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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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끝나가는 동안에도 대문 기둥만 부여잡고 있던 정준은 마지막 갑병이 박살 난 다음에야 허둥지둥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절박한 얼굴로 두 팔을 벌려 대문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안 돼, 기다려! 서원에 들어가면 안 된다! 제발!”
서원 내부 상황을 보기 위해 담을 뛰어넘으려던 호란이 멈칫하고 자리에 섰다.
사실 호란은 전투 중간부터 정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정준은 나이가 많은 건 물론이고 한눈에 보아도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유명한 땅님이라니 마법사일 텐데 갑병들이 싸우는 내내 주문을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준이 애걸했다.
“부탁이다. 여기서 멈춰라. 너희는 너희가 무얼 그르치는지 조금도 모르고 있어….”
결국 호란은 몇 걸음 물러나서 정준에게 질문했다.
“무슨 일인데요? 운모는 어디 있어요?”
“사정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믿어다오. 나는 나쁜 뜻으로 너희를 막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야. 귀수관을…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반드시 너희를 이 자리에서 막아야 한다.”
“엥?”
이상한 목소리를 낸 것은 사예였다. 마력석 대련을 멘 사예가 단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예가 머리를 갸웃하며 물었다.
“진짜 막으려고 한 거 맞아요? 영감님 비장하신 거에 비하면 방금 너무 성의 없이 깨지지 않았어?”
거침없는 사예의 말에 정준은 울컥 노한 얼굴이 되었지만 사예는 상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사예는 자신이 문림촌에 온 직후 화력을 과시했던 빈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밑에서 불질한 거 영감님이랑 그 돌 인간도 봤을 거 아니에요. 이쪽 화력이 있는데, 막기는커녕 시간 벌이라도 하고 싶었으면 거석을 방금의 세 배는 보냈어야지?”
정준의 얼굴에 당혹이 비쳤다. 그가 살짝 더듬거렸다.
“운모가, 운모는 그 거석들이 특별히 강한 것들이라 말했다. 상대가 법술사든 하늘족이든 소수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거라고….”
“그건 일반적인 경우고요. 아니 그렇게 상대 전력이 감이 안 오나? 문림 영감님이야 평생 책상물림이라 뭘 모른다고 해도 돌 인간까지 모를 리가 없는데.”
사예는 정준의 어깨 너머로 서원 안쪽을 건너다보았다. 대문 바로 안에는 담이 무너지고 부서진 갑병이 뒹굴고 있었지만 더 안쪽에는 사람 기척이 없었다. 번드르르한 서원 건물만 줄줄이 서 있을 뿐 다른 거석이나 운모가 나타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사예가 호란에게 손짓했다.
“호란아, 가서 안쪽에 보고 와라. 아무래도 이 영감님, 버림패 된 거 자기만 모르는 것 같은데.”
“아니, 아니다!”
정준이 황급히 다시 외쳤다.
“나는, 나는 운모와… 그래! 협상! 협상 중이다! 귀수관의 명운과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협상 중이야! 내가 너희를 막지 못하면 협상이 도중에 깨어져 버린다!”
“그러니까, 방해하는 놈 막으라고 영감님 같은 사람을 보낸 걸 보면 그 운모란 녀석이 협상을 지속할 마음이 없는 거 같다고요. 호란아, 갔다 와. 혹시 적이 있으면 신호탄 터뜨려. 없을 거 같지만.”
사예가 한 번 더 말하자 호란은 더 망설이지 않고 훌쩍 담을 넘었다. 정준이 뭐라 더 외쳤지만 무시했다. 운모의 위치와 적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크고 넓은 서원은 직전 벌어진 난장판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고즈넉했다. 중간 높이 담으로 나뉜 구역마다 크고 작은 강론당과 서고, 마법을 수련하기 위한 수련장과 각종 시설, 학생들과 일꾼이 머무는 처소 등 버젓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서원 심부, 세우산을 뒤에 두고 서원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장소에는 정준의 처소 겸 서재인 고심재가 있었다. 하산하던 제자들이 정준과 운모가 함께 있다고 했던 장소였다.
하지만 고심재 역시 텅 비어 기척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활짝 열린 창호 안쪽으로 다과상과 화로, 두다 만 바둑판이 보였다. 바둑판 곁에는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바둑알 통에 눌려 놓여 있었다. 붓글씨 몇 줄이 적힌 것이 짧은 편지 같았지만 호란은 몇 자밖에 알아볼 수 없었다.
호란은 편지를 집어 들고 한달음에 대문으로 돌아왔다. 사예와 옥신각신하고 있던 정준은 호란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운모는! 운모가 없었느냐? 설마 가 버렸느냐?”
“없었어요. 서원이 텅 비었어요. 거석이고 사람이고 인기척 하나 없어요.”
“너희 때문에… 너희 때문이다! 원래 운모는 더 머물며 협상을 하겠다고 말했는데!”
정준이 다시 분통을 터뜨렸지만 사예는 코웃음만 쳤다.
“그게 왜 우리 때문이에요? 자기 말 안 지키고 튄 놈 때문이지. 내 말 믿어요. 그 운모란 놈은 영감님이 서원 문간 나오기도 전에 이미 사라졌을 거라니까?”
“사예 님 말이 맞아요.”
호란이 말했다.
“운모가 제가 오는 걸 보고서 도망쳤으면 제 쪽에서도 운모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을 거예요. 서재 건물을 떠난 지 이미 꽤 된 거 같았어요. 바둑판 옆에 이 종이가 있었어요.”
호란은 편지를 내밀자 정준보다 먼저 사예가 척 받아 갔다. 사예는 종이를 펼치더니 감탄부터 했다.
“어우 글씨 멋있는 거 봐. 이거 십 년쯤 전에 유행하던 그 파초체인가 하는 거 아닌가? 이 자식, 풍류객 판에서 한때 먹물 좀 따르고 다니셨나 본데.”
말대로 종이 위에는 멋들어진 달필로 소리글자가 흩뿌려져 있었다. 사예는 소리 내서 내용을 읽었다.
“다섯 번째 내기 주제가 생각났어. 주제는 인간의 진실함이야. 너의 진실함이라고 해도 좋고. 내가 어느 쪽에 걸었을지 맞춰 봐.”
내용을 듣고 정준의 얼굴이 허예졌다. 단이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이거 촉이 안 좋은데. 어르신, 내기란 게 무슨 뜻입니까?”
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이 설득에 나섰다.
“어르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시문 나으리님의 명으로 돌 인간에 대해 조사하러 왔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어르신께서 운모와 중요한 협상 중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내기란 것도 협상과 관계가 있습니까? 무엇을 협상하고 계셨던 겁니까?”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당장 위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후일에는 문께서도 이해하실 것이다.”
“문림 어르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귀수관이 시문 나으리님과 싸우는 걸 포기했으니 운모가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제때 대비하기 위해서는 운모가 무엇을 꾸미는지 한시라도 빨리 알아야 합니다.”
정준은 다시 묵묵부답이 되었다. 위를 거스른다 말하면서도 태도가 마냥 당당한 것이 쉽게 뜻을 꺾을 것 같지 않았다.
“어르신, 이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지금 위험에 처한 건 귀수관입니다.”
“내가 모를 것 같으냐! 내가 이러는 건 모두 귀수관을 위해서야!”
정준이 소리쳤다. 그는 울분을 참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돌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내가 귀수관과 백성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 운모와의 약속을 어기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다. 운모가 나의 진실함을 시험하겠다고 했으니 나는 더더욱 그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사정을 말씀 안 하시려는 게 운모와의 약속 때문입니까? 어르신께서 사실을 털어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정준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호란이 단에게 작게 말했다.
“어떻게 하지. 문림 어르신을 관성에 모셔가야 할까? 시문 님이 직접 물어봐야 얘기하시려나?”
“아니요. 그건 좋은 생각 같지 않네요.”
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정준을 데려가면 문림촌 사람들도 난리를 하겠지만 더 귀찮은 것은 관성에 도착해서였다. 귀수관의 정계를 꽉 잡고 있는 문림서원의 제자들이 온통 정준의 역성을 들고 나설 것이다. 편을 얻은 정준도 더 태도가 뻣뻣해질 가능성이 컸다. 시현이 제자들 대부분을 폐격해버렸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강경책에도 한계가 있었다.
호란이 사예를 돌아보고 물었다.
“사예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예는 운모가 쓴 편지를 계속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며 사예가 말을 꺼냈다.
“내가 이 글씨를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운모의 글씨를요?”
“어. 파초체가 유행은 했지만 쓰기 쉬운 글씨체가 아니라서 이렇게 잘 쓴 거는 흔치 않거든. 게다가 내기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게…. 아무래도 나 이거 쓴 애 누군지 알 거 같아.”
사예가 편지를 접으며 정준에게 물었다.
“영감님, 혹시 이 운모란 애 이름 여러 개 쓰고 다니지 않았어요? 석영이나, 감람이나, 규사나… 이것저것 광물 이름을 바꿔가며 호로 쓰고, 내기 바둑 두면서 사기 치고 연서 대필해주는 걸로 유명한 사람 있었잖아요. 걔가 걔 맞죠? 엄마 아빠 연애할 때 걔 때문에 파초체로 연서 쓰는 게 유행까지 됐었다던데.”
“운모 그 자식, 귀수관에서 얼마나 놀… 얼마나 활개를 치고 다닌 겁니까?”
“운모가 사부 이름으로 사기 바둑을 뒀어요?”
단과 호란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사예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 나는 만난 적 없지만 우리 엄마 아빠 연배에선 풍류 판에서 꽤 유명했대. 잘 놀고 친구 많고, 바둑 두면서 빤하게 다 보이는 사기를 치는데 끝나면 항상 몇 배로 술을 쏴서 다들 내버려 뒀다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영감님,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대답 좀 합시다. 운모가 걔 맞아요?”
사예의 말투가 무례해선지, 아니면 품격 있는 선비의 친구라기엔 과한 운모의 행적 때문인지 정준이 얼굴을 붉혔다.
“운모가 과거에 무엇을 즐겼든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 지금 귀수관의 명운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렇지. 그놈의 명운도 문제네. 아까부터 자꾸 관성의 명운이니 백성의 목숨이니 엄청난 얘길 하시는데, 설마 영감님이 운모랑 한 내기에 그런 걸 걸었다는 건 아니죠?”
정준의 얼굴이 경직됐다. 사예가 입을 딱 벌렸다.
“맞나 봐. 귀수관의 명운을 두고 내기를 한 거예요? 바둑 둘 때 사기 치는 걸로 온 동네에 유명한 새끼하고? 우와, 대체 뭐를 믿고?”
“운모는… 운모가 속임수를 즐기는 건 그가 사람의 심리를 읽고 반응을 보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와의 일은 다르다.”
사예는 손에 든 편지를 팔락팔락 흔들며 까르륵거렸다.
“들었어? 나만은 다르대! 이 영감님 진짜로 사기 맞기 딱 좋은 사람이네! 심지어 이게 다섯 번째 내기라고? 세상에. 그동안 뭘 얼마나 털렸어요? 귀수관을 통째로 팔아먹었나?”
“무례하지 않느냐!”
정준이 초조한 얼굴로 사예에게 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사예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그가 정준에게 한발 다가섰다.
“여기서 화를 내냐. 이 영감님 정말로 관성을 팔아먹으셨나 보네.”
사예의 말투는 여전히 껄렁껄렁했지만 얼굴과 음성에는 한기가 흘렀다. 정준은 기가 질려 뒷걸음질을 했다.
사예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다 털어놓는 게 좋아요. 나도 사람 목숨 걸린 일 가지고는 농담 안 하니까. 운모가 영감님의 진실성을 놓고 내기를 한다고요? 그럼 더 빨리 불어야지. 내가 그 새끼면 틀림없이, 영감님이 사고 친 거 사람들한테 진실하게 말 못 한다는 데 걸었을 테니까.”
“나는… 나는.”
정준은 몇 발짝 더 물러섰으나 뒤에는 호란이 길을 막듯 서 있었다. 갈 곳도 댈 말도 없어진 정준이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전부 귀수관을 위해서 한 일이었어…. 정말이다….”
그야말로 대단하게 사고 친 사람이 꺼낼 법한 서두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