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 * *
조금 후 정준이 망설이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아래쪽 마을에 시문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들이 와 있지 않으냐.”
“그래서?”
“그들을 두고 내기하는 것이 어떠냐? 이를테면 그자들의 인내심. 길을 막아서는 마을 백성들을 상대로 거친 수단을 쓸지 안 쓸지.”
“풋.”
진지하게 한 제안에 운모가 바로 웃음을 터뜨리자 정준은 노한 얼굴이 되었다. 운모는 손가락질까지 하며 계속 폭소했다.
“푸풋, 하하하하! 정준아, 너 몰라? 너 기운 읽으려고 노력할 때 이마에 주름 만드는 버릇 옛날하고 똑같아! 너 방금 마법사가 마법 쓰는 거 읽었지? 결과를 다 알고서 하는 내기는 내기가 아니지! 사기꾼 같으니라고.”
정준은 우거지상을 하고 툴툴거렸다.
“누구더러 사기꾼이라는 게냐? 너야말로 아까부터 계속 반상의 바둑돌을 몰래 자리바꿈하고 있으면서!”
“아 저런, 봤어?”
“손쓰는 것은 못 봤지만 국면을 보면 안다! 십 년을 같은 수작에 당했는데 눈치 못 챌 것 같으냐?”
운모가 장난스럽게 혀를 쏙 내밀었다.
“좋아, 쌤쌤으로 쳐. 하지만 속임수를 빼더라도 그 내기는 주제가 재미없어. 인내심이란 건 상황에 너무 많이 좌우돼.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인간의 기질이라면 기질이다.”
“누가 뭐래?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내기를 시작하게 됐는지 잊지 말라고. 너는 인간에게 아직 흥미로운 점이나 새로운 가능성이 많이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잖아. 내가 더 오래 인간과 교류하고 싶어지도록.”
“그래. 인간은 계속 발전해. 후대는 우리보다 나을 거다. 그 후대는 그보다 더 나을 것이고. 원천을 회복시킬 기술도 결국은 만들어질 거다. 벌써 모든 걸 포기하고 절멸시킬 필요가 없어.”
정준이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운모는 그리 감명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가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준아. 발전이나 새로운 걸 가지고 나를 설득하려면 방금 그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나아. 왜냐하면 너 말고도 앞선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그거랑 똑같은 말을 했거든. 내 입장에서 그 연설은 오히려 인간에게 발전이 없다는 증거라고.”
“하지만 이 몇백 년만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발전했느냐! 왕을 폐하고, 제도를 개선하고, 전쟁이 사라지고….”
“전에 한번 말했는데? 전쟁은 안 사라졌어. 대관성 사는 네 제자들이 관심을 안 가질 뿐이라고. 그리고 변화한 체제는 변화한 문제를 낳을 뿐이지. 그 문제들마저도 딱히 새롭지는 않고. 솔직히 말하면 난 좀 지겨워.”
하지만 운모는 곧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도 해선이는 조금 달랐지. 아주 다르지는 않았지만. 걔는 인간이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는 걸 안다면서, 후손들이 달라지고 더 나아지게 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곧바로 제 친구들을 설득해서 지씨옥의 봉인에 합의했고. 응. 그건 확실히 인상적이었어.”
“선조 류해선 인께서 하신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 후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많은 저술을 남기셨다.”
“음…. 아냐. 그건 그다지 독창적이지 못했어. 효과도 글쎄 그닥. 아무래도 인간 한 명이 자기 삶에서 보여줄 수 있는 똑똑함의 총량엔 한계가 있는 거 같아. 그러니까 너도 후손들의 발전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지금 네가 보여줄 수 있는 똑똑함을 좀 보여주라고. 재미있는 내기 주제라든가.”
사예가 공중에 ‘꽃을 피운’ 것은 그때였다. 창호 밖에서 세상을 다 불태워버리는 듯한 빛이 쏟아졌다. 정준은 기겁을 하고 밖으로 달려 나가다가 툇마루에서 떨어질 뻔했다. 똥그래진 눈으로 쫓아 나온 운모가 그를 아슬아슬하게 붙들었다.
“조심해!”
“고, 고맙….”
정준이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운모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도 열기도 이미 사라지고, 하늘에는 몇 줄기 없는 구름만이 사납게 움직이며 직전의 여파를 보여주고 있었다.
운모의 표정은 그답지 않게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가 정준에게 물었다.
“방금 그거 마법이었지? 뭐였어? 누가 뭘 한 거야? 어디를 공격한 거야?”
정준은 호흡을 가다듬느라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서원의 구역을 나눠둔 일각문 바깥에서 제자들과 호위들이 달려왔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놀라셨지요!”
의법술을 공부한 제자가 스승의 맥을 짚는다, 놀란 기를 가라앉힌다며 법석 떠는 사이 마을에서 몫꾼 하나가 급히 소식을 전달하러 달려왔다. 사예가 무엇을 했는지 들은 운모가 심각한 기색을 지우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뭐야, 그 엄청난 게 그냥 불꽃놀이였어? 어떻게 보면 시문이 보낸 사람답네! 옛날 사람들도 생각나고.”
몫꾼이 정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상대가 워낙 강경하고, 무슨 짓을 더 할지 몰라 막을 수가 없습니다. 곧 나으리를 뵈러 서원으로 올라올 것 같습니다.”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끌어 보라 했거늘, 그것을 못 하느냐!”
정준이 역정을 냈다. 그가 비칠거리면서도 운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 버리지 않을 거지? 아직 날짜가 더 있다. 방금 한 달도 생겼다. 머물면서 내기를 더 해줄 거지? 시문께서 직접 오신 것도 아닌데, 그 아랫사람을 상대로 네가 굳이 도망칠 필요도 없잖아….”
운모는 마뜩잖은 눈빛으로 정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준은 퍼뜩 무엇을 깨달은 것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
“부르기 전까지는 절대 문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모두 나가라!”
사람들이 물러가는 동안에도 정준은 운모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그가 기죽은 듯이 말했다.
“방금 것은… 아무도 무슨 얘긴지 모를 거다. 내가 내기 이야기를 남에게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 쳐.”
운모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당분간 시문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아. 너도 나와 같이 있는 모습을 그들에게 들키면 안 좋을 텐데.”
“네가 처치해버리면 되지 않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네가 내 덕에 얻은 힘이 얼만데!”
“와아, 무서워라. 우리 문림 선생 인품이 사실 이렇다니까.”
벌컥 성을 내는 정준을 보며 운모가 장난스레 눈을 빛냈다. 운모가 말했다.
“좋아. 더 머물러줄게. 내기할 주제도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대신 시문 쪽 애들을 막는 건 네가 해. 나는 안 싸울래.”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든 네 마음이야. 싸우고 싶다면 거석 정도는 원하는 만큼 빌려줄게. 아니면 설득을 하거나 창의력을 발휘하거나, 뭐든.”
정준의 눈빛이 불안과 희망으로 흔들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득이라면, 혹시….”
“물론 내기에 대해 발설하는 건 금지야.”
운모가 잘라 말했다. 그가 놀리듯 덧붙였다.
“알지? 내가 너와 함께 귀수관 아래에 모조 원천을 만든 것도, 내가 언제든 그걸 건드려서 관성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도, 네가 그걸 한나절, 반나절이라도 더 미뤄 보려고 나와 이렇게 안타까운 내기를 하면서 이겼다 졌다 하고 있다는 것도, 전부 비밀이야.”
정준의 얼굴에 좌절감과 피로가 깃들었다. 노인이 지쳐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이건 부당하다. 이 내기들은 애초에 부당했어.”
“정준아, 처음에 이 일을 내기로 만든 건 너야.”
운모가 말했다.
“나는 처음에 아주 순수한 의도로 네 안전을 보장했어. 네 이름을 딴 서원과 문림촌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지. 그런데 관성에 있는 제자들이 어쩌니 학문과 법술이 저쩌니 하면서 점점 더 많은 걸 요구한 건 너야. 나는 반대편 저울에 그만 한 걸 올렸을 뿐이야.”
“아니다! 내기를 건 것은 너겠지.”
정준이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고작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남은 몇 년을 보장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평생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키우며 이루고자 한 것은 죽어 눈 감으면 스러지는 부귀나 쾌락이 아니었어. 나는 의미 있는 이름으로 남고 싶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없이 무성해갈 학문의 숲, 그 속의 중요한 한 그루가 되고자 했어.”
“그래. 너는 늘 그런 사람이었지.”
“너는 그걸 알았다. 나를 알았어. 그러니 이건 처음부터 네가 나의 인간성을 놓고 혼자 시작한 내기였을 거다. 너는 내 욕심에 건 거야. 내가 인간의 미래를 포기하지 못할 거란 사실에.”
“알면서 왜 그런 선택을 했어? 모조 원천으로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도 다 말해줬잖아. 네가 내기에 지면 내가 귀수관을 어떻게 할지도.”
운모의 물음에 정준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제 발 사이를 본 채로 말했다.
“거석을 빌려다오. 싸우겠다.”
“잘해봐.”
운모는 품에서 감람이 쓰던 것과 비슷한 흰 패를 꺼내서 몇 번 조작했다. 곧 멀리 산 위에서 쿵쿵 진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준은 툇마루 위에 있는 작은 징을 쳐서 제자와 일꾼들을 불렀다. 서원을 비우고 마을로 내려가 있게 할 셈이었다. 어린 제자들은 아예 세우산을 떠나라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관성에 보낼 수도 없었다.
* * *
문림촌에서 서원까지 오르는 돌계단은 하늘인이면 모를까 보통 사람에겐 꽤 길었다. 호란은 조바심이 나는 것처럼 단의 앞뒤로 돌계단을 오르내렸다. 등에는 이미 크고 묵직한 등짐을 졌는데도 움직임이 나풀나풀했다.
“그렇게 한 단 한 단 올라갈 사이에 내가 데려다주면 금방인데. 아니면 내가 먼저 올라갈까?”
“됐습니다. 맡긴 짐이나 잘 부탁드려요.”
“아서. 계단은 건강에 좋지만 계단에서 서두르는 건 수명에 안 좋아.”
한 발 뒤에서 따라오는 사예가 말했다.
“계단 위쪽은 적이 숨었다가 기습하거나 저격하기 좋은 곳이야. 너야 괜찮겠지만 나나 단이는 이런 계단에서 잘못 구르면 뼈도 못 추린다.”
의법사가 아니라 전업 용병으로서의 조언이었다. 호란은 곧바로 얌전해져서 계단 위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말 싸움을 하게 될까요? 문림촌에서 땅님들이 그랬잖아요. 그 문림 선생이란 사람이 강한 마법사님들이랑 호위들은 다 마을로 내려가라 했다고요.”
“사람이랑 싸울까 봐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돌 인간이 문제지.”
단이 말했다.
“방금 우리랑 지나쳐서 마을로 내려간 서원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문림은 옷 얇게 입은 여자 한 사람이랑 서원에 혼자 있다고. 팔십 노인네가 수발제자 한 사람 안 남기고 다 쫓아낸 이유가 뭐겠어요? 틀림없이 싸움을 준비하는 거죠. 이 겨울에 홑옷 입고 돌아다닌다는 사람은 보나 마나 운모일 거고.”
“그 문림 선생이란 사람은 대체 왜 우리랑 싸우려는 거지? 운모의 친구라서 운모 편을 드는 걸까?”
호란이 조금 시무룩하게 말했다. 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 턱이 있나요. 뭐 죽을 때 다 된 노인이라니 온 세상이랑 같이 가기로 했는지….”
이제 바로 앞에 가파른 계단 끝이 보였다. 단이 사예 쪽을 보았다.
“그보다 사예 님은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돌 인간하고 한 번도 싸워본 적 없으시잖아요. 아무리 참석 화력이 좋아도….”
“안 괜찮으면 뭐, 찜닭 먹으러 도로 내려가? 일단 들이박은 다음에 상황 보는 거지.”
사예가 태평하게 말했다.
“그래도 위에 거석은 없는 거 같아.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걸. 한 명 상대면 영 상대 못 할 건 없겠지… 어, 취소.”
사예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계단 위쪽에서 쿵 쿵 거석 떼가 전진하는 울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도 한두 놈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거석 기운 안 느껴진다면서요!”
“아니, 진짜 안 느껴진다니까?”
옥신각신하는 단과 사예를 내버려 두고 호란은 단숨에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서원 앞 널찍한 공터에 다다르자마자 호란은 사예가 거석의 기운을 못 읽은 까닭을 바로 알았다. 서원의 담 양옆으로 열을 지어 내려오고 있는 것은 감람과 싸울 때 만났던 두꺼운 껍질에 싸인 갑병들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