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6
026화
* * *
사비에게 머리를 깊이 숙여 예를 한 뒤, 그가 공손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하고 어리석은 것이 넘겨짚는 말을 몇 마디 하겠습니다. 치풍관의 하늘인 나리들은 두 가지 원을 가지고 계시지요.
하나는 당장 거석으로부터 치풍관의 물과 백성을 지키는 것이고, 둘은 이후 영구토록 땅인에게 간섭받지 않을 힘을 키우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법 제대로 짚었다.”
“제게 그 두 가지 모두에 받침이 될 비책이 있다면 들어주시겠습니까?”
사비의 미간이 움직였다.
“네 주인이 아니라 너에게 비책이 있다고? 아니지. 네 주인은 땅인이니 땅인을 막을 계책을 내놓고자 할 리가 없군. 좋다. 앉아보아라.”
사비가 반대편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단이 앉자 그가 말했다.
“네 짐을 수색한 이로부터 보고를 들었다. 가진 공구만 보아도 갖은 기술에 능한 이 같으니 가능하면 우리 도시에 두고 기술자로 쓰고 싶다 하던데.”
“천한 몸으로 먹고살려다 보니 잡스러운 기술만 느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나리께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런 잔재주 이야기가 아닙니다.”
안경 안쪽 단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치풍관은 하늘이 내린 요새이고 치풍산에서 나는 쇠와 구리는 땅 위에 제일이지요. 거기에 너른 초석 지대가 있고 유황도 얻기 쉽습니다.
그러니 이는 실은 비책이라고 할 것도 아닌, 모두의 눈앞에 나와 있는 답입니다.”
그가 탁자 너머로 사비에게 몸을 기울였다.
“제가 거석을 상대할 수 있는 화포를 만들어드리지요. 대신 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땅인 양반을 데리고 산을 내려가게 해주십시오.”
사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리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화포? 화약으로 쏘는 포 말이냐?”
“예.”
“치풍산에 화약 재료도 많고 화약 장인도 여럿 있긴 하지. 하지만 화약은 사고만 많이 나지 위력은 별로 없는 거 아니었나?
일전에 광산에서 크게 화약 사고가 난 후로 관에서 화약을 써서 채굴하는 것을 금했다. 화포도 낭비에 비해 실익이 없다고 안 쓴 지가 오래됐다.”
단이 웃었다.
“하하, 나으리께서도 순진하시네요. 그 금령을 내린 것이 누구입니까? 하늘인 나리들입니까?”
사비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말했다.
“아니다. 땅인이다!”
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땅인들이 세상에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화약과 화포입니다. 그들은 기운을 읽을 수 있어 누가 마법을 쓰려 하면 서로 알 수 있습니다. 기세 넘치는 하늘인 나리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그 또한 알 수 있지요.
하지만 화약이 지닌 기운은 생각만큼 크지 않아 다른 물성과 구분을 못 합니다. 빈집 같은 곳에 화포를 숨겨놓고 땅님이 행차하실 때 쾅 쏴버리면 아마 우리 시문 나리라 해도 막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예, 오직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니 금한 것입니다. 화약은 제대로 다루면 위험하지 않습니다. 위력도 충분합니다. 능히 거석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땅인과도 싸울 수 있고.”
“그렇지요.”
사비는 생각에 잠겨 몇 번이나 턱을 쓰다듬었다. 입술까지 미친 흉터 자국을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증명할 기회를 주시려면 나리께서 믿을 수 있는 치풍관 화약장과 화기장을 불러주시고, 제 짐을 잠시 돌려주십시오.”
“밤에는 잠을 자야지. 내일….”
사비가 말하는데 단을 감시하려고 붙어 있던 수하가 귀띔했다.
“실은 제가 미리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럴싸한 생각이 들어 장인들을 불러놨습니다.”
사비가 단에게 눈총을 보냈다.
“이 자식, 사람을 빨리도 구워삶는군. 그래도 일이 빨라서 나쁠 건 없지. 불러.”
곧 반민 장인 넷이 들어왔다.
짐을 돌려받은 단은 그중 중간 크기의 멜주머니 하나를 싹 비우더니 솔기를 북 뜯었다.
두 겹 천으로 된 주머니를 완전히 뜯어 펼치자 천 위에 수 단락의 글귀와 도면 두 개가 드러났다.
사비는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소리글자와 뜻글자, 숫자와 기호가 복잡하게 쓰여 있어 소리글자나 겨우 아는 사비로서는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장인들은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허락도 받지 않고 천에 달라붙어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화약 제조법이잖아? 배합이 특이하네. 이 제조법은 남방서 쓰는 것이 아닌데? 저치 북방 사람이구먼?”
“아니야. 북방 것하고도 달라. 이거는… 이게 되나? 될 법은 한데….”
“철탄자를 쓴다라. 하기는 거석 상대면 아깝지 않지.”
“화포 구경이 한 자 두 치? 이렇게 커서 위력이 나오겠어?”
뒤에서 단이 끼어들었다.
“나옵니다. 장약을 충분히 쓰면 됩니다.”
“포가 깨지지는 않겠소?”
“정확한 양을 써야지요. 그리고 탄자의 크기도 딱 맞아야 합니다.”
“실제로 만들어서 쏴보기는 했소?”
“해 봤습니다. 이 포를 숨겨 가지고 다니며 거석 잡는 데 사용하는 상단이 이미 여럿입니다.”
“허허…. 반동은 어떻소?”
설왕설래를 보고 있던 사비가 탁자를 쿵 두드렸다.
“복잡한 얘기는 나중에 너희들끼리 해라. 그래서, 이 녀석이 하는 소리가 가능성은 있는 거냐? 정말 화포로 거석과 싸울 수 있어?”
“있지요.”
“그건 있습니다.”
장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세상에 화약 만져본 놈치고 그 생각 안 해본 놈 없을 겁니다. 그저 관에서 허가를 안 하고 저희 연구가 부족하니 미처 실현을 못 한 것뿐입니다.”
“저 친구가 가져온 화약 조합과 포 주조법이 꽤 그럴듯합니다. 만들어 봐야 알겠지만 읽어만 봐도 우리 것보다 더 진일보한 기술입니다. 화포를 쓰시고자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위력은 얼마나 될 것 같나?”
사비의 물음에 제일 나이 많은 장인이 답했다.
“장군석이니 대장석 같은 것은 저희가 함부로 예측을 못 합니다만… 보통 거석은 너끈히 거꾸러뜨릴 것 같습니다.”
“잘만 맞으면 단발에 무늬돌도 깹니다. 매번 되는 건 아닙니다만.”
단이 한 번 더 끼어들었다.
사비는 얄밉다는 듯 단을 흘겨보고는 장인들에게 명했다.
“됐으니 오늘은 물러가라.”
장인들은 사비에게 굽신굽신 절하면서도 단의 비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명이 천을 쥐고 놓지 않은 채 물었다.
“이거… 이거 베껴도 되나?”
단이 사근사근하게 답했다.
“물론이죠. 나중에 돌려주시기만 하면….”
“일단 놓고 가! 나중에 해!”
사비가 성질을 부려 장인들을 쫓아냈다.
모두 나가고 단둘이 되자 사비가 손가락을 까닥여 단에게 가까이 다가오란 신호를 했다.
단이 다가와 옆에 서자 사비가 들었던 손을 슥 폈다. 그리고 단의 웃옷 뒤를 움켜잡더니 그를 탁자 위에 찍어 눌렀다.
“헉!”
사비는 별로 힘쓰는 기색도 없었지만 단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야 했다.
단을 꾹 누른 채 사비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네 꿍꿍이가 뭐냐?”
단은 허우적거렸지만 쇳덩이에 짓눌린 듯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탁자를 붙든 채 그가 사정했다.
“큭, 나리, 저는 그냥… 우리 시문 나리를….”
“닥쳐.”
사비가 차갑게 말했다.
“나는 기술도 모르고 거래도 모른다. 그래도 반민 놈들이 하는 양은 좀 알지. 저 닳고 닳은 치들이 저렇게 환장하는 걸 보면 네가 내놓은 기술은 큰돈이 된다. 맞지?”
“맞, 맞습니다….”
“돈 되는 기술을 그냥 내놓는 반민은 없어. 넌 말로는 완씨 시문을 풀어달라고 하면서도 나한테 약속 한마디 채근을 안 했다. 그러면서 밑천부터 홀랑 풀어? 말이 돼?”
사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단이 끙끙 신음을 뱉었다. 사비가 말했다.
“네 진짜 목적이 뭐냐? 다른 말 붙이지 말고 목적만 말해라. 말재주 부리려 하면 죽는다.”
단이 겨우겨우 말했다.
“기술을, 풀어놓는, 거….”
“딴소리 덧붙이지 말라고 했다.”
사비의 목소리가 엄해지는 만큼 단의 목소리도 다급해졌다.
“그게, 그게 목적입니다! 기술 퍼뜨리는 게 목, 목적입니다, 큭, 나리, 제발….”
“…….”
사비가 누르던 손을 풀자 단은 주르륵 바닥에 미끄러졌다.
주저앉은 채로 쿨럭거리며 그가 사정했다.
“기술을 세상에 퍼뜨리는 거 자체가 목적입니다…. 정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목적이 된다는 거냐.”
단이 처량한 얼굴로 사비를 올려다보았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려면 쓸모없는 것의 신세타령이 되어버리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짧게 해라.”
단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한탄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두부터 짧을 것 같지가 않아서 사비는 얼굴을 찡그렸다.
“저도 어릴 적엔 눈치도 없고 물정도 모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관에 소속되어 장인 일을 하다가 누구한테 미움을 사서 화약이니 화포를 다루는 화기도감으로 쫓겨가게 되었지요.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팔대관성은 저마다 화기도감을 두기는 했으나 다른 도시를 견제하느라 구색만 갖춰두었을 뿐 제대로 운영하는 곳이 없습니다요.”
“땅인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예. 하여간 일을 하지 말라고 거기에 보낸 것인데, 저는 또 눈치도 없이 화약을 개량합네 포를 개량합네 하고 일을 쳐버린 것이지요.
그것을 거석과 싸우는 데 써주십사 하고 땅인 나리들에게 가져다 바쳤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비가 피식 웃었다.
“죄를 받았나?”
“당장 알지도 못하는 죄를 쓰고 죽을 목숨이 된 것을 수를 써서 도망을 나왔습니다요.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겨우 남운관에 자리를 잡고 사람답게 살아볼까 했더니 또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
단은 사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나리, 저는 억울하고 분합니다. 가진 재주로 도움 되는 것을 만들어 널리 쓰임 받고 싶었을 뿐인데 고향도 잃고 가족도 잃고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거 제가 만든 포가 세상 곳곳에서 거석을 깨는 걸 봐야겠습니다. 저를 쫓아낸 땅님들에게 이것 보라고 내가 맞지 않았냐고 보여주고 말 겁니다.”
사비는 탁자에 놓인 도면을 곁눈질했다.
그는 기술을 몰랐지만 도면이 누구 것을 베꼈거나 하루 이틀에 완성한 것이 아님은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 그려진 후 몇 년이 흐른 듯 선이 변색되어 있었고, 도면도 제조법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치고 덧써가며 개선해온 흔적이 보였다.
사비가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그게 네 목적이라면 어째서 땅인의 길잡이를 하고 있지?”
단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리, 제가 지금의 치풍관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겠습니까. 저는 오늘 땅님들을 범할 기술이라고 자랑하면서 관성 화기도감의 화포 기술을 유출했습니다. 어느 동넬 가서도 사형감입니다.”
“그것은 그렇다.”
“불량한 기술을 숨긴 놈이 세상을 돌아다니기엔 그 시문 나리의 수행만큼 의심 안 받을 자리가 없습니다요. 좀 아는 것 많은 티가 나도, 아, 과연 시문이라 길잡이도 다르구나 하고 말지요.”
단이 헤실헤실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나으리 곁에 있으면 이 동네 저 동네 중한 정보 얻고 사람 만나기도 쉽고요. 오늘도 보십쇼. 저 같은 것이 단신으로 여길 오면 무슨 재주로 큰머리 나리에 화기도감 장인들을 만나겠습니까?”
사비는 그 뒤에도 단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했지만 대체로는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