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 * *
“저어.”
길과 함께 시현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호란도 결국 못 참고 입을 열고 말았다.
“저는 호위니까, 원래 이런 자리에서 말하면 안 되는 것 아는데요. 시문 님이 지금 결정해버리실 것 같아서…. 저도 시문 님이 폭발을 막으러 귀수관에 들어가시는 건 반대예요. 만약에 뭐가 잘못되면 시문 님도 위험해지시는 거잖아요.”
시현이 호란을 돌아보자 고관들이 서로 불편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몇 사람은 커흠커흠 헛기침 소리를 냈다. 단이 말했을 때와는 반응이 또 달랐다. 시현의 허락이나 권유 없이 말했기 때문인지 말의 내용이 그들 뜻과 달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현은 미소를 띠었다. 그가 제 옆쪽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호란, 앉아서 이야기하거라. 의자를 가져오게 하겠다. 단과 길도 이쪽으로 오거라.”
이 말에는 눈총을 안 보내고 얌전히 있던 고관들까지 동요하는 얼굴을 보였다. 단과 호란이 시현의 옆에 앉으면 고관들과 한자리에 앉게 되는 건 물론이고 다른 고관들의 상석에 앉는 꼴이 되었다. 호란이 사양하지 않고 냉큼 의자를 가져오자 수런거림은 더 커졌다. 결국 몇 사람이 나서서 불만의 소리를 냈다.
“문이시여, 공적인 자리입니다. 거느리신 이들이 지나치게 법도를 벗어나게 하시면 추후 말을 들으실까 염려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래가 위와 한자리에 앉게 하는 것은 너무하신 일입니다. 귀수관의 체면도 생각해주십시오.”
“아무리 문이시라 한들 격의 위아래는 그르치실 수 없는 것이옵니다.”
“그 법도를 내가 모르겠느냐마는.”
시현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괜찮으면 괜찮은 것이 아닐까? 어차피 자네들은 모두 폐격을 당했는데.”
옆에 있던 사예가 빵 터져서 차를 뿜으며 탁자를 쾅쾅 쳤다. 귀수관 관인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사예가 웃음을 그치자 시현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법도 지키는 이야기를 하려면 이이에게 먼저 말을 해야지.”
“사, 사인은 조금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허면 내가 귀수관 류씨 사인의 남다름을 양해하고 있으니 귀수관 측에서도 다소의 예외는 양해하라.”
얼떨결에 사예를 귀수관의 예의범절 대표로 삼게 된 관인들은 모두 억울하고 원통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귀수관의 격 있는 땅인이라곤 사예 딱 한 사람인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 전 시현에게 사람들 원한 사고 다니지 말라고 충고했던 단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미 호란은 시현과 귀수관 땅인들 사이의 떨어뜨려 놓은 공간에 의자를 척척 가져다 놓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길은 앞에서 무슨 설왕설래가 일어나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굳건히 원래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근위가 적성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호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제가 시문 님께 귀수관에 가시면 안 된다고 하는 건요. 처음 성에 들어갔을 때랑 지금은 달라요. 그때는 우리가 성 밑에 뭐가 있는지 몰랐으니까 운모도 사태를 좀 더 두고 보자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어차피 들킨 것 시문 님이 계실 때 확 터뜨려 버리자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요. 오히려 더 위험이 커질 수도 있어요.”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다.”
“게다가 한 번 성에 들어가면 시문 님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제대로 주무시지도 편하게 쉬실 수도 없고요. 하유관 때처럼 귀수관 사람들이 겁먹고 몰래 해코지를 하려고 할지도 모르고요. 귀수관 땅님들은 원래도 운모랑 편 먹고 시문 님을 해치려고 했던 분들이잖아요.”
시현에게 무안을 당하고 잠시 조용해졌던 귀수관 땅인들이 다시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단은 입을 열어 호란을 말리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흘긋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문림촌에서부터 수레를 몰고 온 직후라 그는 평소 입던 낡고 주머니 달린 두루마기에 행장을 갖춘 차림이었다. 걸낭조차 내려놓지 않았다. 움직이면 열쇠와 공구가 절걱절걱 소리를 냈다.
기술자 차림을 하는 것은 원래 단의 보호책이었다. 이렇게 입고 있으면 사람들은 단이 반민 중에서도 돈 없고 낮은 신분인 걸 알아보고 무시했지만 어딘가 쓸모가 있을 거라 기대해서 아주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단은 적당하게만 무시받기를 원했다. 주목받고 인정받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 안 그런 경우에도 어차피 결정적인 순간, 단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엔 결국 묵살을 당한다. 그럴 바에는 미리부터 얕보여 두는 것이 속이 편할 거라 생각했다.
시현과 함께 여행하게 된 후에도 그는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눈에 띄는 자리에 나가기를 한사코 피했던 것은 꼭 대운관에서 수배를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남들 눈에 시현이나 호란에게 발언권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단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무시당하는 것이 익숙한 채로 있고 싶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했다. 무시당하는 일에 적당한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원래를 말하면, 단은 타고나기는 주목받고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는 제 옷섶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현의 권유 없이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시문 나리님, 호란 호위님, 제가 사람 원한 사면 안 된다고 바로 방금 전에 말씀을 드렸는데. 회의 끝나면 귀수관 분들하고 아예 안 볼 생각이세요?”
첫 마디가 잔소리였던 건 본의는 아니었다.
호란이 단을 보고 불평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시문 님 안전이 제일 중요한걸!”
공석에서 반말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아랫것들을 보고 귀수관의 고관들은 모두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단은 법도 부분은 깨끗하게 포기하자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이런 자리에 단이나 호란을 위한 법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단은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한 다음 귀수관 고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귀수관의 나으리들께 말씀드립니다. 결국 시문 나리님께서 가짜 원천을 통제하실 수 있을지 어떨지는 반반이니, 운모가 어떻게 나올지가 그만큼 중요해지지 않습니까? 귀수관의 나으리들께서는 시문께서 귀수관에 계시면 운모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거라 말씀하시고, 호란 호위는 그 반대라고 이야기하고요.”
“그, 그러하다….”
단과 눈이 마주친 총치총령이 말끝을 어째야 할지 모른 채로 말했다. 단이 시현이 아니라 자기들을 상대로 말을 꺼낸 것이 당황스러운 듯했다. 단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이 운모라는 자는 예측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제까지 접했던 다른 돌 인간과는 생각도 행동도 완전히 달라요. 처음에 제 목적과 요구를 밝히고 일을 시작하지만 두고 보면 항상 뒤에서 그와는 다른 일을 벌이고 있고, 주로 다른 돌 인간을 대동하고 움직이지만 동료와 뜻이 잘 맞는 것 같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휘두르고 일을 조종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제 생각과 달라지면 금방 물러나고요.”
단은 말하면서 고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폈다. 단에게 말할 줄 아는 입이 달려 있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이 반, 단이 말할 내용과 상대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이 나머지 반이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자 차차 정신을 찾고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단이 묘사하는 운모의 성격과 행동을 듣고 공감하는 얼굴이 되거나 반대로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바로 단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단은 그들을 잘 눈여겨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나은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운모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중에는 운모와 각자 오 년 십 년씩 알고 지낸 나으리들이 계시지요. 운모에 대해 여러 가지 알고 계신 것이 있으실 겁니다.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과연 그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은 고관들이 아니라 시현이었다.
“운모가 귀수관 사람들과 오래도록 어울린 것은 이들을 기만하고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친구로서 보인 모습은 모두 지어낸 것일 텐데 그것을 듣는다고 운모의 진짜 속셈을 알 수 있겠느냐.”
기껏 큰마음 먹고 말 꺼냈는데 이럴 땐 꼭 도움 안 되는 새끼다. 단은 시현에게 시현만이 알아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말했다.
“기만이라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로 속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지만, 누구를 어떻게 기만하느냐를 봐도 그 사람을 알 수 있거든요. 그리고 알고 지내는 동안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지어낼 수도 없고요. 분명 이분들은 오래 교류하면서 어떤 것이든 운모의 진면목을 보셨을 겁니다.”
호란도 말했다.
“어 그리고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돌 인간의 모든 게 다 가짜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최소한 운모가 사람하고 친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진짜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처음에 친해질 때는 속일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구요.”
고관 중 몇몇이 호란의 말을 듣고 울컥한 얼굴이 되었다. 일부는 여전히 상전의 은혜로 발언을 허락받은 아랫것들이 상전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데 경악하느라 호란과 단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듣는 것 같았지만 점점 더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 늘어나는 듯 보였다.
총령부 태보가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조금은… 최소한 예전의 한순간에라도 운모에게 진심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속은 것을 변명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운모는 귀수관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애착이 있어 보였습니다.”
시현이 얼굴을 찌푸리고 다시 반박의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운모가 실제 저지른 일은.”
단은 시현을 무시하고 격려하는 어조로 태보에게 말했다.
“나으리께서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 느낌이 맞을 겁니다. 어떤 데서 그런 걸 느끼셨습니까? 운모가 귀수관에서 좋아하는 장소나, 귀수관에 관해 자주 입에 올리는 화제가 있었나요?”
“와아 이해심 깊은 것 봐라. 과연 호구 마음은 호구가 안다.”
사예가 까르륵거리며 끼어들었다. 단은 평소처럼 사예도 무시했다. 그가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귀수관 관인들에게 말했다.
“저는 피도 눈물도 인정도 없는 우리 나리님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이 있어서, 사람을 상대로 사람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열리는지를 알거든요. 나으리들께서 운모에게 마음을 여셨다면 분명 운모도 나으리들께 열어서 보여준 게 있을 겁니다. 그건 진짜였을 겁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
고관들의 눈이 흔들리고 얼굴이 풀렸다. 한 사람이 입을 열자 우르르 같은 말이 나왔다.
“류해선 인을.”
“항상 류해선 인의 이야기를 했다.”
“지은서원 옛터를 좋아했다.”
“책에 실리지 않은 것까지 류해선 인에 대한 것이라면 별별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측 안이었다. 생각지 않은 발언은 그 뒤에 나왔다.
총치총령이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술을 마시고 류해선 인의 이야기를 할 때 운모는 항상 같은 결론을 맺었다. 운모는 항상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했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