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76
2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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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서원의 입지로 산속과 도시 중 어느 쪽이 나은가는 귀수관의 이치 좋아하는 학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논쟁해온 주제였다. 세속을 멀리하며 면학에 힘쓸 수 있는 산중이 좋은가, 법술사들 간에 교류가 활발한 관성도시가 좋은가?
참고로 논쟁이 아무리 열을 띠어도 결론은 논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어떤 입지의 서원이 상격을 많이 내느냐에 따라 우세가 바뀌었다.
그나마도 신진 문림서원이 상격은 물론 극상격까지 다식판에 찍어내듯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논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제 서원에서 중요한 것은 입지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교육법이었다.
문제의 문림서원은 입지 논쟁의 종결자답게 절충적이라면 절충적인 장소에 있었다. 위치는 산이라고 못 할 것도 아니었으나 귀수관에서 수레로 반나절이면 닿았다. 마을에서 서원까지 올라가는 데에도 한 각이 안 걸렸다.
산 아랫마을 역시 세속과 거리를 두었다고는 도무지 말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마을 중심에는 서원에서 공부하는 좋은 집안 자제들의 입맛에 맞춘 온갖 가게와 상점이 즐비하여 웬만한 읍성이 부럽지 않았다. 산자락의 계단식 논밭은 모두 서원의 소작지로 법술사들이 물과 지력을 관리하여 중부의 옥토만큼 소출이 좋았다.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서원이 자리한 세우산 일대가 모두 문림서원의 영지나 마찬가지였다.
관성과 세우산 사이 길이 잘 닦여 있어 일행의 수레는 수월하게 나아갔다. 사예가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동네 밥이 그렇게 맛있대. 옛날에 거기서 공부한 애 여럿 만났는데, 버텨서 시험 붙은 애든 중간에 뛰쳐나온 애든 밥 얘기는 꼭 했어. 서원 밥도 잘 나오고 아랫동네 밥 파는 집도 다 괜찮다고. 제일 많이 나온 추천은 달게 만든 찜닭이었어.”
단에게 술잔을 뺏기고 마부석에 끌려 나와 있던 호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한참 전 이야기잖아요. 변고가 났는데 지금도 장사를 할까요?”
“괜찮을 거야. 세우산 인근은 난리 난 후에도 거석의 습격이 거의 없었대. 집으로 피난 갔던 도련님 아가씨들이 도로 서원으로 돌아올 정도였다니까.”
“그건 거기 사람들에겐 다행이지만…. 음, 역시 운모가 일부러 그런 거겠죠? 이제까지 서원 주위에만 거석을 안 보낸 거요.”
호란이 물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사예 대신 단이 대답했다.
“아마도요. 이야기를 맞춰 보면 그 문림 스승이란 사람은 운모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고 정체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용당한 얼뜨기들이랑은 다르게 좀 더 제대로 된 교분이 있었겠죠.”
“운모는 말로만 인간들과 친구라고 하고 죽이거나 배신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걔도 진짜로 신경 쓰는 사람이 있기는 했구나.”
호란이 생각하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단은 오히려 그 점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뭐가 다 이 모양입니까? 돌 인간 놈들, 인류 멸절이 어쩌고 하면서 지 아는 사람은 다 봐주고. 이럴 때는 아주 세상에서 제일 인간적이지. 이놈의 세상은 망할 때조차 공평한 법이 없다니까요.”
“생각났다. 간식 종류는 수정과랑 잔기지떡이 맛있댔어.”
사예는 언제나처럼 염세적인 소리를 하는 단을 무시하고 제 말만 했다.
수레는 오래지 않아 세우산에 다다랐다. 경사진 산자락에 자리한 커다란 마을과 그 안팎의 논밭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마을 위쪽으로는 제법 빽빽한 자작나무숲 사이로 서원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뻗어 있었다.
이곳이 세우마을이었다. 원래 이름은 예전에 잊히고 세간에서는 문림촌이라 불리고 있었다.
호란이 마부석에서 몸을 앞으로 빼면서 말했다.
“마을 입구에 사람이 모여 있는데.”
“그러네요….”
단이 인상을 썼다. 마을 어귀 장승이 늘어선 공터에 사람이 잔뜩이었다. 얼핏 보아도 백오십은 넘을 것 같았다.
“저거 혹시 우리 때문에 모인 걸까?”
“그렇겠죠. 이미 전갈이 갔을 테니까요. 나리님이 귀수관을 다 뒤집어놓은 것도, 문림서원을 조사하러 사람이 간다는 것도 다 알 겁니다.”
“미리 알리지 말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알린 게 아니라 말이 나가는 걸 못 막은 겁니다. 귀수관 사방천지에 그 대단한 제자분들이 안 계신 데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죠.”
호란은 충돌이나 실랑이가 될 것을 각오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상황은 생각한 것과 달랐다.
보통 길을 막거나 사람 수로 유세를 할 때면 어김없이 맨 앞줄에 나오는 하늘인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공터를 메운 것은 전부 농군이나 상인, 직공 차림을 한 반민들이었다. 어린아이와 아기 업은 사람까지 있었다.
수레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일제히 공터에 엎드렸다. 맨 앞 사람부터 통곡하는 듯한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문림 어르신을 모셔가시면 아니 됩니다!”
“모함입니다! 어르신께는 죄가 없습니다!”
“차라리 저희를 모두 죽이십시오!”
“어차피 문림 어르신이 아니 계시면 저희는 모두 죽습니다!”
단은 말고삐를 거의 놓칠 뻔했다. 호란이 쳐다보니 욕을 궤짝으로 삼키다 목에 걸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나 이거 뭔….”
단의 입에서 말이 되지 않는 탄식만 흘러나왔다. 호란도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뒷자리의 사예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저거는 니네가 좀 어떻게 해라. 내가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이라 그런 거는 잘 못 해. 왜 그… 울고불고하는 사람들한테 폭력적인 수단으로 어떻게 하는 거.”
“왜 시작도 안 했는데 폭력적인 수단을 쓰는 게 전제죠? 어디가 착한 거죠? 사예 님?”
단이 반문을 이었지만 사예는 대답하지 않고 방풍막 뒤로 슬쩍 숨어버렸다.
호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떡해, 단? 나도 반민들 상대로는 힘 못 쓰는데.”
“그러니까 폭력적인 수단은 안 쓴다고요….”
단이 결국 고삐를 놓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실은 방금 류사예에게 폭력적인 수단을 쓰고 싶어진 참이었지만 그런 내심을 드러내는 건 이 상황에서 하등 도움이 안 됐다.
단은 주민 무리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수레를 내렸다. 그가 다가가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소란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뒷줄 사람들마저 우는 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단은 지금 이 순간 ‘듣거라’, ‘소란스럽다’ 같은 한마디로 좌중을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드는 시현의 능력이 절실하게 아쉬웠다. 하지만 얼굴 안 본 지 반나절도 안 돼서 벌써 생각나면 지는 거였기 때문에 곧바로 생각을 멈췄다.
단은 사람들 앞에 가서 섰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란 데에 성벽보다 더 굳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 손을 공수하고 곧게 선 채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이쪽 방식에 훨씬 더 익숙했다.
읍소하던 사람들의 목청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다들 흘끔흘끔 단을 쳐다보고 저들끼리 눈치를 보느라 맞췄던 소리도 들쭉날쭉해졌다.
결국 맨 앞 가운데에 있는 목청 큰 상인이 무릎 꿇은 채 허리를 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상인이 단에게 애걸했다.
“시문께서 보내셔서 오셨지요? 제발 부탁입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문림촌 모두의 생목숨이 문림 어르신께 달려 있습니다. 제발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단은 조금 틈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문림 어르신을 모셔가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만나 뵈려 하는 것뿐입….”
“거짓말!”
“안 됩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서 결국 치죄니 뭐니 할 것을 다 압니다!”
단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사람들의 아우성이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단이 말하기 전보다 소리가 배는 커졌다.
단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중구난방인 호소를 조각조각 모으니 사람들이 난리가 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문께서 대노하셨다는데 어찌 어르신이 무사하시겠습니까!”
“당신이 문림 어르신을 뵙고 입성하라 문령을 전하면 어르신은 따르실 수밖에 없다지요! 그러니까 문림 어르신을 만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가주십시오!”
“돌아가주십시오!”
아하, 그런 말로 겁을 줘서 선동을 하셨구만. 단은 속으로 생각했다. 주민들이 방패막이로 나선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저 위 서원에 도사린 꼰대 늙은이의 수작질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억지를 쓰다가 충돌이라도 생기면 백성을 핍박한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법술사와 하늘인 병사들이 달려나올 게 뻔했다. 제법 음흉했다.
단이 생각하는 사이 한계까지 높아졌던 사람들의 애걸 소리가 다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반면 단은 눈썹 하나 까닥 안 하고 같은 자세로 계속 서 있었다. 한동안은 이럴 일이 없었지만 단은 원래 입 닫고 버티는 게 특기였다. 황씨 유예의 화풀이 섞인 남 탓이나 양곤호의 무한반복 자기연민에 비하면 마을 사람들의 가짜 통곡 정도는 듣기 편한 축에 들었다.
인내심은 항상 약자 쪽이 오래 간다. 문림촌 사람들은 말로는 약자연하고 있어도 숫자와 명분으로 유세하러 나온 이들이었다. 반면 단은 문림을 만나려고 격식 갖춘 창의를 입었지만 좁은 소매 폭과 짧게 친 머리칼을 보면 반민, 그것도 궂은일 맡는 반민인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세도가 종자다운 위압적인 분위기도 없었다.
결국 사람들의 우는 소리에서 성의가 빠져나가고 낯에 불만이 비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같은 반민끼리인데, 별 반응도 없는 젊은 놈 상대로 무릎 꿇고 애걸하는 게 슬슬 억울해진 것 같았다.
둘째 줄에 있던 나이 든 여자 하나가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이쯤 말 듣고 사정을 알았으면 제발 돌아가주시오. 늙은이가 이리 부탁하는데!”
이미 말씨도 어조도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분위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가 올라오고 등이 펴지고, 읍소는 하소연으로, 이어서 항의로 변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은 꼼짝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누구는 그것을 주눅 든 것으로, 누구는 그것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니 아까부터 도대체…. 사람 말을 듣기는 하는 겁니까?”
단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대거리하듯 언성을 키웠을 때, 마을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땅에서 일어서 있었다.
남자가 단에게 한발 다가선 순간 호란이 마부석에서 총알처럼 뛰쳐나왔다.
“단!”
기세를 죽이지 않고 착지한 두 다리가 쿵 소리와 함께 흙을 튀겼다. 호란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으로 소리쳤다.
“보고 있으라고는 했지만 나 더 못 참겠어! 이 사람들 너한테 뭐 하는 거야?”
호란은 계속 다 보이는 장소에 있었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호란을 잊고 있었던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래도 한 번 바뀐 태도가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처음 언성 높였던 남자가 용기를 짜내 소리쳤다.
“하늘인 나리가 말씀하셔도 똑같습니다! 문림 나으리는 못 뵈십니다!”
“왜?”
호란이 물었다.
사람들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어느새 울고불고 마을 사람 다 죽네 할 분위기가 아니게 되어 있었다.
호란이 사람들을 빤하게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너희들 그냥 뚫고 지나갈 수도 있었어. 단이 착해서 이제까지 말을 들어준 거야.”
“그… 그렇게는 못 가십니다! 서원에도 몫꾼 나리는 많습니다!”
“힘으로 막겠다는 거야? 우린 시문 님 명령받고 온 건데?”
남자는 말실수를 깨닫고 완전히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술렁였다.
호란이 여전히 화가 난 채 단을 돌아보았다.
“단, 이 사람들이 너한테 행패 부렸어? 뭐라고 그랬어?”
단이 생글 웃었다.
“전혀 아닙니다. 그냥 이분들이 불쌍한 척에 실패하신 것 뿐이에요. 아무래도 그간 서원 믿고 어지간히 윤기나게 사셨나 봐요, 영 끈기가 없으신 게.”
시종 차분하고 공손했던 단이 낯을 바꾸고 얄미운 소리를 해대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가 입을 딱 벌렸다.
“저, 저 뻔뻔한 게!”
“앞으로는 할 거면 끝까지 하세요. 좀 어설프더라도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요.”
다들 어쩔 줄을 몰랐다. 주동 격인 상인은 일을 망쳤다 싶었는지 급기야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뭐 저런 놈이 다. 세상에 세상에, 저놈과 하늘인 나으리가 정말 시문께서 보낸 사람이 맞습니까? 문께서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 문림 어르신이 은거하신 분이라 해도, 격 있으신 땅님을 보내셔야 경우가 맞지요!”
“아니 그… 격 있는 땅님 찾지 마세요. 여러분을 위해서 그게 좋아요.”
단이 중얼거렸으나 이미 호란의 귀에 말이 들어간 뒤였다. 호란이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격 있는 땅님 계셔! 사예 님!”
“나 불렀어?”
사예가 방풍막 사이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