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64
264화
* * *
“말하여라. 그저 문을 적 삼기로 한 것뿐이라고.”
미소 짓는 시현과 반대로 법군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내렸다. 몇은 동요를 그대로 드러내며 표운을 바라보았다.
휘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표운이 고개를 쳐들었다. 입이 잔뜩 앙다물려 있었다.
“문께서… 당신이 계속 싸운다고 해서, 세상에 법력이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지 않소! 어차피 온 세상이 망한다는데, 살 수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살겠다는데 그것이 뭐가 나빠!”
표운이 손을 뻗어 시현의 대련을 가리켰다. 손끝은 떨리고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말할수록 힘이 올라왔다.
“그 주머니에 마력석이 얼마나 남았소? 여기서 우릴 죽인들 얼마나 더 싸울 수 있겠소? 앞으로는 관은 물론 백성들도 당신의 편을 들지 않을 텐데! 당신 말대로요. 이제 귀수관 전체가 문의 적이오. 그러니 포기하고 투항하시오!”
말을 마쳤을 때 표운은 반쯤 헐떡이고 있었다. 시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상황은 시현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공격을 멈추고 대화에 응한 것도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적을 모두 처치하는 것뿐이라면 지금 가진 마력석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적들 한가운데에 단과 호란이 있었다. 둘에게 가는 피해를 차단하면서 적을 모두 막아내려면 훨씬 더 많은 마력석과 시간이 필요했다. 시현에겐 둘 다 없었다.
시현은 대화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호란과 단에게 똑바로 시선을 보냈다. 단은 바로 눈길을 피했고 호란은 시현을 마주 바라보았다. 둘 다 시현이 아는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출혈 탓에 호란의 안색이 나빠진 것이 눈에 띄었다. 시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시현이 다시 표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이 정적을 깼다.
“알겠다. 다만 너희가 나를 적으로 삼겠다면 그 전에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다.”
표운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무엇이오?”
“나에게는 일행이 두 사람 있다. 한 사람은 호위고 한 사람은 길잡이다. 둘 다 남운관에서부터 함께 왔고, 여정은 물론이요 내게 아주 중요한 이들이다.”
시현은 표운과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이를 설명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과 호란에게 왔다 갔다 스쳤다.
시현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니 새겨들으라. 너희가 무어라도 나와 내 일행에게 적대 행위를 하고자 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일의 순서가 중요하다.”
시현이 한 손으로 제 가슴께를 가리키면서 목소리를 키웠다.
“너희는 반드시, 반드시 나를 제일 먼저 죽여야 한다. 내가 숨이 다해 땅에 늘어진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내 일행 두 사람의 털끝 하나 건드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에겐 인질이 필요하니까. 살기는 물론이요 사람답게 죽기 위해서조차 인질이 필요하니까.”
표운과 법군들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씩 물러섰다. 분노로 지글거리는 시현의 목소리에 공기도 따라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어떤 법술의 작용인지 그저 자기가 기가 질린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미 호란이 상했으니 너희는 많은 것을 그르친 것이다. 부디 남은 일을 하는 데 순서를 주의하라. 자비심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무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표운은 뒤늦게 언성을 높이며 시현의 말을 끊었다.
“무슨 뜻으로 말하는 것이오. 설마 우리더러 이것들을 인질 삼아서 협박이라도 하란 말이오? 내가 아랫것들의 목숨과 그대를 견줄 정도로 법도를 나간 사람은 아니오!”
시현이 얕게 웃었다.
“모르겠느냐? 좋다. 이해하려 노력해볼 기회를 한 번 주마.”
시현이 어깨에 멘 걸낭 끈에 한 손을 얹었다.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바짝 긴장했다. 극상격이 상대라면 무엇이 주문과 이어지는 동작이고 무엇이 아닌지 아무도 구분할 수 없었다.
시현이 대련 끈을 당겨 보이며 여상하게 말했다.
“이 대련 안에 타지 않고 남은 마력석 여섯 개가 있고, 내 품 안에 작은 노리개 두 개가 더 있다. 그 여덟 개가 내가 가진 마력석 전부다. 만일 너희가 붙잡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놓아 보내준다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건네주려 하는데 어떠냐. 응하겠느냐.”
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곧바로 붙어 있던 병사에게 깔아 눕혀졌다.
반면 표운은 혹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투항하겠다는 뜻이오?”
“가당치 않다.”
“그럼….”
“먼저 답하거라. 응하겠느냐?”
표운은 시현의 속셈을 몰라 곤혹해 보였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던 중에 갑자기 나타난 살길의 유혹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표운의 시선이 빠르게 단과 호란을 오갔다. 단은 얼굴을 굳힌 채 그를 외면하고 있었고 호란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도 표운을 물어 찢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표운이 단 옆의 병사에게 말했다.
“길잡이 쪽을 일으켜라.”
단을 억누르고 있던 하늘인 병사가 그를 세우고 뒤에서 팔을 돌려 잡았다.
표운이 시현에게 말했다.
“품에 숨긴 마력석을 보여주시오.”
시현은 미소를 짓더니 품 안에 손을 넣어 매듭으로 연결된 두 개의 마력석을 끌어냈다.
“응한 것으로 알겠다. 손이 번거로우니 이것을 먼저 넘기겠다. 공연히 놀라지 말아라.”
그는 묶여 이어진 노리개를 귀수관군 쪽으로 힘껏 던졌다. 노리개 뭉치는 꽤 멀리 날아 표운과 시현의 중간쯤에 떨어졌다.
이어서 시현은 대련을 반쯤 뒤집듯이 벌려 안에 든 마력석들을 드러나게 했다.
“되었느냐. 그이를 놓아 보내면 그가 오는 사이 한 개씩 그쪽으로 던지마.”
“아니, 대련을 통째로 던지시오. 안의 마력석을 건드리지 말고.”
표운이 말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그이가 저 노리개 떨어진 곳을 지나오면 그때 던지겠다.”
표운이 손짓하자 병사가 단을 붙들어 무리 앞으로 나왔다.
표운이 단에게 말했다.
“천천히 걸어가라. 뛰지 말고, 허둥거리지 말고.”
병사가 팔을 놓았다. 단은 이를 뿌득 악물었지만 말없이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단이 비탈의 절반을 내려오자 시현은 어깨에서 대련을 내렸다. 아래서부터 휘두르듯 던져진 대련은 아까 던진 노리개 근처에 풀썩 떨어졌다. 단은 그 옆을 지나쳐 몇 걸음을 더 걸었다.
단의 큰 키가 표운에게서 제 모습을 최대한 가렸다 판단한 순간, 시현은 곧바로 몸을 돌려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단 역시 시현이 등을 돌리자마자 함께 뛰었다.
동시에 시현이 입속으로 읊었다.
“난란하라. 산발하라.”
“저, 저!”
표운의 당황한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비탈 가운데의 대련에서 광채와 전격이 어지럽게 섞여 치솟았다. 시현을 쫓으려고 뛰쳐나오던 하늘인들이 모조리 전격에 얽혔다.
빛과 전류를 피해 눈을 가리고 물러섰던 표운은 곧 낭패를 깨달았다. 비탈 한가운데서 솟는 전격의 벽은 위력은 약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질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귀수관군을 가두듯 범위를 더 넓히고 있었다.
“파훼하시오! 주문을 끊어!”
표운이 소리치자 법군들이 그제야 마력석을 쳐들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 법술사가 우는 소리를 했다.
“벼락과 함께 거친 기운의 파동이 온통 날뛰고 있습니다. 제대로 기운을 읽고 짤 수가….”
“나도 아네! 그걸 어떻게 하라고 자네들이 있는 것 아닌가!”
그사이 시현은 구릉 아래까지 도달했다. 단이 따라붙으면서 고함쳤다.
“호란이는! 호란이는 어떡하고, 미친놈아!”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죽어라 달렸다.
표운은 그의 말을 이해 못 해서 단을 놓아주었지만 순서대로 죽여야 한다는 말조차 이해를 못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란에게 인질의 가치가 생기려면 그가 먼저 살아야 했다.
“시발놈의 새끼가…!”
단은 욕설을 내뱉더니 시현을 앞질러 귀수관군의 수레가 선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수레 앞을 얼쩡대던 말지기를 밀치고 가장 앞의 군용 수레 한 대를 끌어냈다. 시현이 따라가 올라타자 단은 곧바로 어둠 속으로 말을 달렸다.
그때까지도 구릉 위쪽에서는 빛과 전격의 광채가 이어지고 있었다.
시현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어디로 가느냐…!”
“몰라!”
단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머릿속에 대강의 지리와 방향은 있었다. 걸낭 안에 별시계와 지도첩도 있었다.
하지만 마을을 찾아야 하는지 마을을 피해야 하는지가 판단이 안 섰다.
“시발, 시발, 시발…!”
말을 채근하며 욕설을 뱉던 그가 뒤를 돌아보고 시현에게 소리쳤다.
“멍청한 새끼야, 한 명만 건질 거면 나를 놔두고 호란일 데려왔어야지! 하늘인이 포로로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수레 안에 웅크려 앉은 시현이 눈빛만 불태우며 말했다.
“호란은 달릴 수 없었다. 나 혼자선 도망칠 수 없었다. 네가 필요했다.”
“빌어먹을!”
단은 이를 갈았다. 다친 호란을 놔두고 혼자서만 풀려난 것도 그게 언제나처럼 허수아비 취급당한 결과란 것도 화가 치솟았다.
단이 시현에게 물었다.
“마력석 진짜 없어?”
“참석으로 세 개는 남겼다. 쓴 것은… 놈들의 발을 묶어놓으려면 그만큼은 써야 했다.”
시현은 말하면서 무릎에 올린 팔에 이마를 묻었다. 단이 혀를 찼다.
“이 판국에 가지가지…! 이명 왔어?”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다. 속도를 줄이지 말아라. 우리가 잡히면 아무것도 안 된다.”
시현은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흔들리는 수레 안에서 기감을 멀리까지 펼치고 하늘인들이 쫓아오는지 아닌지 읽으려니 속이 온통 울렁거렸다.
하지만 읽어야 했다. 표운과 귀수관 법군들은 틀림없이 하늘인 관병을 앞세울 것이다.
당장은 기감 닿는 곳에 느껴지는 기운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표운을 많이 동요시켜 놓았으니 바로 추격 명령을 못 내렸을 수도 있다. 마력석 남긴 걸 눈치챈 관병들이 몸을 사릴 수도 있다.
밤중이고 지형은 험하다. 지표가 단단한 지역이라 수레 자국도 잘 안 남는다. 어떻게든 시야만 벗어나면 따돌릴 희망이 있었다.
단도 같은 걸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아까보다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하늘인 놈들이 쫓아오면 알 수 있어?”
“살피고 있다만… 당장 가까이에는 없다. 지금 몸 상태론 그리 멀리까지 읽을 수 없다.”
“그럼 그냥 신경 끄고 머릿속 쉬게 해. 이미 마을서는 안 보이는 데까지 왔으니까. 네가 뻗으면 놈들 오는 걸 미리 알아도 의미 없잖아.”
“…괜찮다. 어차피 한번 날 세운 기감은 그렇게 척척 거둬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마음이 곤두서 있으니….”
“네 맘대로 되는 게 아니야? 작은 소리 의식하는 거랑 비슷한 거야?”
“조금 비슷하다. 큰 틀에선 뜻대로 되는 것이 보통이다마는 지금….”
시현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단은 추격을 읽었나 하고 순간 긴장했지만 계속 말이 없는 걸 보니 멀미 때문인 모양이었다.
단은 속도를 줄였다. 꼭 시현 때문이 아니라도, 어둡고 험한 길을 등도 안 켜고 달리면서 이제껏 말이 안 다친 게 기적이었다. 오늘은 상현이니 오래 안 끌고 달이 질 것이다. 그때까지만 운이 따라주길 바랄 뿐이었다.
얼마 뒤 시현이 중얼거렸다.
“멀리서… 작은 무리 둘이 움직이고 있다.”
“두 무리로 나뉘었어? 방향은?”
시현이 머리를 묻은 채 한쪽 손만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하나는 저쪽으로 치우쳤고, 하나는 가까워지고 있으나 빗나간 방향이다. 두 무리 다 움직임이 직선이 아니다.”
그건 좋은 신호였다. 단은 조금 안도했다.
“우리가 간 방향을 모르는군. 추적을 시작하는 게 꽤 늦어진 모양인데.”
“표인이 생각보다 더 당황했던 모양이다.”
“손 안 대고 마력석 쓸 수 있는 걸 몰랐겠지. 그러니까 그런 허접한 제안을 덥석 받은 거 아냐.”
“허접하다고 하지 말거라…. 딴에는 열심히 생각했느니.”
시현이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법군이니 이론으로야 알 것이다. 하지만 방씨 온의 말로는 법군들이 마력석을 한 개씩만 다루는 것이 습관이라지 않느냐. 그러면 마력석의 기형을 기억했다가 시간차를 두고 다루거나, 기운을 공명시켜 마력석 여러 개의 기형을 한꺼번에 읽거나 하는 데 발상이 잘 안 미치겠지. 어쩌면 여러 개를 한 번에 쓴다는 것조차 생각 못 할지 모르고. 더구나 내 제안 때문에 이미 머릿속이 바쁘지 않았느냐. 시야가 좁아질 거라 생각했다.”
“흠.”
단은 골짜기 경사 아래로 내려가면서 속도를 더 줄였다.
“이젠 정말 그 기감인지 신경인지 끄고 머릿속 가라앉혀. 어차피 지금부터는 운이 받쳐 줘야 돼.”
“알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