은 걸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게,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같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게…. 시문 님도 분명 기쁘실 거예요.”
“야아….”
은실이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기쁘다! 그래도 세상에 누구 하나는 우리 도련님 헛짓거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구나! 세상이 멸망한다는 얘기 설파하다가 무슨 미친 종교인 취급받고, 극상 주제에 벼슬도 서원 터도 뺏기고, 종친회에 욕먹으며 가산만 털어먹는 세월이었는데…. 끝에 가서 뭐가 되긴 하려나 보구나, 진짜.”
은실의 말에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호란이 물었다.
“세상이 멸망한다고 했다가 미친 사람으로 몰렸다고요? 설마, 채인 님은 변고가 나기 전부터 그걸 아셨던 거예요?”
“징조가 명확했다. 우리에겐 조사 류해선 인께서 남기신 경고가 있었고.”
채원이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시선을 멀게 하여 마을 쪽을 보았다.
“하지만 더 자세한 이야기는 후일 시문을 뵐 때를 기약해야겠구나. 마을에서 추격대가 몰려나오고 있다. 나와 은실이는 이만 움직이마.”
“아, 네! 그럼 채인 님을 다시 만나려면 귀수관으로 가면 되나요? 지은학당은 관성 안에 있나요?”
“아니다. 시문께서 오시면 우리 쪽에서 찾아가마. 참고로 관성에 있는 지은서원은 간판만 올린 유령 서원이다. 우리 진짜 지은학당은 관에 불량도당으로 찍혀 모두 도피 중이다.”
“네에….”
호란은 당장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질문 하나 했다가 후일에 천천히 들어야 할 이야기가 두 배로 늘어났다.
호란은 몇 걸음 물러서서 채원이 몸을 감싼 모피를 추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채원이 물었다.
“무어 묻고픈 말이 더 있느냐? 아직 추격대와 거리가 있으니 한두 마디 정도는 괜찮다.”
“아니, 이건 중요한 건 아닌데….”
호란이 멋쩍게 말했다.
“혹시 가짜 율지 나리, 진짜 이름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시문 님한테도요.”
채원의 눈이 약간 커졌다. 곧 그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나중에 만나면 본인에게 물어보거라. 그런데 그 가짜 이름이 진짜 이름과 아주 비슷하긴 하단다.”
“가시죠, 도련님!”
은실이 등을 들이대며 재촉했다. 채원이 두 팔로 은실의 목을 감자, 은실은 호란에게 눈인사만 하고 바로 바닥을 찼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호란은 바위 곁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채원과 말을 나누고 나니 율비에 대한 추측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렸다. 그래도 아직은 추측이었다.
율비는 대릉읍에 와서 관리 일만 했지 마법을 쓴 일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전투 중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호란은 율비가 은실에게 말을 높이는 것을 들었다. 호란은 상황에 따라 말씨가 바뀌는 사람을 또 한 사람 알고 있었다.
그 사람도 율비처럼 마음 씀씀이가 세심하고 일머리가 있었다. 바탕은 선한데도 거짓말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었다. 관의 권위니 격의 위엄이니 하는 것을 신발짝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세간에 흔한 특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벼슬아치를 사칭하는 것은 대죄다. 격의 사칭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만약에 제 추측이 맞다면 율비의 죄가 얼마나 커질지, 다른 사람들은 물론 시현마저도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호란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율비의 진짜 이름을 안다 한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호란은 율비를 생각할 때 겁나고 걱정되기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호란은 자기의 추측을 추측인 채로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좋은 기분으로 흰바위마을로 향했다.
* * *
원진과 병치가 추격대를 보내네 한씨 율지의 한패를 색출하네 하고 난리를 부리는 사이, 시현과 단은 슬쩍 관아를 빠져나왔다. 상황을 정리하게 돕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 부사가 흥분을 삭이고 상황을 받아들인 뒤의 일이었다.
“어서 처소로 돌아가 쉬자꾸나. 너도 하루 종일 피곤하겠다.”
시현이 말했다. 목소리에 섞인 기분 좋은 기색을 느끼고 단이 코웃음을 쳤다.
“뭐야. 오밤중까지 헛고생은 혼자 다 하고서, 완전 홀가분해 보이네.”
“홀가분하다. 내 입장에서는 그 돌을 대관성에 보내라고도 타관 상인에게 팔라고도 하기 어려웠다. 명목상 관의 소유임은 분명하지만 지금 대운관 관인들이 어떠한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길에 버리는 쪽이 속이 편하지.”
단은 혼자서 미간을 찡그렸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처치 곤란한 물건에 대한 이 인간의 소회가 어째서 길에 버리는 쪽으로 흘러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그게 탐나지 않았어? 돌 인간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됐을 수도 있잖아.”
“말했듯이 나는 작은 돌 여럿을 쓰든 큰 돌을 쓰든 효율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너무 짐스럽지 않으냐. 여러 가지 의미로.”
“하긴 무게만 생각해도…. 전용 수레를 새로 짜야 했을 거야.”
단은 남아 있는 귀찮은 문제들을 전부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빈당 앞에 다다르자 처음 단에게서 돈주머니를 받았던 하늘인 머리가 병사들을 데리고 문을 지키고 있었다. 시현을 본 군인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섰다.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안 계신 동안 아무도 얼씬 못 했습니다.”
시현이 물었다.
“너희는 내가 처소를 지키라 명한 호위들이 아닌데. 원래 있던 이들은 어디로 갔느냐? 왜 너희가 여기에 있느냐?”
“어, 그건….”
머리가 더듬거렸다.
“율지 치읍감님이 낮에 말씀하시길, 자시가 되면 가서 조용히 교대하라 하셨습니다. 교대한 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처소 시중꾼은?”
“그자도 호위들과 함께 물러갔습니다. 야참과 침소 준비는 모두 끝내 놓았다고….”
“과연. 아마 한참 전에 마을을 나갔겠지. 율지가 참석과 함께 제 사람들 빼낼 준비도 처음부터 해놓았구나.”
시현이 쓴웃음을 짓고 다시 물었다.
“너희는 양 부 소속이 아닌 모양이지? 지금 찰령부와 원곡부 병사들은 모두 정신이 없을 텐데.”
“저희는 한수읍성에서 파견됐습니다. 시장 관리와 치안 유지가 임무입니다.”
“알겠다.”
시현은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처소로 들어갔다. 대청을 오르며 단이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네. 두 부사와 함께 시장을 관리하는 게 어째서 대릉읍이 아니고 한수읍성인지 의아했는데. 그것도 자기가 달아난 뒤를 위한 대비였나.”
“훌륭하지 않으냐. 퇴임 후의 일까지 미리 내다보고 혼란이 없도록 안배하다니. 관인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근데 걘 관인이 아니라고. 퇴임이 아니라 야반도주를 한 거라고.”
핀잔하던 단은 대청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대청 위에 음식 소쿠리와 짐꾸러미가 즐비했다. 여러 가지 양식, 연료통과 수통, 그 외에도 여행에 필요할 만한 여러 가지가 정갈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몇 개의 음식 소쿠리 중 하나를 열어본 시현이 말했다.
“가래떡과 소고기가 있구나. 떡국 재료를 준비해준 것 같은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