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73
273화
* * *
“어르신들께선 지금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알고는 있네만, 그….”
“아니면 시문 나으리님을 모셔올까요? 나으리님께서 말씀하시길, 폐 끼치길 원치 않으니 류씨 댁 분들을 귀찮게 하는 이들이 있으면 바로 알리라 하셨습니다.”
“아, 아니네! 되었네!”
남자는 두 팔을 젓더니 부리나케 길을 가로질러 제집으로 들어갔다. 떨어진 데 있던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보고는 슬금슬금 골목을 빠져나갔다.
호란이 단을 보았다.
“저 땅님들 할 말 있어서 오신 거 아니야? 왜 도망가는 거야?”
“그야 이 집에 있는 누군가가 자꾸 징징거리면 성벽을 다 부숴버리겠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아하.”
“할 말은커녕 아직 뭘 어떻게 할지 방침도 제대로 못 정했을걸? 방금 건 그냥 분위기나 살피러 온 사람이야. 일부러 이 댁 어르신들이랑 연 있는 사람으로 보내는 거야. 조금이라도 불똥 면하라고.”
단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시현과 함께 있는 사예를 알아본 귀수관 사람은 상당히 많았다. 시현 일행이 류씨 가로 향했고 한동안 머물 분위기란 것도 금세 알려졌다.
처음에 관인들은 중시조가 직계손의 행보에 담긴 의미를 놓고 전전긍긍했다. 사예가 극상격이란 점도 사람들의 곤혹을 더했다. 아무리 귀수관에 인 격이 숱해도, 아무리 ‘귀수관 3대 내놓은 극상’ 중에 이의 없이 첫손으로 꼽히는 류사은이라도 극상격은 극상격이었다. 그가 받은 추방형은 죄에 비해 가벼웠지만 그래도 원한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관인들은 격분한 완씨 시문을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는 그 류사은이라도 중간에 끼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미 호란이 자는 사이 사예의 귀성 축하를 핑계로 류씨 부부의 지인이 여럿 찾아왔었다. 순수한 방문이 아닌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은 류씨 부부가 선을 긋고 상대하지 않고 있었으나 조만간 누구를 만나 주기는 해야 할 터였다.
단은 허리에 손을 얹고 문 닫힌 정당 쪽을 바라보았다.
“우리 둘이서 거리로 나가면 귀수관 놈들이 잔뜩 들러붙어서 뭐든 캐내려고 할 거야. 근데 차라리 그쪽이 나을 거 같다. 치료하는 동안엔 마법사 둘이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될 거 아냐. 우리가 돌아다니는 동안엔 주의가 우리한테 쏠리겠지.”
“그럼 얼른 가자!”
호란이 훌쩍 돌담을 뛰어넘으며 말했다.
단의 말마따나 골목을 나서기도 전에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류씨 가 주위에서 멀어지자 하늘인 병사들도 거리를 두고 슬금슬금 따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에게 직접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호란은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에 민감해서 이런 상황이 거슬렸다. 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대놓고 따라다닐 거면 그냥 와서 말을 시키지.”
“그러게 말이다. 대체 얼마나 간이 쫄아붙은 거야? 누가 와서 말 걸면 먹거리 장터 큰 데 어디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단도 투덜거렸다. 그래도 단은 길을 모른다고 한 것치고는 갈림길마다 척척 잘만 나아갔다. 사예의 안내를 받으면서 류씨 가까지 수레를 몰아온 만큼 짐작 가는 방향이 있는 것 같았다.
단이 말했다.
“우리가 어디 가는지부터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나 봐. 누구 높은 나리 댁에 서한이라도 전하러 간다고 생각하나? 그런 거면 일단 놔두려고 하겠지. 매달릴 인맥이 한 가닥 더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우린 간식 사러 가는 거잖아. 알고 나면 저 땅님들이 실망하겠다.”
“알 게 뭐람.”
결론만 말하면 둘을 염탐하던 귀수관 땅인들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선지를 알고 기뻐한 것에 가까웠다. 두 사람이 장터가 보이는 큰길로 나가자마자 땅인 너덧 명이 넓은 소매를 펄럭펄럭 휘날리며 둘에게 뛰어왔다.
“너희들! 너희들… 아까부터 봤는데 혹시 술 심부름 나온 것 아니냐? 사인 어르신께서 술이랑 안주를 찾으시지?”
땅인들은 아주 확신과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단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사예 또래의 여자 한 사람이 말을 늘어놓았다.
“사인 어르신이 십 대 때부터 다니시던 단골 가게를 내가 전부 안다. 탁주 집 청주 집은 물론이고 육전 집도 튀김 집도 훈연 육포 집도 모두 옛날 그대로 있어. 맛도 하나도 안 변했단다. 내가 알려주는 대로 싸 가면 사인 어르신께서 아주 좋아하실 거야!”
“아… 과연. 유명하다 자부하시더니 이런 방면으로도 유명하셨군요.”
단이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땅인 남자가 좀 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실은 너희가 귀찮게 가게를 돌아다닐 것도 없다. 우리가 이미 주안상 준비를 넉넉히 해놓았느니. 결례만 아니라면 류씨 댁에 들여 드리고 싶다만 어떠하냐? 그쪽이 너희도 편할 것이다. 밤새 술 사다 나를 필요도 없고.”
“그래. 꼭 윗분들만이 아니라… 너희도 무어 원하는 게 있느냐? 여행 중에 아쉬운 게 많았을 텐데 다 말해 보거라. 사양할 것 하나도 없다.”
“류씨 댁에 상주하는 일꾼이 없어서 번거롭고 힘들지 않더냐? 너희 손 덜어줄 일꾼을 몇이든 보내줄 수 있느니라.”
땅인들이 번갈아 구슬리는 말을 늘어놓았다. 말씨만 낮춤말이지 당장 단과 호란에게 머리 숙이고 절이라도 할 태세였다. 단은 시시각각 환멸로 가득해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말씀은 모두 알겠는데요. 나리들께서 마음을 써주시려면 술안주나 일손보다 먼저 살피실 일이 있지 않습니까?”
“무어냐? 말하거라. 아무것이나 말해도 좋다!”
“수레요. 귀수관군이 멋대로 끌고 간 시문 나리님 수레를 돌려주셔야죠. 안에 든 짐도요.”
“아….”
달려왔던 땅인들 중 뒤쪽에 서서 이제까지 한마디도 안 했던 사람이 안타까운 음성을 냈다. 단과 호란도 다른 땅인들도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목소리를 낸 사람은 무리 중 가장 좋은 옷을 입은 중년 여자였다. 평복 차림을 했어도 잘나가는 고관 태가 뚜렷했다.
여자는 주목을 받자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어련히 가져다드릴 것을! 너희는 가만히나 있거라. 준비가 되는 대로 사람이 갈 것이다.”
입장이 곤란하니 더 위세를 부리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모양새였다. 단은 물론 호란도 이제는 땅인 고관들의 이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운관에서의 안 좋은 기억도 불현듯 되살아났다.
호란은 땅님 상대로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냥 가져다주시면 되지 준비가 왜 필요해요? 혹시 수레에서 귀중품이랑 마력석을 훔치셨어요?”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라 인상을 쓰고 말하는 것만 못했다. 둘러선 땅인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여자 고관도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직후 그가 폭발했다.
“방만한 것이 감히! 네가 우리 귀수관을 무어라 생각하는 것이냐!”
고관은 엄청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불호령을 내렸다. 꼭 일전에 만난 정건이 아니라도, 이런 모습도 이미 익숙했다.
단이 공손하게 말했다.
“예, 예. 귀수관이 고결한 선비의 땅으로 이름 높은 걸 저희도 알지요. 귀수관의 그 어느 분이 한낱 금전 따위를 탐내어 수레에 손을 대시겠습니까.”
“이를 말이냐!”
“그래서 금전 말고 뭘 손대셨습니까?”
“손대지 않았대도!”
“그럼 저희가 지금 수레를 가지러 가도 되겠습니까?”
“…….”
고관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맨 처음 말 걸었던 땅인이 둘을 달래려 나섰다.
“얘야, 사인 어르신이 주안상을 기다리고 계시지 않느냐. 일단 나랑 같이 장부터 보자꾸나. 수레는 그사이에 사람 시켜 가져다 놓으면 되지.”
이쯤 되면 이 인간들이 대체 뭘 숨기려고 이러는 건지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단이 말했다.
“수레부터 가지러 가겠습니다. 사인께선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그건 아니지.”
“네가 사인 어르신을 잘 몰라서 그런 소릴….”
“아니요. 사인께선 먹어 보고 맛있으면 뭐든지 다 용서하십니다. 수레를 가지러 가겠습니다.”
단은 양보할 기색이 전혀 없었다. 고관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잠시 후 총령부에 도착한 단은 정말로 달갑지 않은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단의 입장에선 차라리 금품과 마력석이 없어진 쪽이 나았다. 그런 건 같은 양을 채워 넣으라고 하면 되니까.
“옷고름이라고요.”
단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뇌었다.
“시문 나리님 의복의 옷고름이 없어졌다고요? 겉옷, 중단, 적삼 안 가리고 전부?”
“전부는 아닐 게야….”
이 자리의 유일한 벼슬아치가 자신 없게 말했다.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알았는지 고관들은 모두 창고 밖에 머물고, 안에는 당하의 관리 한 사람과 잡직 반민 몇뿐이었다.
관리는 자신이 하등 도움 안 되는 소리를 한 걸 알았는지 변명을 보탰다.
“오해하지 말거라. 사람들이 악의로 한 것이 아니야. 서격 시험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게 갑자기 정해진 시험이잖느냐. 다들 준비가 부족하니 불안해서 그랬을 거다.”
호란은 기운이 빠졌다. 아니나 다를까, 돌 인간과 거래해서 마력을 되찾은 뒤 귀수관 땅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격 시험 날짜를 잡는 것이었다. 이제 와선 놀랄 일도 아니었다. 다만 상황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격 시험하고 시문 님 옷고름이 무슨 상관이에요?”
호란이 묻자 관리는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것이… 북방에는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이 있는데 말이다. 꼭 사람들이 그걸 믿어서 그런다기보다.”
관리가 말을 질질 끄는 것을 못 기다리고 단이 쾅 터졌다.
“전통이 아니라 미신이겠죠! 압니다. 격 시험 합격자의 옷띠를 얻어 두르면 공부도 잘되고 그 해 시험에 바로 붙는다고요. 하지만 옷고름하고 옷띠는 다르잖습니까!”
“중부식 옷이 유행한 후부터는 세조대나 옷고름도 비슷하게 치고 있네.”
“지금 세조대도 다 없어졌단 얘기… 아니지. 애초에 시문 나리님은 시험 합격자가 아니시잖습니까. 오히려 시험이랑은 아무 인연이 없는 분이라고요.”
“알지. 그래도 웬만한 시험 합격자보다 훨씬 더 대단한 분이 아니냐. 뭐든 간에 효험이 있겠지.”
효험이라고 말하는 관리의 눈에 미처 자제 못 한 기대감이 비쳤다. 단은 이 인간이 제일 먼저 옷고름을 떼어다 제 자식 갖다줬으리라는 데 금폐로 40금은 걸 수 있었다.
이쯤 되면 꼭 참을 필요도 없었다. 단은 이제 거의 공기처럼 두르게 된 완씨 시문의 세도를 믿고 성질을 폭발시켰다.
“해도 해도 너무 뻔뻔하신 것 아닙니까! 오늘 낮까지도 온 동네가 합심해서 사람을 죽이려고 들었잖아요. 그러고서 좋은 운수는 또 얻어 가고 싶어요? 그 운수 찾겠다고 멀쩡한 옷을 쪼가리 내서 너 하나 나 하나 집어 가고? 무슨 놈의 고결한 선비들이 이따윕니까, 차라리 돈을 탐내시라고요!”
관리는 대꾸 한마디 하지 못했다. 바랜 옷 입은 반민에게 욕을 먹는 게 억울한 낯이었지만 처한 입장이 입장이었다.
호란도 단을 말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사실 단에게 귀수관 땅님들의 파렴치함은 아무래도 좋고 저 분노는 모두 의복 관리자로서의 것이겠지만 다를 게 있나 싶었다. 호란 생각에도 저 사람들은 욕을 좀 먹어야 했다.
잘 생각해 보면 단이 화를 잘 못 참는 사람이 된 건 단의 책임이 아닐지도 몰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