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70
270화
* * *
“완시현 문이 명한다. 지금 귀수관에서 관과 군,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벼슬하는 땅인이 가진 격을 모조리 폐한다. 또한 오늘로부터 5년 동안 귀수관 서격원을 닫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인 무리에서 비명 같은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거두어주십시오!”
“거두어주십시오! 용서하십시오, 문이시여!”
경내를 가득 메우는 통곡과 읍소에도 시현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내가 격을 폐할 권한은 있어도 한번 폐한 격을 다시 줄 권한은 없으니 이것은 번복할 수가 없는 일이다. 타 관성 서격원에서라도 시험을 다시 치고 싶다면 주위에 마음을 곱게 써야 할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울부짖기를 멈추지 않자 시현이 노성을 쳤다.
“시끄럽다! 돌 인간에 영합할 생각을 하면서 이 정도도 각오를 안 했는가! 관성의 성벽이라도 없어져야 처지를 깨닫겠는가!”
머리 위의 하늘이 쿠르릉 울었다. 거대한 기운이 압축하는 진동이 귀수관 전체로 퍼져나갔다. 모두가 입을 닫았다.
시현이 다시 차분해진 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은 문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아직 아무것도 경험을 못 하였다. 그를 생각하고 이후 처신을 현명히 하라.”
드넓은 관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을 맺은 시현은 작게 목 넘김을 했다. 호통치고 어쩌고 할 것을 다 했지만 사실은 한계가 가까운 모양이었다. 그가 꼿꼿이 서서 표정을 유지한 채 작게 말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제 정말로 못 걷겠다. 몸에서 힘을 빼면 바로 넘어질 것 같다.”
길이 사예를 훌쩍 들어 올려 한쪽 어깨에 앉혔다. 그리고 반대편 무릎을 꿇고 시현의 뒤에 붙으며 속삭였다.
“제가 나으리를 받쳐 들면 바로 뒤로 머리를 기대십쇼. 누워 버리신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길은 곧바로 시현을 뒤에서 안듯이 들어 올렸다. 머리가 길의 어깨에 걸쳐질 때 시현은 짧게 눈을 감았지만 곧 다시 눈을 뜨고 표정에 힘을 주었다. 사예가 손을 뻗어 넓은 소매 아래서 시현의 고개를 받쳐주었다.
길은 등을 돌려 느긋한 걸음으로 삼문이었던 곳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저지하거나 뭐라 하지 못했다. 무너진 담벼락 주위에는 사방에서 달려온 하늘인 병사들이 잔뜩 있었지만 일행이 다가가자 모두 바닥에 꿇어 엎드릴 뿐이었다. 길은 전진하는 것만으로 공성탑 같은 위압감을 주는 존재였고, 어깨에 오른 사예가 그저 신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현이 안겨 있는 것도 큰 위화감을 안 주는 것 같았다.
호란을 업은 단이 길을 따라잡으며 물었다.
“뒤통수 걱정 안 해도 됩니까? 병사들이 쫓아오거나….”
사예가 까르르 웃었다.
“전혀! 거석이 안 온대도 성벽 없어지는 건 다들 무섭겠지. 최소 하루는 지나야 누가 서격원 열어달라 사정하러 올 용기를 낼걸.”
사예가 받쳤던 손을 빼서 기특하다는 듯 시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래. 공갈을 치려면 이렇게 쳐야지. 잘했어 우리 도훈이, 다시 봤어!”
“큰소리로 공갈이라고 말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하지… 하지 말아다오. 머리가 흔들린다. 어지럽다.”
단과 시현이 번갈아 호소했다. 사예가 시현에게 말했다.
“어지럽다면서 왜 온 동네 기운은 아직까지 꾸역꾸역 붙들고 있어? 그냥 놔버려.”
“하지만….”
“괜찮다니까. 어차피 더 잡고 있어 봐야 너 지금 상태론 다룰 수도 없잖아.”
시현이 눈을 감으면서 크게 숨을 내뱉었다. 거리에 가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예는 시현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이제 시야 안에 집중해. 지금 눈앞에 기운이 얼마나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만 봐. 흐름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예측하지 말고.”
“어떻게….”
사예는 시현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현은 유도에 잘 따르지 못했다.
사예가 다시 말했다.
“앞뒤 흐름 읽지 말라니까. 딱 한 층위에만 집중하라고.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됐다 치고!”
“하지만 흐름은 읽으려고 해서 읽는 게 아니지 않은가. 보면 아는 것인데….”
시현이 하소연했다. 사예가 코에 주름을 잡으며 단 쪽을 보았다.
“얘 짜증 나.”
“알아주시니 기쁩니다.”
늘어진 호란을 고쳐 추키며 단이 말했다.
일행은 관청가를 빠져나와 광장에 두었던 수레에 올랐다. 소란에 놀라 숨은 듯 광장과 거리에 사람이 확 줄어 있었다.
단은 호란을 안쪽 자리에 눕힌 뒤 고삐를 잡았다. 행선지는 사예의 집인 류씨 본가였다. 당연히 기껏 들어온 귀수관 관성을 나갈 생각은 없었다. 적진 한가운데라고는 해도 성안의 법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귀수관 안에서 버티는 쪽이 훨씬 유리했다.
사예가 도움이 됐는지 어떤지, 류씨 본가에 도착할 무렵에는 시현의 어지럼이 잦아들었다.
단은 골목 안 작은 마당 입구에 수레를 세웠다. 한참 전에 전갈이 갔는데도 집 앞이나 마당에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죄인을 맞으러 나오지 않는 법도를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류씨 집안 가옥은 한 관성의 중시조가 살았다기에는 조그맣고 검박한 곳이었다. 행랑도 없는 낮은 돌담 너머로 필요한 공간만 갖춘 정당과 부엌 딸린 안채, 작은 창고가 보였다.
시현은 마당에 발을 들이며 복잡한 감회에 젖었다.
귀수관 중시조 류해선 인은 200년 전 말왕을 몰아내는 데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다. 왕이 사라진 후 팔대관성이 지씨옥을 둘러싸고 분란에 빠지는 대신 서로 돕고 견제하며 각자 자치를 시작하게 된 데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일을 마친 후 그는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권세를 바라고 왕을 폐한 것이 아니라며 총치총령 자리는 물론 일체의 벼슬을 사양했다. 자식들도 관과 군의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저술을 하며 여생을 보냈고 마지막에 유훈을 남기기를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자리에 나가지 말고 의과와 양생과 외에는 공부하지 말라 했다.
부귀영화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존경이 남았다. 초대 총치총령이 아님에도 당연스레 중시조로 불렸다. 자손들은 유훈대로 부와 권세를 멀리하며 검소하고 자족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류사예를 낳고 길러 세상에 내보냈다.
세상일이란 원인과 결과가 꼭 한눈에 알아보게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예의 부모는 둘 다 격 안 지닌 의법사로, 온건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최소한 겉보기에는 원인과 결과 어느 쪽도 아니었다.
부부는 드디어 돌아온 딸을 기뻐하며 맞았지만 그 딸은 기뻐할 겨를을 얼마 안 줬다. 사예가 어떤 폭풍을 몰고 왔는지 알고서 둘은 놀라서 어쩌지를 못했다. 시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그저 당황하는 것이 이쪽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결국 부부가 정당을 통째로 내어주고 안채로 건너갔을 때 시현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 소심해졌네. 전에는 저렇게 걱정 많지 않았는데.”
사예가 말했다. 그는 아직 눈을 못 뜬 호란의 맥을 짚어보는 중이었다. 단이 미간을 좁혔다.
“진짜요? 사예 님을 딸로 두고 걱정을 안 할 만큼 무책임한 분들로는 안 보이는데요.”
“왜? 내가 얼마나 이상적인 자식인데. 엄빠가 빈민가니 속령이니 왕진 다닌다고 내내 집에 혼자 놔뒀지만 알아서 잘 컸어. 어릴 때부터 독립심 투철하기로 유명했다고.”
“그게 제일 걱정할 부분 아닌가요? 너무 독립적인 인격이라서 사회의 양식과 식견으로부터도 독립해버렸잖아요.”
근심에 찬 얼굴로 호란을 살피고 있던 시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웃음을 터뜨렸다. 별로 시현을 웃기려고 한 건 아니었던지라 단은 표정을 가다듬고 호란에게 깔아줄 자리를 가지러 갔다.
사예는 꼼꼼히 진맥을 한 뒤 호란의 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장담했다. 얘는 자기가 평생 본 사람 중 가장 건강한 사람이고 말하자면 건강함이란 개념에 새 지평을 여는 사람이라고까지 했다. 단지 귀수관 의법사들이 급하게 치료하느라 마력을 들이부은 직후니 깨우지 말고 알아서 눈 뜨게 놔두는 게 좋다는 얘기였다.
얼굴과 몸의 피를 닦아내고 보니 혈색도 괜찮고 표정도 편안해 보여서 단과 시현도 안심했다.
호란은 한 시진이 지나기 전에 의식을 회복했다. 정신이 완전히 들기 전에 이미 주위 상황이 바뀐 걸 느꼈다.
지하 뇌옥의 횃불 불빛 대신 창호로 드는 오후의 햇빛이 눈꺼풀에 내려앉아 있었다. 살기등등하던 감시병들의 기척도 없었다. 등 밑에서는 부드러운 요와 온돌의 훈기가 돌았다.
바로 옆에 사람 기척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며 눈을 뜨자 낯익은 두루마기 자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이 이부자리 바로 옆에 앉아서 저고리에 동정을 달고 있었다.
뒤척이는 소리에 단이 호란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작게 물었다.
“깼구나. 좀 괜찮아?”
“단? 내가….”
“호란아!”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데 방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현이 한달음에 방을 건너와 호란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 시문 님?”
호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현은 포옹을 풀고서도 호란의 두 팔을 잡고 놓지 못했다. 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고생했느냐. 두고 가서 미안하다. 정말….”
“아니에요. 제가…. 여기는….”
호란은 얼떨떨해져서 방 안을 둘러보다가 생각 못 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방 한쪽 시현이 있던 곳에 작은 다과상이 있고 길과 사예가 앉아있었다. 사예가 손을 들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
“사예 님? 최길?”
“헤헹.”
계속 놀라기만 하는 호란을 보고 길이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이겼다는 표정이었다.
“시문 나으리 호위라고 잴 줄은 알아도 막상 중요한 건 다 놓치셨구만. 그쪽은 이제껏 나으리 헛 따라다닌 거야. 나으리 아니면 누구도 못 보여줄 구경거리에서 혼자 빠졌다고.”
“뭐를….”
“헤헹.”
실신한 사이 일어난 일을 들으면서 호란은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 부수는 건 안 보고 싶은데, 솔직한 마음을 말하면 서격원 닫는 건 좀 보고 싶었다. 길이 으쓱거리는 게 약 오르기도 하고 자기 때문에 너무 큰일을 낸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호란이 시현에게 물었다.
“좀 너무… 하셨던 것 아니에요?”
“그랬느냐?”
시현이 미소 지은 채 말했다.
“아까는 내가 화가 났었단다. 실은 아직도 화가 다 안 풀렸다. 그래서 잘 모르겠구나.”
길이 아쉬운 듯이 말했다.
“다 풀릴 때까지 하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어찌 그렇게까지 하겠느냐. 여기 사람들도 살아야지.”
시현이 점잖게 말했다. 길이 씩 웃었다.
“그래도 나으리 전보다 훨 사람이 훤해지셨습니다. 전에는 표정도 거의 없고,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이 양반 속에 감정이 안 들었나 싶게 재미없는 분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더 사람 같으시네요.”
시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랬겠지. 혹여 일전에 섭섭하게 했었다면 미안하다. 내가 법도니 무엇이니 얽매이는 일이 많다. 지나고 보니 매번 그럴 것도 아니었지 싶은데.”
“그러니까요. 참아서 남는 게 뭐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 감정에 솔직하게 사는 게 제일입니다요!”
어찌나 감정을 안 참고 사는지 중부권 상행 호위꾼들에게 재해 취급을 당하는 남자가 제 가슴을 탕 두드려 보이며 웃었다. 시현은 대답은 안 했지만 마치 감화라도 된 듯한 미소를 짓고 길을 보았다.
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짜냐? 그게 정말 너네 둘이 함께 도달한 최선의 결론이냐? 그 방향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야 할 감화의 맞는 방향이냐?
안 될 말이었다. 오늘 단은 ‘자기 감정에 솔직한 완씨 시문’이 인류에게 어떤 재앙이 될 수 있는지를 극히 일부 경험했다.
이 양반은 참고 얽매이고 자제하며 솔직하지 못하게 사는 게 맞았다. 자신을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그게 맞았다.
후에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도로 남운관을 향하게 되면, 여행을 하면서 줄줄 새게 된 감정을 잘 틀어막아서 데려가는 것도 큰일이 될 것이다.
호란이 놀랄 일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사예가 귀수관 출신일뿐더러 인 격에 달한 의법사였다는 얘기를 듣고 호란은 바로 흥분한 얼굴이 되었다.
“사예 님이 그렇게 대단한 의법사님이었어요?”
“대단은 모르겠고 의법사기는 해. 양생법도 하고.”
사예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호란의 눈이 더욱더 기대에 찼다. 그가 주먹을 꼭 쥐고 흥분을 누르며 물었다.
“그럼, 그럼 혹시, 사예 님이 시문 님 신이명을 고쳐주실 수 있어요?”
“아니. 못 고치는데.”
대답이 너무 빨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