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68
268화
* * *
이른 오후, 사예의 수레가 귀수관에 접근하자 초소에서 하늘인 병사들이 몰려나왔다.
병사들은 꽤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사예의 여행용 수레는 사람이 열댓 명은 탈 수 있는 크기였고 마부석에는 외모만 반민이지 덩치도 분위기도 위압적인 길이 떡하니 앉아 있으니 그럴 만했다.
수레가 검문소에 닿기도 전에 초소병 하나가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수레를 세우고 내부를 보여라!”
길은 수레에서 뛰어내려서 ‘뭘 잘났다고 이래라 저래라야?’라고 말하는 대신 순순히 말고삐를 당겼다. 옆에서 조마조마하고 있던 단도 얼른 두 겹 방풍막을 걷었다. 오는 내내 길을 붙들고 얼러가며 잠깐 참았다가 성안에 들어가는 쪽이 훨씬 더 재미있을 거라고 설득을 해놓은 보람이 있었다. 다만 얼마나 오래 갈지는 미지수였다.
활짝 열린 휘장 안에서 사예와 시현의 모습을 발견한 초소병은 깜짝 놀라며 허리를 굽혔다.
“어르신들께서 계셨습니까! 함부로 소리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예를 올리면서도 초소병의 눈빛에 도는 경계심은 아까보다 더 뚜렷해져 있었다. 시현은 사예의 모피 갖옷을 덧입어 중부식의 의복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었으나 초소병은 안쪽 자리에 있는 시현에게 자꾸만 눈길을 보냈다.
수레에 땅인이 있는 것을 알고 다른 초소병들도 다가왔다. 초소병의 머리가 앞에 나와 예를 하고 말했다.
“아랫것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현재 대관성에 비상한 일이 있어 감히 어르신께 신분패 확인을 청하고자 합니다.”
예를 갖춘 요청이었으나 분위기는 딱딱했다. 사예는 귀찮은 듯한 태도로 제 신분패를 내밀었다. 두 손으로 패를 받아든 머리가 다시 요청했다.
“송구합니다. 패를 열어 안을 보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러든가.”
땅인의 신분패는 조각한 나무패 두 쪽을 겹친 형태라 닫아 두면 성명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사예의 허락을 받은 머리가 공손한 동작으로 패를 비틀어 열었다.
패의 안쪽이 드러난 순간 머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는 이제까지의 침착하고 정중한 태도를 잃고 큰 목소리를 냈다.
“이, 이 패는! 설마 나으리께선….”
사예가 말했다.
“엉. 류씨 직계가의 류사은이야. 오랜만에 오는 거라 못 알아볼 거 같지만.”
“아닙니다! 아닙니다!”
머리는 사예에게 바로 패를 돌려주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흙바닥에서 넙죽 큰절을 올렸다.
“나으리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다른 초소병들도 눈치를 보고 좌라락 엎드렸다. 사예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뭘 또 이래? 일어나. 일어나. 바닥 차가워.”
엉거주춤 일어선 머리가 쩔쩔매면서 말했다.
“나으리님,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종자들을 시켜 수레를 뒤로 세 장만 물리게 해 주십시오. 법도에 따라 환복 전까지는 저희가 나으리님을 성에 들여 드릴 수도 없고 자세한 말씀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바로 댁에 사람을 보내서 새 의복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아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시현은 새삼 이곳이 북방임을 실감했다.
죄인이 새옷을 갈아입는 것은 옛 왕조 시절 천천곡 이남으로 유배를 떠났던 북방 사람이 고향에 돌아올 때의 풍습이었다. 자택에 발을 들이기 전에 고향 땅에서 지은 옷으로 갈아입고, 유배 중에 입던 의복은 성문이나 동구 밖에서 태워 버리게 했다.
사람을 유배 보낼 왕이 없어지면서 같이 없어진 풍습이라 생각했는데 귀수관에서는 그것을 아직까지도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예가 불퉁하게 말했다.
“귀찮은데 그냥 들어가면 안 돼?”
“법도대로 하셔야 합니다, 나으리님. 그리고 부디, 부디 세 장만, 아니 한 장만이라도….”
“알았어 알았어. 그러다 울겠다. 초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 이거지. 길아 들었니?”
길이 말을 달래 수레 방향을 돌리는 사이 머리가 초소병 한 사람에게 명했다.
“너, 소문은 절대 내지 말고 류씨 댁에 쏜살같이 달려가거라. 가서 사인께서 돌아오셨다 전해라!”
“예!”
시현의 눈이 커졌다. 분명 인이라고 들었다. 그가 사예를 쳐다보았다.
“그대는 일전에 말하길, 예 격이었다고….”
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는 그 과목 법술로 사람 죽였다고 폐격당했어. 너무 아깝지 뭐야. 세 개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격이었는데.”
격이 세 개. 시현은 뭔가 생각이 날 것 같아 얼굴을 굳혔다.
서격원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화제로, 두 과목 인에 달한 귀수관의 천재가 타과의 격을 또 얻었다는 것이 있었다.
여러 과목에서 격에 달하는 이야 흔하게 있다. 하지만 그이는 놀랍게도 기운의 운용법이 서로 반대인 과목에서 달했다고 해서 몇 년이 지나도 계속 입에 오르내렸다.
“류씨 사인. 귀수관의 류씨 사인….”
시현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귀수관 중시조 류해선 인의 류씨 집안? 그리고, 그리고… 의법술과 양생술의 류씨 사인? 류사은 인?”
사예가 성의 없이 끄덕였다.
“엉. 그거.”
시현은 잠시 망연자실해졌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한때 아침마다 손에 들 정도로 좋아했던 책과, 180년 전 뜻과 마음을 다하여 그 책을 저술했을 선현을 생각하며 옷소매를 부르쥐었다. 그는 사예를 좋아했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왕조 시대 마지막 성현의 집안에서 류사예가 났다! 세상에 대 잇기만큼 부질없는 일이 없었다!
놀란 것은 시현만이 아니었다. 마부석의 단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사예 님이 인이라고요? 딴 것도 아니고 의법술로 인? 그럴 리가….”
시현이 단을 쳐다보았다.
“너도 몰랐느냐.”
“사예 님이 마법으로 뭔가 치료 비슷한 거를 하시는 줄은 알았죠. 알았는데….”
단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납득하지 못한 채로 말했다.
“저는 돌팔인 줄 알았어요. 어떨 때는 낫고 어떨 때는 낫다 말고 다섯 번 중 세 번은 치료받고 나면 더 아파서.”
“이 자식이?”
사예가 눈을 부라리며 단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너 처맞고 다녀서 속 곯고 뼈대 비틀린 거 누가 다 고쳐줬는데 그딴 소리야? 너 그 키 중에 한 치 반은 내가 키워 놓은 줄이나 알어!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받을 거를 해줬더니!”
“돈 받으셨잖아요. 맨날 무슨 강도처럼 어마무시하게 털어가셨잖아요. 아니, 사예 님이 정말로 인 격이면 엄청 싸게 받은 거는 맞는데…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상식적으로….”
단이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 시현은 조금 위로를 받았다. 류사예가 사실 류사은 인이란 사실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자기 혼자는 아니었다.
얼마 안 있어 초소병이 천에 싼 의복을 가져와서 바쳤다. 사예는 수레 휘장을 내리고 안에서 띠로 여민 긴 웃옷과 주름치마, 깃 넓은 장포로 갈아입고 나왔다. 전형적인 북방식 복장이었다.
수레가 다시 초소 앞에 이르자 초소병 전부가 무릎을 꿇었다. 사예에게 무엇을 물으려는 사람도 수레 안을 살펴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사예의 수레는 크고 실린 짐이 많아 맘만 먹으면 사람을 몇이든 숨길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일에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시현은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는 걸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좀 복잡했다. 사예의 말대로 이 병사들에겐 관성을 지키는 것보다 땅인에게 예를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였다. 초소병들이 그리한다는 것은 관성의 땅인들이 그리 요구해왔다는 뜻이었다.
머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사예 옆에 앉은 시현에게 말했다.
“아랫것이 감히 신분을 여쭙는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태도가 사예의 패를 보기 전과 확연히 달랐다. 공손하다 못해 주눅 든 느낌이었다.
시현은 단이 제법 손때까지 탄 모양으로 만들어준 윤지관 신분패를 꺼내 건넸다.
“나는 온강 사람으로 함씨 직계가 함도훈이다. 여행 중에 변고를 만난 이래 류씨 사인 어른께 의탁하여 지내다가 여기까지 왔다.”
“예, 예. 친히 말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머리는 굽신대며 패를 받아 아주 잠깐 열었을 뿐 안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금방 돌려주었다. 초소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군거렸다.
“아, 온강의 함씨….”
“어쩐지….”
시현이 댄 것은 제 사촌의 이름이었다. 단은 꽤 잘 고른 위장 신분이라 생각했다. 땅 위 제일가는 거부의 손자라면 저만큼 도도해도 사람들이 조금은 이해하겠지.
단은 시현에게 패를 새겨줄 때 사예에게 존칭 붙이고 공대 꼭꼭 하라고 다짐을 뒀지만 역시 하는 걸 보니 별 의미가 없었다. 격도 없다는 사람이 극상격을 동행자로 입에 올리면서 아무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저래서야 누가 물으면 사예의 주장대로 정인이라고 해야, 아니 반려를 맺었다고 해야 겨우 납득해줄 것 같았다.
치정살인으로 추방당했다가 한참 어린 부잣집 남자애를 꿰차서 돌아온 모양이 되는 건가. 아무리 류사예라도 좀 지독한데.
그사이 다른 초소병이 마부석의 길과 단에게 다급히 말했다.
“너희 둘은 이름을 기록해야 한다. 나리마님께서 기다리시지 않게 얼른 말해라!”
“권단이라 합니다.”
“최길.”
단이 이름을 대며 신분패를 꺼내 들었지만 초소병은 단의 패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길이 이름자만 툭 던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출신지는커녕 둘이 사예와 시현 둘 중 어느 쪽에 딸린 사람인지조차 묻지 않았다.
초소를 통과하고 나니 성문의 검문은 더 허술했다. 이미 초소에서 한 사람이 건너가서 사예의 신분을 전해놓았다. 거의 백에 가까운 하늘인 무리들이 성문 안팎을 지키고 있었지만, 다들 꿇어 엎드려 맞을 뿐 내려놓은 수레 휘장을 걷으란 말조차 안 했다.
“봤지? 이렇게까지 엉망이라고.”
성문을 지날 때 사예가 말했다. 수레 휘장 너머에서 시현이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이 정도 작은 권위도 내려놓을 각오를 못 하고서, 누구에게 붙어서 누구를 적대한다고?”
“도훈아 얼굴 무서워.”
성문을 통과한 일행은 일단 시 중심의 관청가까지 수레를 몰았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대광장 너머 쭉 뻗은 대로 양쪽에 각서의 하급 관청이 늘어섰다. 그 끝에는 총치부와 총령부가 함께 자리한 귀수관의 관부가 있었다. 높은 담과 웅장한 삼문 너머로 예스러운 위엄을 풍기는 전각들이 보였다.
성안에 들어왔어도 단은 이전과 다른 것을 전혀 못 느꼈다. 그러나 광장 구석에 수레를 세우고 내려서 보니 시현의 반응은 아주 뚜렷했다.
시현은 멍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에 고조된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수레를 내렸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시야가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것이 보였다.
땅에 몇 걸음 딛고서 더 발을 못 떼고 있는 그를 단이 붙들었다.
“어지러우십니까?”
“아니. 괜찮다.”
시현은 감격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정말 성안에 법력이 있구나…. 성 전체에….”
사예도 평소와 표정이 달랐다. 귀가 간지러운 거 같은 이상한 표정이긴 했지만.
길이 물었다.
“이제 사예 님이랑 시문 나리님이 마법 쓰실 수 있는 겁니까?”
“얌마, 목소리 커!”
단이 윽박질렀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가능하다.”
길이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다.
“그럼, 후딱 가서 다 쓸어버리죠?”
“야, 넌….”
단이 뭐라고 핀잔하려는 찰나 시현이 답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옛?”
단은 무심코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다시 보니 사예와 길과 시현이 멀뚱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셋과 눈이 마주치자 그때까지 단의 머릿속에 있던 계획 비슷한 거가 다 백지로 날아갔다.
미처 몰랐다.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던 세 사람에겐 사실 핵심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뭐 터지면 신나서 다 쓸어버리는 사람.
터지기도 전에 먼저 시비 붙여서 다 쓸어버리는 사람.
그리고 다 쓸어버리고서 그걸 순리라고 부르는 사람.
왜 내가 여기 끼어있지. 나가고 싶다. 호란이 보고 싶다. 걔는 그래도 시문에 비하면 사람이 진퇴가 있어.
단이 생각하는 사이 갖다 박는 것밖에 모르는 세 사람은 벌써 관청가를 향해 척척 걷고 있었다. 단은 광장 말지기에게 몇 푼을 주고 사예네 말과 수레를 봐달라 부탁하고 서둘러 뒤를 쫓아갔다.
단은 시현이 이렇게 빨리 걸을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거의 달리려는 듯한 속도로 관부 정문에 다다른 시현을 수문장들이 막아섰다.
“나으리, 존함과 방문 목적을 밝혀주십시오.”
수문장 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삼문의 좌우를 지키던 다른 수문군도 전부 몰려들었다. 상대가 잘 차려입은 땅인인데도 어딘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듯했다.
시현이 숨을 들이켜고 입술을 벌렸다. 그의 시선은 수문장이 아니라 그 너머, 정면에 높이 선 총치부와 총령부 전각들을 향해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남운관의 완시현 문이다. 너희가 억류하고 있는 내 호위를 돌려보내라.”
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가 법력을 타고 경내와 관청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