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57
257화
* * *
“뭔 놈의 떡국? 미쳤나, 우리더러 여기서 설까지 쇠고 가라고? 자기들 사고 친 거 뒤처리하면서?”
단이 인상을 확 썼다. 하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누그러지는 것이 아주 싫지만은 않아 보였다.
시현이 말했다.
“딱히 뒷수습을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머무는 며칠간은 두 부사가 이 마을과 대릉읍에 분풀이를 못 할 테지. 그리고 이제 곧 대관성에서 신년 하례가 올 텐데, 그것을 받으러 주둔지로 돌아가고 나면 여기 일은 더 흐지부지해질 것이다. 둘 다 그간 참석에 정신 팔려 내팽개쳐 둔 일이 산더미일 테니.”
“그거였군. 처음부터 우리 발길만 붙잡는 게 율지의 노림수였네. 경매에 입찰을 해달라느니 하는 건 다 연막이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내 판단을 늦춘 것이다. 원칙대로 했다면 나는 사연을 들은 즉시 돌을 대관성으로 수송하라 명했을 테니까.”
시현은 짐꾸러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이 물건들은 여러모로 마음을 써준 것 같지 않으냐? 우리 출발이 늦어지기만을 바랐다면 이렇게 행장 준비까지 도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쎄다. 이렇게 거절하기 애매한 뇌물을 기술적으로 밀어 넣는 걸 너네는 꼭 마음 쓴다느니 성의 표시라느니 하고 부르더라. 그런다고 받아먹은 물질과 노동이 갑자기 정신적인 뭔가로 바뀌냐?”
단은 빈정거리면서도 부지런하게 소쿠리와 짐을 확인하고 부엌에 가져갈 것과 수레에 실을 것, 다시 쌀 것으로 나눠 쌓았다. 내용물이 나름 괜찮은지 하나 들여다볼 때마다 얼굴이 점점 더 풀리고 있었다.
시현은 대청을 건너 양쪽 방문을 열어보았다. 시현의 방에도 단과 호란의 방에도 보자기로 덮은 야참상이 놓여 있었다. 침구와 갈아입을 옷, 소세 물도 준비가 끝났고 그을음 하나 없이 맑게 닦인 유등이 은은한 불빛을 흘리고 있었다.
단이 등 뒤에 와서 서자 시현이 말했다.
“최소한 한씨 율지에게 일솜씨가 있는 것만은 너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만이 아니라 너와 호란도 위하는 일들 같은데.”
“아니지. 내가 아니라 완씨 시문에게 딸린 잡일꾼을 위하는 거지.”
“명목이야 아무러면 어떠냐. 네가 신경을 덜 쓰고 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나는 마음에 꼭 들었다. 설까지 쉬고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기로 하자.”
“결국 한씨 율지한테 홀랑 넘어가는 거잖아….”
단이 한숨을 쉬는데 대문이 힘차게 열렸다. 한달음에 대청으로 뛰어 올라온 호란이 활기차게 말했다.
“채인 님이랑 얘기하고 왔어요! 지은학당 사람들은 지금 거처가 일정하지 않대요. 우리가 귀수관 근방에 가면 그쪽에서 찾아온다고 했어요.”
단이 더욱 지친 얼굴을 했다.
“그렇지. 얘도 물론 다르지 않지. 붙잡긴커녕 무슨 배웅을 갔다 왔네. 너 걔들이 결국 그 참석 들고 튄 건 알아? 관아에는 가짜 갖다 놓고.”
“그랬구나. 어째 그 비슷하게 될 거 같았어. 뭐 괜찮지 않아? 어쨌든 우리 편이잖아.”
“언제 또 마음대로 우리 편이야?”
“하긴 단은 좀 그러려나. 뺏긴 건 대운관 마력석이고 단은 대운관 사람이니까…. 그건 미안.”
“야, 내가 무슨….”
단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소쿠리 몇 개를 겹쳐 들고는 주채를 빙 돌아 부엌 쪽으로 갔다.
호란이 다른 짐을 주섬주섬 모아서 뒤를 쫓아갔다.
“그래도 세상을 구하면 대운관에도 결국은 이익이잖아. 응?”
“그런 거 아니거든.”
“와, 하얀 떡이다! 지금 먹어도 돼?”
“안 돼. 뒀다가 떡국 끓일 거야.”
“진짜? 나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어.”
“나도 어릴 때 말곤 구경도 못 한 지가 몇 년이다. 무슨 요즘 같은 시국에….”
둘의 이야기 소리가 멀어지는 사이 시현은 대청의 꾸러미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물건 나르는 걸 도울까도 생각했지만 미리 분류해 둔 걸 아무 데로 가져갔다가 단에게 구박만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쉬는 것도 의무다. 내일은 내일의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고. 시간도 자정이 넘었다. 단은 저걸 다 정리하지 않고는 결코 자러 가지 않을 것 같지만, 일손을 덜라고 남이 보낸 호의마저 꼭 자기 일거리로 만들고야 마는 것은 단 자신의 문제가 아닐까?
시현은 다양하게 합리화를 하며 제 방에 쓱 들어가 버렸다. 아랫목에 새하얀 이부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35. 변방
남운관이 세상의 남쪽 끝 도시라면 귀수관은 세상의 북쪽 끝 도시다. 그러나 두 지역에는 다른 점이 많다.
남운관 남쪽에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야가, 더 가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사막이 펼쳐져 있다. 반면 귀수관 북쪽에 있는 것은 겹겹이 봉우리를 세운 드높은 산맥이다. 귀수관에 사람이 정착한 지 천 년이 더 지났지만, 이 산맥 너머로 사람이 갔다가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다. 남방 끝터 사막을 넘어가본 사람이 없듯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세상에는 항상 빈 땅이 넘치고 인구는 적었다. 삶터를 옮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비옥한 중부로 눈을 돌렸다. 치풍산 너머에서 유전과 소금 광산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남방 끝터는커녕 남운관 지역조차 아직 개척되지 않았을 것이다.
단은 여각 1층의 식탁에 지도를 펼쳐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설마 산을 넘어야 하는 일은 없겠지….”
그가 중얼거렸다. 조그만 여각의 1층은 음식과 술을 파는 장소였지만 다른 손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괜히 발만 흔들고 있던 호란이 물었다.
“산은 지금도 넘고 있잖아? 관성까지 가는 길도 대부분 산이라며.”
“그 산을 말하는 게 아니야.”
단은 봉우리 표시로 뒤덮인 지도 맨 위쪽을 노려보았다. 지도인 척 이것저것 그려놓긴 했지만 윗부분은 틀림없이 모양만 대충 갖춘 가짜일 것이다.
“그 채인이란 양반이 돌 인간의 비밀 장소를 찾아서 북방 끝터를 뒤지고 있다고 말했잖아. 광활한 북방 끝터를.”
“그랬지.”
“근데 광활하다는 말은 남방 끝터 이야기할 때나 쓰지, 북방 끝터를 두고 쓰는 말이 아니란 말이야.”
단은 귀수관 속령 위쪽에 펼쳐진 산간 지형에 손가락으로 타원을 그렸다.
“전부 산이잖아. 어디가 광활하냐?”
“넓다는 얘기를 하신 거 아닐까?”
“아니야. 광활하다는 건 넓은 거에 더해서 시야가 멀리까지 트였다는 의미야. 그 관상만 봐도 먹물로 이루어진 거 같은 양반이 말을 허투루 썼을까? 심지어 법술사인데?”
단이 불행한 표정으로 이마를 감쌌다.
“설마 북방 백벽 너머에 무슨 광활한 평지 같은 게 펼쳐져 있고, 우리가 백벽을 넘어서 또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근데 나는 안 좋은 촉은 꼭 맞는데. 제발 시발….”
“괜찮아. 만약에 그런 평지가 있다고 해도 그걸 안다는 건 채인 님이 그 산맥을 넘어봤다는 이야기잖아. 그럼 우리도 넘을 수 있어.”
호란이 자신 있게 말했다. 단은 얼굴에 어린 불행을 더욱 깊게 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일행이 흰바위마을을 떠나 귀수관 속령으로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여정은 무난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속령 안쪽으로 들어오자 거석을 마주치는 횟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읍성 단위로 관군이 주위를 순찰하며 거석을 처치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대운관과의 경계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석에게 짓밟힌 마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곳곳에 산과 골이 많아 속도를 내기는 어려웠지만 몸과 마음은 훨씬 편했다.
문이 열리고 여각 주인이 들어왔다. 무거운 곡식 자루를 들고 뒤뚱뒤뚱하고 있길래, 호란이 얼른 가서 자루를 받아주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리! 제가 할 수 있는데….”
“아냐. 이거 어디다 둘까?”
호란이 부엌에 다녀오니 주인은 탁자 옆에서 단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방에 군불 들여드렸는데 왜 여기 나와 계세요, 춥게스리.”
“저는 입식 탁자가 편해서요. 옷도 따뜻하게 입었고.”
단은 누빔옷 위에다가 모피로 된 긴 반비까지 걸치고 있었다. 말로는 타락의 증명이라고 부르면서도 한번 걸쳐 보니 벗을 마음이 안 드는 모양이었다.
호란이 다가가자 주인이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이 나리는 누빔옷도 아니잖아요. 어머나, 신발도 안 신으셨네!”
단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항상 신 신으시라, 뭐라도 더 입으시라 하죠…. 그런데 절대 말을 안 들으십니다.”
단의 목소리는 완전히 포기했다는 투였다. 호란이 말했다.
“난 안 추워. 그리고 신발 신어 봤자 금방 밑바닥이 없어지는걸.”
“신고서 전력질주를 하시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신으면 못 뛰는데 왜 신발을 신어? 그리고 예절 지켜야 하는 자리에서는 나도 잘 신고 다녀.”
여각 주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세상에…. 진짜로 발 안 시려우세요?”
“좀 차갑긴 한데 시려울 정도는 아니야. 시문 님이 그러시는데 나는 몸에 기운이 많이 돌아서 괜찮대.”
“그래도요. 보는 내가 다 춥네. 화로라도 가져다드려요?”
단이 지도에서 고개를 들었다.
“됐습니다. 연료는 최대한 아껴야죠. 이런 시국에.”
“석탄은 넉넉해요. 어차피 손님도 거의 없고, 좀 있으면 날도 풀리기 시작할 거고요.”
“넉넉할 정돕니까?”
단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일행이 머무는 여각 마을은 크기도 작고 하늘인도 많지 않았다. 험한 고갯길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면 거석에게 몇 번을 짓밟히고도 남았을 곳이었다. 더구나 이런 길목 마을은 사람들의 이동이 줄어들면 금방 물자가 마르곤 했다.
그런데도 이 마을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밥상차림도 박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표정도 상대적으로 밝았다.
“변고가 난 지 한참 됐는데도 이 동네는 형편이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식량 사정도 괜찮은 것 같고.”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아휴. 우리도 그동안 내내 죽는 줄 알았어요! 통행은 뚝 끊어지고, 식량도 연료도 떨어져 가고, 거석이 점점 더 늘어나서 가을께부터는 채집도 제대로 못 다니게 됐었죠. 지난달까지만 해도 읍성으로 피난을 가냐 마냐로 동네 하늘인 나리들이 종일 다퉜는걸요.”
“그런데 어떻게 괜찮아진 겁니까?”
“해 바뀌자마자 관에서 구휼을 왔답니다.”
주인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읍성도 아니고 관성 법군 나리들이 오셨어요. 군대도 잔뜩 데리고요. 물자도 이것저것 넉넉하게 주시고, 근방에 거석 놈들도 싹 치워버렸어요. 그래서 이제는 채집도 가고 하늘인 나리들이 광산에 탄 캐러도 가고 다 할 수 있어요.”
“대단하네.”
호란이 탄복했다.
“성이랑 마을만 잘 지키는 게 아니라 식량 떨어지는 것까지 신경 쓰다니. 귀수관 땅님들은 전부 좋은 사람들인가 봐.”
“그럴 리가요?”
단이 회의적으로 말했다. 여각 주인이 쿡쿡 웃었다.
“원래 귀수관이 거석 퇴치 하나는 그 어디보다 철저하지요. 여기는 다른 지역보다 거석이 많이 생기잖아요. 조금만 놓아두어도 거석이 순식간에 불어나서 관성까지 위협하니까, 변고 전에는 법군 나리들이 한 주도 안 빼놓고 속령 끄트머리까지 순찰을 다녔어요.”
“변고 후에도요?”
“그건… 한동안은 안 그랬어요.”
주인이 약간 말을 망설였다.
“변고 후 초기에는 그래도 퇴치를 나왔는데,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특히 이 동네는 마력석 광산도 없어서.”
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갈수록 마력석이 축나는 게 아까워졌겠죠. 아무리 북방이 마력석 산지라도 무한하게 쌓아둔 게 아닐 테니까.”
“맞아요. 작년까진 소문도 아주 흉흉했어요. 마력석 안 나는 동네는 전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 주변 읍성이 성문을 닫아걸고 피난민을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그런데 갑자기 방침이 바뀌었다? 희한하네요.”
단의 얼굴에 의구심이 가득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