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80
280화
* * *
마을 길목의 거석은 한 마을에서 막아낼 수 있는 수가 아니었으므로 시현은 최악의 사태를 각오했다. 하지만 목적한 용소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조사단을 맞았다.
주민들은 약간 불안한 기색은 있어도 모두 무사하고 안색이 좋아 보였다. 마을도 습격당한 흔적이 전혀 없이 멀쩡했다. 마을 여기저기가 조금 어지럽고 한쪽에 집을 허문 자리가 보이기는 했으나 전부 사람 손으로 한 것이었다. 가옥 여러 채를 허물고 비어 있는 터 너머로 새로 쌓은 석책이 높이 솟은 것이 보였다.
시현은 주민들에게 인사조차 받지 않고 마을의 큰머리에게 서둘러 물었다.
“거석이 마을을 덮치지 않았느냐? 상한 사람은 없느냐?”
“무섭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괜찮았습니다. 길목만 막고 있지 한 놈도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학사님들 마법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현은 마법이란 말에 미간을 좁혔다. 사전에 보고받기로 이 마을은 규모는 꽤 컸으나 주민은 하늘인과 반민뿐이었다.
“학사가 법술을 썼다 했느냐. 지금 이 마을에 땅인이 와 있느냐?”
“아니요, 예전에 걸어 주고 가신….”
큰머리는 말하다 말고 자신 없는 얼굴이 되었다. 큰머리 옆의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
“선숙 큰머리, 혹시 그건 말씀을 드리면 안 되었던 게….”
“그래도 관성 높은 분들이 친히 오셨는데 말씀을 드려야지?”
“하지만 관이나 순찰대에도 말하면 안 된다고….”
수군거리는 하늘인들에게 총령부 태보가 호령을 내렸다.
“이놈들, 위 앞에서 감히 저들끼리 입을 놀리고 딴생각을 품느냐! 당장 엎드려 전부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부복은 되었다. 그보다 말하여라. 그 학사들이란 자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였고 너희에게 뭐라 말하였느냐?”
시현이 물었다. 그의 지위가 높은 걸 눈치챈 마을의 하늘인들은 더 이상 머뭇대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작년 말 거석이 유독 날뛰던 때에 문림서원 학사님들이 왔다 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석이 마을에 못 들어오게 하는 주문을 걸어 놓았으니 걱정 말라고요. 그 이후로는 정말 거석이 주위를 많이 다녀도 마을에는 안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오늘 아침처럼 많이 몰려온 건 처음입니다.”
총령부 태보가 황당한 얼굴로 반문했다.
“거석이 마을에 못 오게 하는 주문이라고? 그런 주문이 세상에 있을 리가 있느냐! 있다 해도 한 달도 더 전에 건 주문이 계속 효과를 발휘할 리가 있느냐?”
“그렇습니까? 저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라, 학사님들이 그리 말씀하셨으니 그런 줄….”
“대체 왜 그런 기이한 일을 관에 보고하지 않았느냐? 순찰대가 주에 한 번은 들렀을 텐데!”
“그건, 문림서원 학사님들이라 하셨고…. 좀 특이한 분들이긴 했지만.”
큰머리가 우물쭈물하다가 실토했다.
“학사님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용소마을에 문림서원 지부를 지을 것인데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니 절대 소문을 내면 안 된다고요. 서원 지부나 학사님들의 주문에 대해서 쓸데없는 소문이 떠돌면 바로 건립을 취소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듣고 있던 시현이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느냐, 마을 주민 모두가?”
시현은 음성에 감정을 담지 않았지만 큰머리는 질책당한다 느꼈는지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문림서원이 있는 문림촌은 땅님들이 많이 계셔서 거석 걱정도 없고 먹고살기도 그렇게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옆의 젊은 남자도 변명을 덧붙였다.
“변고 후 거석이 너무 날뛰고 농사도 반 이상 망쳐서 저희도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학사님들 왔다 가신 후로 희망이 생긴 겁니다.”
시현은 주민들에게서 시선을 떼어 마을 왼쪽의 높다란 석책을 바라보았다.
이 마을과 그 주위는 땅 위든 땅 아래든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운의 흐름이 적었다. 수원지가 있다는데 수맥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다. 석책 너머, 아마도 수원지 가까운 곳에 기운의 흐름을 가리기 위한 마력회로가 설치되어 있을 터였다.
태보가 의문을 표시했다.
“이상하군요. 소문을 저리 단속할 것이면 어째서 굳이 마을이 있는 곳에서 일을 벌였을까요? 관성 주위에 산세가 험하고 사람이 찾기 어려운 곳은 얼마든지 있는데.”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모이고 마을이 생기는 장소가 어디겠느냐? 운모는 마을을 고른 것이 아니다. 큰 수원지가 있는 자리를 찾은 것이다. 수맥 지도를 보지는 않았으나 아마 이 지역과 귀수관 관성은 지하로 수맥이 이어져 있겠지.”
“아 과연!”
조사단의 길사가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모인 마을 광장에는 큼지막한 우물이 있었다. 시현은 무리를 헤치고 우물에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겨울인데도 우물의 수위가 이상하리만큼 높았다.
“길, 마력석을 다오. 서넛 정도.”
“옙.”
길은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마력석을 꺼내 건넨 다음 시현과 등을 돌리고 인왕상처럼 버티고 섰다. 험상궂은 표정과 훅 올라간 기세는 시현이 집중하는 동안 허튼짓하는 놈은 가만 안 두겠다는 위협의 뜻이었다.
시현은 눈을 감고 마력석의 기운을 풀어내어 우물의 수맥에 흘려 넣었다. 땅속에는 기운의 흐름을 방해하는 파동이 주기적으로 퍼지고 있었으나 시현이 제어하는 기운은 방해파를 강제로 뚫고 빠르게 뻗어갔다.
기운에 실린 의지와 감각이 수원지 깊은 곳에 도달했을 때 시현은 충격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손에서 타버린 마력석들이 굴러떨어졌다.
지켜보고 있던 관리들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습니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땅 밑에 거대한 법력의 흐름이 숨겨져 있었다.”
시현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땅속 깊은 곳의 수맥을 통해 사방의 기운이 이 땅에 모이고, 그것이 다시 귀수관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양이 막대하고 흐름이 세차다.”
“찾았군요! 역시 여기가 운모가 수작을 해 놓은 곳이로군요.”
태보와 주위 관리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아졌다. 관리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곳이 우리 대관성에 법력을 공급하는 중계지 역할인 것입니까? 저 석책 너머에 그걸 위한 무슨 장치나 법력진 같은 것이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 아마 운모가 거석을 풀어 사람을 쫓은 다른 마을의 수원지도 상황이 비슷할 것이다.”
태보가 들뜬 마음을 못 감추며 말했다.
“그러면 사방에 군을 보내 그 장소만 잘 지키면 되겠군요! 그럼 운모가 마음이 변하더라도 귀수관의 법력은 지금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
시현은 잠시 침묵했다가 무겁게 말했다.
“모르겠구나. 과연 일이 그렇게 그대들 좋도록 흐르겠느냐? 나는 좋은 예감이 들지 않는다.”
시현은 우물과 석책 너머를 다시 한번 번갈아 보았다.
운모가 귀수관 주변의 수원을 점거한 것을 알았을 때 이런 방식이 아닐까 예상은 했다. 하지만 시현이 생각한 것보다 관성으로 흘러가는 기운의 양이 훨씬 더 막대했다.
귀수관 전체를 채우기 위해 커다란 기운이 필요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귀수관 땅인들이 쉴 새 없이 법술을 쓰는 것도 아니다. 우물 수위나 높이고 관성 안 논밭에 물이나 좀 댔을까, 대부분은 법력이 돌아오고 땅인의 지위가 확고해진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소모되는 양과 들어가는 양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운모가 귀수관과 협약을 맺은 것은 한 달 이상 전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기운이 흘러갔다면 귀수관 땅 밑에는 지금쯤 얼마나 많은 기운이 모여 있을까?
생각하면 심장이 차가워졌다. 좋은 쪽의 추측은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 * *
“아무래도 네가 이긴 것 같은데.”
운모의 목소리에 노인은 바둑판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백이 밀리고는 있지만 아직 불계패를 말할 정도는 아니야. 더 싸워 보지 그러나.”
“아니, 바둑 말고 다른 내기 말이야. 바둑도 네가 이길 것 같지만.”
운모는 따분한 듯이 말하며 바둑판 앞에서 몸을 뺐다. 노인의 새하얀 눈썹 아래서 눈이 형형한 빛을 냈다. 그가 나이에 맞지 않게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드디어! 드디어 사람들이 움직였는가! 어딘가, 용소마을인가?”
“맞아. 관성 쪽 길목에 세워둔 거석이 모두 부서졌어. 아직 법력진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시간 문제겠지.”
운모가 노인을 향해 빙긋 웃었다.
“축하해. 이걸로 귀수관은 또 한 달의 시간을 벌었어.”
노인에게서 기쁜 빛이 수그러들었다.
“한 달은 너무 적다….”
“어머, 이기고 나니까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너도 원래는 결과에 자신이 크지는 않았잖아. 심지어 시문이 아니었으면 졌을지도 모르는데.”
시현이 화제에 오르자 노인은 더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투덜대듯 말했다.
“…용소마을에 온 게 꼭 시문이 아닐 수도 있다. 귀수관의 조사단일 수도 있어.”
“에이, 내가 아무리 대지와 멀어졌어도 내가 만든 거석들 부서지는 것 정도는 알거든. 스물일곱 개 전부가 한 순간에 박살 났어. 볼 것도 없이 시문 솜씨야.”
운모는 말하는 동안 넓은 소매 아래서 바둑판의 돌 위치를 몇 개 슬쩍 바꿨다. 그는 노인의 표정을 살피고 놀리듯 말했다.
“왜 표정이 그래? 내기에 이기고 싶어 했잖아. 시문 덕택에 이기는 건 또 싫어?”
“아니다. 어쨌든 인간의 승리가 맞으니까….”
“하기야 좀 쪽팔리긴 하겠다. 시문이 관성에 들어간 지 이틀 됐나? 그새를 못 참고 조사하겠다고 성에서 뛰쳐나온 데다가 곧바로 맞는 장소를 찾아 들어갔지. 반면에 귀수관의 네 제자들은 마력이 돌아온 데 만족해서 한 달 넘게 마냥 헤벌레하고 있었으니까.”
“내 제자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문께서도 이리 빨리 법력진의 축을 찾아내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거야 네가 일부러 네 제자들 귀에 들어가게 단서를 흩뿌려놨기 때문이잖아. 그런데도 걔들은 시문이 와서 엉덩이 걷어찰 때까지 아무것도 알아볼 생각을 안 했지. 아무리 나를 믿어도 그렇지, 궁금한 마음이 그렇게 안 생기나? 반대편에 걸었는데도 내가 다 당혹스럽네. 호기심은 사람의 본능인 줄 알았는데.”
노인은 안 좋은 표정으로 침묵했다. 운모가 어깨를 으쓱했다.
“따지고 보면 시문도 지적 호기심 때문에 법력진을 찾은 건 아니지. 그냥 나를 못 믿어서 그런 거지. 인간의 호기심이란 주제 면에서 이번 내기는 완전히 실패야.”
“하고픈 이야기가 뭐냐. 결과에 승복을 못 하겠느냐?”
“아니. 어쨌든 네가 이기긴 했어. 과정은 불만스러워도 조건은 달성됐으니까.”
“좋다. 다음 내기는 무엇으로 하겠느냐?”
노인이 조급하게 말했다. 운모가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새 내기를 하게? 기껏 한 달이 생겼는데 좀 신중하게 정하지 그래. 이번엔 네가 확실하게 이길 만한 걸로.”
“그랬다가 네가 또 훌쩍 사라져버리면! 그러면 나는, 귀수관은 어쩌란 것이냐.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널 기다리며 속만 졸이고 있으라고?”
“아이고, 아이고. 알았어. 이거 미움 단단히 샀네.”
운모가 턱을 괴며 웃었다.
“좋아. 다음 주제를 정하자. 말했듯이 네가 생각하는 인간의 감정이나 기질에 관한 거면 뭐든 좋아.”
운모가 동의했지만 노인은 오히려 쉽게 제안을 꺼내지 못하고 숙고에 빠져들었다. 노인, 세간에 문림이라 불리는 윤정준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