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 * *
단은 공기가 바뀐다는 말의 뜻을 새로이 실감했다.
등 뒤 광장에서 흘러 들어오던 활기와 소음이 갑자기 온데간데없어졌다. 넓은 총치부 내를 분주히 오가던 사람들도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로 앞의 수문장들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시현이 수문장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비키거라. 다친다.”
수문장들은 본능에 이끌린 것처럼 몇 발짝씩 뒷걸음질을 했다가 다시 발을 바꿔 디뎠다. 그들에겐 관성의 심장부를 지키는 정예 중의 정예로서 긍지와 책임감이 있었다.
다만 태세를 바꿀 틈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주문 같은 건 없었다. 손동작도 없었다. 일행의 전방으로부터 기압파가 웅 소리를 내며 병사들을 후려쳤다. 높고 거대한 삼문이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후방의 바닥 판석이 부챗살 모양으로 넓게 박살 났다.
시현은 아무 곳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기둥뿌리만 남은 정문을 넘었다.
그가 경내로 발을 들인 순간 얼어붙었던 사람들이 와 하고 움직였다. 대부분은 뭐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쳤지만 안쪽에서 달려 나오는 사람, 다층 전각의 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푸른 단령 차림인 것을 보면 총령부에 소속된 공격 법사들이었다.
법술사들이 손을 들거나 모으며 저마다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금세 수많은 고위 법술사들의 손끝에서 기운이 춤추고, 머리 위 허공이 당장 불과 벼락을 쏟아낼 것처럼 술렁거렸다.
거침없던 시현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가 읊조렸다.
“퇴색하라.”
고요가 차올랐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신체의 기능을 훌쩍 넘어 인지가 뻗어나가는 감각, 제 인지가 닿는 공간을 그대로 제 의지가 닿는 공간으로 전환하는 이 감각을 그는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제가끔 흐르고 뭉치고 변하던 온 사방의 기운이 묽고 균일하게 흩어지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상의 모든 색과 음과 생동이 무형의 벽 너머로 멀어졌다. 그가 모든 소리의 주인이었으므로 더 이상 아무것도 소음이 아니었다.
“퇴색하라.”
시현은 또 한 번 말하고 눈을 떴다. 이제 공간을 채운 힘 전부가 숨을 죽이고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했니?”
다시 입을 열기 직전, 옆에서 난 목소리에 시현은 고개를 돌렸다. 사예가 장독 안에서 구렁이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은 어중간하게 허공에 멈춘 채였다.
“아, 그대가 주문 잣는 것을 방해했구나. 미안하다.”
시현이 난처하게 웃었다.
“방금 것은 내가 정교한 주문을 쓸 때 하는 사전 준비다. 의도를 정확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공간 안의 기운을 전부 지배하에 두는 쪽이 이상적이라.”
“그래서 남이 엮던 마력을 중간에 맘대로 막 갖고 가는 거야? 그게 돼? 아니 된다 치고, 된다고 진짜로 하냐 그걸?”
사예는 진심으로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시현이 미소를 짓고 앞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겸사겸사 저자들의 공격도 끊지 않았는가. 그 점에는 그대도 불만이 없을 것이다.”
“겸사겸사인 거야?”
사예는 입을 비뚜름하게 하며 시현이 가리킨 쪽을 보았다.
전방에 포진한 귀수관 총령부의 법술사들은 사예보다 열 배는 더 망연자실해 있었다. 대부분의 법술사들이 기운의 지배권을 강탈당한 순간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포기를 못 하고 허공에 손을 뻗으며 주문을 엮어보려고 애쓰던 몇몇도 오래지 않아 차례차례 입을 닫고 팔을 내렸다.
시현은 그들의 반응에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귀수관에 발을 들인 이후 그는 눈앞의 사람들을 적으로 여긴 일이 없었다.
다시 시현의 목소리가 경내에 울렸다.
“한 번 더 말하겠다. 나는 남운관의 완시현 문이다. 너희가 억류한 내 호위를 돌려보내라.”
눈앞에는 금대를 띤 고관이 수두룩했으나 누구 한 사람 앞으로 나서거나 답을 하려는 이가 없었다.
마땅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관부 경내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수많은 관료들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너희는 스스로 도리를 잃었고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도 않으니 타의로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 일을 하기 전에 경고하는 뜻으로 성주관을 쓰러뜨리겠다. 그 전에 속으로 열을 셀 것이니 상하고 싶지 않은 자는 당장 건물을 나오거나 창으로 얼굴을 내밀어라.”
시현의 옆에 서 있던 단이 무심코 그를 돌아보았다.
뭐를 쓰러뜨린다고?
단이 미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우측의 장엄하고 고풍스러운 삼 층 건물에서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보니까 정말 성주관이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아, 저게 성주관이구나. 별이 머문다고 쓰고 성주라고 읽는구나.
단은 알려던 것에다 굳이 알려 하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됐지만 막상 얻은 정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멍하니 있었다. 건물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의 무리가 다 끊기기도 전에 시현이 말했다.
“열을 다 세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커졌다. 2층 창문으로 서너 명이 몸을 내밀며 뭔가를 호소했다.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한 손을 들었다.
건물 내부로부터 거친 바람이 터져 나오면서 창가와 문간에 있던 사람들을 멀찍이 바깥으로 밀어냈다.
바람이 사람들을 땅 위에 내려놓은 직후, 삼 층 고건물이 수직으로 내려앉았다.
소음도 진동도 별로 없었다. 파편과 분진도 그리 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랄 때를 놓쳤다. 상황을 깨닫고 보니 수백 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고건물은 이미 간 데가 없었다. 건물이 있던 자리에 나무와 회벽 파편, 기와 무더기가 쌓여 있을 뿐이었다.
“으에….”
사예가 감탄인지 질린 건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단도 시현을 쳐다보았지만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리님…?”
시현이 단을 올려다보며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안 해도 좋다. 저 건물에는 호란이 없다. 성주관은 중시조와 역대 총치총령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라 포로를 두지 않는다.”
“아니, 꼭 그걸 걱정했다기보다… 그것도 걱정이지만….”
시현은 앞을 보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경고하는 뜻으로 총치전을 쓰러뜨리겠다. 속으로 열을 셀 것이니 각자 알아서 피하라.”
그렇구나. 한 관성의 총치부 총치전을 밀어 없애는 게 이 양반 생각에는 경고에 포함되는구나. 단은 그 사실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이제는 총치전뿐 아니라 사방의 모든 건물에서 사람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적색 단령을 입은 총치총령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더 법술을 쓸 엄두도 다가올 엄두도 못 내고 멀리서 꿇어 엎드리며 사죄하고 빌었다. 지금 바로 호위를 데려올 테니 기다려 달라는 애걸이 대부분이었다.
시현은 차분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장 내 호위를 데려오라. 말이니 약속은 하나도 필요가 없으니 행동하라. 열을 다 세었다.”
시현이 오른손을 들어 정면으로 곧게 밀었다.
눈앞에 선 총치전이 살짝 층진 마름모 모양으로 기우나 싶더니 퍼석 부서져 나갔다.
귀수관 총치전은 단층이었지만 왕의 대전처럼 천정이 높아 다른 건물 두세 채를 합친 만큼 웅대했다. 그것이 지붕 꼭대기부터 가루가 되면서 반은 흩어지고 반은 무너졌다.
먼지구름이 높고 자욱하게 솟았다가 인위적인 흐름을 타고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건물도 집기도 모두 사라지고 폐허가 된 자리에, 높은 대와 총치의 좌 하나만 멀거니 선 모습이 드러났다.
길이 가슴 벅찬 얼굴로 말했다.
“시문 나리 재수 없다는 말 취소. 진짜 취소. 나 이 양반 완전 맘에 들어. 너무 좋아. 사예 님 다음으로 최고야.”
단은 더 이상 무슨 유익이 될 만한 생각을 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여기서 습관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어 봤자 자기 혼자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이제 경내는 건물에서 뛰쳐나와 무릎 꿇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일행이 선 주위와 높은 건물 주위만 비워 놓고 담홍색 담청색 진녹색 은백색의 관복 입은 등이 바닥에 촘촘하게 깔렸다. 귀수관 땅인이 다 나와서 엎드린 듯한 광경이었다.
시현은 더 이상 말이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래도 아무도 고개 들거나 다가올 생각을 못 했다.
문께서 차분한 얼굴을 했지만 이미 같은 표정으로 건물 두 개를 해 먹었다. 속으로 다음 경고할 것을 물색하고 있을지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단이 하릴없이 남은 건물들을 가치평가하고 있는데, 시현이 손가락으로 단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단이 돌아보자 시현이 작게 말했다.
“지금, 좀, 토할 것 같은데.”
“뭐?”
단이 질겁했다. 시현이 애써 얼굴빛을 지키며 말했다.
“바뀐 환경에서 갑자기 법술을 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제 와서 침착하게 원인 분석하지 마. 설치기 전에, 아니 무작정 쳐들어오기 전에 그 사태를 예측하라고!
이만큼 저질러 놓고 시현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이후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이 초조를 숨기며 작게 물었다.
“많이 어지러워? 넘어질 거 같아?”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부축받으면 이상한 낌새를 채일지도 모르니 당장은 이대로 괜찮다.”
아직이니 당장이니 하는 말을 보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단이 멈춰 놨던 머리를 이제라도 다시 움직여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사예가 외쳤다.
“저기 왔다!”
총령부 쪽으로부터 관인 여럿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무리 맨 앞에는 하늘인 몫꾼 한 사람이 호란을 안아 들고 있었다. 의식이 없어 보였다.
다가오는 그들에게 사예가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하늘족은 열다섯 보의 법도를 지켜라! 그 자리에서 명을 기다려라!”
지척까지 다가왔던 몫꾼이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고 물러났다. 함께 다가오던 관인들도 지레 겁먹고 발을 멈췄다.
맞는 판단이었다. 사람을 접근시켰다가 시현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걸 눈치채일 수도 있었다.
“단아, 나랑 가! 길이는 도훈이 지키고 있어!”
사예가 말하고 앞서 달려 나갔다. 단도 바로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귀수관 몫꾼이 벌벌 떨며 제 팔 안의 호란을 내보였다. 호란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에도 몸에도 말라붙은 피가 얼룩져 있었다.
단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옆에 선 관인이 당황하며 사예에게 말했다.
“다 치료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치료했습니다. 보기만 이렇지 겉도 속도 전부 멀쩡합니다. 부디 문께 잘 말씀드려주십시오….”
사예가 맥을 잡아 보더니 말했다.
“괜찮아. 데려가자.”
사예는 단에게 호란을 업게 한 후 관인들과 몫꾼들에게 눈을 부라려 더 물러나게 했다. 단은 호란을 업고 서둘러 시현 곁으로 돌아왔다.
시현은 원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단의 등에 업힌 채 눈을 감고 있는 호란에게서 시선이 떠나지 않았다.
“호란아. 호란아.”
시현이 작게 불렀다. 의식 없는 호란 대신 단이 대답했다.
“기절했습니다. 놈들 말로는 상처는 다 치료했다는데….”
“잠깐 맥 잡아본 걸론 괜찮아 보여. 나중에 더 잘 봐줄게.”
사예도 말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몇 발짝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총치부 전체에 울리는 소리로 말했다.
“완시현 문이 명한다. 지금 귀수관에서 관과 군,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벼슬하는 땅인이 가진 격을 모조리 폐한다. 또한 오늘로부터 5년 동안 귀수관 서격원을 닫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