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7
027화
* * *
그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화포 만드는 것은 내일 장인들과 제대로 의논할 거다. 만일 진행하게 되면 너도 일을 도와라. 그리고 완씨 시문의 처분에 대해선 아직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다.”
“아이고, 그것을 어떻게 좀….”
“시끄럽다. 이제 자야 하니 가라.”
사비가 축객령을 내렸다. 단은 마지막으로 사정했다.
“아, 그리고… 화포를 만드실 때, 기술을 제가 드렸다는 건 시문 나으리께는 꼭 좀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 나리도 결국은 땅인입니다. 화포를 퍼뜨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알았으니까 가.”
사비가 손을 휘휘 저었다. 단은 제 짐을 겨우 건사해서는 쫓겨나듯 방을 나왔다.
복도에는 불이 다 꺼져 있고 아무도 없었다. 아까 단을 감시하던 하늘인 몫꾼조차 보이지 않았다.
반민 따위는 큰머리에게 아무 위협이 안 되니 신경을 안 쓰는 모양이었다.
단이었기 망정이지 시현이었으면 감금처에도 못 돌아갔을 것이다.
큰머리가 시현을 손님 대접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시현의 거처는 대영관 3층의 버젓한 침소로 바뀌어 있었다.
시종이 머무는 곁방도 둘이나 달려 있어 단과 호란의 차지가 되었다.
“아, 시발. 아파 뒈지겠네. 무식한 하늘인 새끼…. 갈비 나갔으면 어떡하지.”
제 곁방에 돌아온 단이 짐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리자 내실에서 시현이 인기척을 냈다.
“왔느냐.”
단은 장지문을 열고 내실로 건너갔다. 시현은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앉거라. 호란은 잠들었다. 네가 간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뭐 어떻게 돼? 눈치 있는 척해봐야 하늘인이야. 눈물 몇 방울 흘리니까 홀랑 넘어가더라.”
단이 다리를 펴고 앉았다.
“너한테 비밀로 해달라 해놨으니까 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 누가 화포 얘기 꺼내면 싫어하는 척하고.”
“알겠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꺼리는 척하는 것에 무슨 효용이 있느냐?”
“땅인이 싫어하고 두려워한다고 해야 저놈들이 더 혹하지. 실제 땅인들이 꺼리는 것도 사실이고.”
“나도 이제까지는 화약이 사고가 잦아 득보다 실이 많은 물건으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그는 내가 식견이 좁고 공부가 부족한 것이었다.”
시현이 탄복하는 어조로 말했다.
“정말 네 말 만큼 위력이 나온다면 화약과 화포가 거석을 치는 데 참으로 유용했을 터. 진작에 알고 남운관에서도 채용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까운 일이다.”
“흥.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이라고. 미리 알았다고 과연 그렇게 됐을까?”
단이 비웃었다.
“뒤 구린 땅인 나리들이 화포나 총통에 얼마나 질색을 하는데. 원한은 사방에 쌓아놨지, 화포 한 발 날아오면 막을 길은 없지, 절대 만드는 꼴 두고 보지 않았을걸.”
시현이 듣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째서 화포를 못 막느냐? 포환을 밀어내기만 하면 되는데 주문도 필요 없지 않으냐.”
“…….”
단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역시 넌 치풍관 애들하고 아무 얘기도 하지 마. 화포 얘기 전혀 모르는 척해.”
시현이 무안해하며 덧붙였다.
“아, 물론 지금은 할 수 없다. 법술을 쓸 수 없으니.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법력이 있던 시절에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겠구나. 그래. 몇몇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되었겠다….”
“그거 알아? 사실 땅인들도 속으론 다 너 싫어할 거야.”
시현의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너는 왜 사람이 기분 상하는 말을 일부러 하느냐.”
“그러는 너는 왜 일부러도 아니면서 남의 복장을 뒤집는데.”
시현은 잠시 단을 노려보다 화제를 바꾸었다.
“그 대단한 화포를 정말 네가 만든 것이냐?”
“아니, 대운관 화기도감의 권영이란 사람이 만들었지. 난 몇 군데 고친 게 다야.”
단이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 이것까지 포함해서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냥 치풍관 놈들이 한동안 화포에 정신 팔게 놔둬. 일은 다 나한테 맡기고.”
“알겠다. 일을 공연히 복잡하게 꾸민다는 생각은 든다만, 화포를 가지면 치풍관에도 좋은 일이겠지. 나는 당분간 기다리마.”
시현이 보던 서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소세 물은 어디에서 가져오면 되느냐? 짐을 잃을 때 칫솔도 잃었겠구나. 이곳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하는 걸 잊었다.”
단은 성질을 안 내려고 눈을 피했다.
손짓으로 대령하라 명하는 것과, 제가 하려고는 하는데 일일이 물어보다 결국 손을 타고 마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귀찮은가 잠시 생각하다 그만뒀다.
어차피 귀찮고 어차피 티꺼웠다.
* * *
다음 날 새벽, 하늘인 대장 하나가 으스대며 오더니 수행원을 기술자로 빌려 쓰는 대신 체류 기간을 늘려주겠노라 고했다.
시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그러라고 허했다.
그때부터 단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한번 방을 나가면 밤이 늦을 때까지 처소에 들를 틈도 없었다.
치풍관 장인들은 수준과 열의가 대단했다.
다들 마치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과 공부에 매달렸다.
험상궂고 무뚝뚝한 남녀 장인들이 뭐 하나라도 더 도움 되는 것을 얻어들어 볼까 하고 단에게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하늘인들도 시큰둥한 척한 것에 비해서는 기대가 큰 듯 품을 아끼지 않았다.
광산과 채집터에 인력을 돌려 재료를 넉넉하게 공급해주고, 단이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 다른 데서 일하던 장인과 일꾼도 척척 데려와 넣어줬다.
작업장 분위기가 워낙 좋은 탓에 단도 자꾸만 일에 열중해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는 원래 목적을 잊지 않았다.
단에게는 화약과 화포 만드는 것 말고도 특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단이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상대에 맞게 대화 수위를 조절하며 윗대가리 뒷담을 유도하는 능력이었다.
그깟 화포 기술보다 훨씬 유용한 특기였다.
이틀간 단과 어울려 치풍관 땅인들 욕설을 질펀하게 풀어놓은 장인들은 사흘째가 되자 슬슬 하늘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것도 단이 일부러 속도를 늦춰놓은 거였다.
모든 일꾼은 윗대가리를 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뒷담화와 정보 누설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만에. 강자를 욕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사람은 공범에게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넘겨주고 그 두려움을 무마하려고 한다.
그리고 언제 어떤 곳이든, 진짜 정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단은 열기로 가득한 작업장을 나와 뻑뻑하던 허리를 쭉 폈다.
슬슬 누가 어디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안경테 밑에 찬 땀을 닦는데 나이든 장인 하나가 단의 어깨를 툭 쳤다.
단이 아무리 분위기를 띄워놔도 한 번도 뒷담화에 말을 얹는 일 없이 묵묵히 일만 하던 사람이었다.
장인이 물었다.
“허리 안 좋은가? 젊은 사람이 왜 그래.”
“아, 평소엔 괜찮습니다. 요 며칠 무리해서….”
단이 얼버무렸다.
장인은 무뚝뚝한 얼굴에 드물게 웃음을 담더니 단에게 말했다.
“난 장인이 말 많은 걸 싫어하지만 말하면서 손이 계속 움직이는 녀석은 별개지. 자네 같은 젊은이가 치풍관에도 많아야 되는데. 머리도 좋고 아주 성실해. 마음에 든다는 얘기야.”
“아이구. 감사합니다, 어르신.”
단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냉소했다.
지 맘에 든 게 뭐라고 저렇게 으스대며 말하나. 떡이라도 나오면 밉지나 않다.
단은 자기가 일하는 걸 좋아한다는 게 싫었다.
일을 많이 해봐야 남의 배만 불리고 일을 잘해봐야 눈에 띄어 자기 목만 조른다.
안에서 한 사람이 단을 불렀다.
“어이, 남운관 친구! 주물장이 불러!”
“아, 예! 갑니다!”
단은 잽싸게 대답하고 웃는 얼굴로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단은 그 호칭도 싫어했다.
그는 남운관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 사람도 아니었다.
사실 세상에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대신에 소원만 많았다.
그날도 숙소에 돌아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호란은 이미 잠이 들었고 시현만 불을 켜 놓고 책을 읽다가 단을 맞았다.
시현이 미소를 짓고 물었다.
“포 제작은 잘되어 가느냐? 오늘 낮에 화약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만 들어도 위력이 대단할 것 같더구나.”
“화약 만드는 건 궤도에 올랐고, 화포도 슬슬 주물틀이 나오기 시작했어. 나도 생각보다 빨라서 놀라는 중이야…. 근데 네가 물어봐야 할 건 그게 아니지.”
단은 복도에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시현에게 몸을 기울여 작게 말했다.
“생각한 대로야. 의과와 양생과로 격을 지닌 땅인 몇은 살려둬서 가끔 마력석을 주고 의법사 일을 시키고 있어. 격 못 딴 사람과 애들도 죽이지 않고 살려뒀어. 다 해서 쉰 명 좀 넘는 것 같아. 의법사들은 군영에 있고, 나머지는 노역을 시키고 있대.”
시현이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알아냈느냐? 감시가 심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다 알아냈느냐?”
“벌써가 아냐. 아직 중요한 건 몰라. 하늘인이 빼앗은 마력석이 수가 상당한 모양인데. 누가 어디에 두고 관리하는지를 모르겠어.”
“그것은 둘째 문제다.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니 다행이다!”
단은 시현이 기뻐하게 내버려두었다.
변함없이 눈치코치라곤 없는 놈이었다. 땅인의 생사 따윌 누가 상관한다고.
다리가 부러졌던 수리가 멀쩡해진 채로 나타났을 때, 시현도 단도 곧바로 살아남은 땅인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현은 그들의 처지를 걱정했다. 단은 이용해 먹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문 나리의 오지랖은 보통 오지랖이 아니어서, 하늘인들 상대로 오지랖을 못 부리게 하려면 다른 오지랖 부릴 거리를 찾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치풍관에 남은 땅인을 찾아보겠단 것은 시간 끌기 딱 좋은 핑계였다.
“의원 중에 편씨 선의라는 사람이 제일 높은 치래. 기회가 되면 접촉을 해볼 건데…. 네가 여기 와 있단 걸 증명할 만한 물건이 뭐 없을까? 일이 꼬여서 하늘인 손에 넘어가도 탈이 없을 만한 거로.”
단의 요청에 시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서안에 종이와 필묵을 올렸다.
그는 종이에 서명 없이 뜻글자로 딱 한 구절만 적었다.
民事不可緩也.
(백성의 일은 미루어둘 수 없다.)*
그가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단에게 종이를 건넸다.
“격 있는 이라면 아무 땅인에게 건네어도 내 글씨와 이 구절을 알아볼 것이다.”
단이 눈썹 끝을 치켰다.
“치풍관 사람이 니 글씨를 왜 알아봐?”
“청을 받아 매해 글씨를 보내주고 있었다. 서격원 지부 정문에 건다 했으니 격 있는 이는 서격원을 드나들며 보았을 것이다. 작년에도 올해에도 이 글을 보냈다.”
“아… 그러세요….”
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글귀를 훑었다.
그 먼 남운관에다 이딴 종이 쪼가리를 보내달라는 놈들이나 달란다고 써주는 놈이나 단이 보기엔 똑같이 팔자 좋은 것들이었다.
시현이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 문장은… 치풍관에서 위에 선 자 누구라도 이해해주길 바라고 보낸 것이었는데. 결국 닿지 않았구나.”
“서로 꼴값도 참.”
단이 탄복한 듯이 말하자 시현은 고개를 홱 돌렸다.
단은 종이를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현이 이렇게 선비 놀음 하는 인간인 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딱 좋을지도 몰랐다.
그 아무 근거 없는 당당함이 치풍관에 남은 땅인들에게 아무 근거 없는 희망을 줄 것이다.
화포 만들기 따윈 시간 벌이를 위한 미끼였다.
땅인들의 안위를 알아보겠단 것도 같은 미끼였다.
단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일을 그르치되, 판을 최대한 크게 벌인 다음 그르치는 것.
누가 어떻게 수습할 생각조차 못 하도록.
(계속)
* * *
*) 맹자, 등문공 상편. 해석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