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9
029화
* * *
영역의식이 강한 하늘인에게 있어 나쁜 놈은 멀리서 온 놈일수록 더 나빴다.
난장을 칠 거면 자기 동네서 치란 말이다.
시현이 말했다.
“그 낯선 복장을 한 괴이한 자들이 사방에 변고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단 좋은 일이 아님은 누구나 알 것이다.
나는 이들을 추적하여 그 획책하는 바를 막고자 하는데, 너희가 뜻을 같이해줄 수 없겠느냐.”
하늘인들은 시현의 말을 들은 것이 분명했으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사비는 부러 큰 소리로 외지 것들이 얼마나 악질에 골치인지 욕해댔다.
시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늘인 몫꾼 한 사람이 흥분해서 뛰어 들어왔다.
“통합니다! 화포가 통합니다! 새 화포를 배치한 서남 요새에 거석 하나가 나타났는데, 화포로 놈을 깼다고 합니다!”
“오오!”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하늘인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얼굴에 환한 빛이 돌았다.
곧 뒤따라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그가 들뜬 목소리로 고했다.
“중군 십오 열 둘째발 후운입니다! 한 싸움에 승리하여 보고하러 왔습니다!”
“그래! 자세하게 얘기해 봐라!”
사비는 흘끗 시현을 보았으나 그가 뭐라 하기 전에 중군 대장 동우가 흥분해서 보고를 허했다.
후운이 큰 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오늘 그 남운관 반민 놈이랑 화기도감 놈들이 요새에 큰 화포 두 대를 가지고 실험을 하러 왔습니다.
마침 포 설치가 끝났을 때 계곡 아래서 거석 하나가 올라오는 걸 발견했습니다. 한 놈뿐이고 크기도 한 장 정도기에 시험 삼아 화포를 쏘게 해봤습니다.”
“어떻게 되었나?”
“첫 발은 빗나갔는데 두 번째 발이 다리에 맞으니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놈을 계속 쏴서 빛 무늬에 세 발을 맞췄더니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이야아!”
하늘인들이 서로 마주 보고 손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줄곧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이 있었던 호란도 괜히 신나서 싱글벙글했다.
호란이 웃으면서 시현에게 말했다.
“정말 화포로 거석이 깨지네요! 진짜 대단해요!”
“그렇다. 포를 많이 놓으면 더 큰 도움이 되겠지. 참 큰일을 해냈구나.”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운 미소를 짓다가 사비와 눈이 마주쳤다.
탁자 반대편에 앉은 큰머리는 왜 네가 기뻐하느냐는 눈으로 시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현은 약간 변명 같이 말했다.
“그, 요 며칠 화약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물어보니 화포 만드는 중이라 이야기해 주더구나….”
“땅인들은 화포를 꺼린다고 들었는데.”
사비가 딱딱하게 말했다. 시현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다. 나는 원래 화포니 화약이니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고라도 터지면 무고한 피해가 너무 크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법술로 너희를 지켜줄 수 없으니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좋은 일이 아니냐.”
“좋은 일이지.”
사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현을 향한 뚱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시현은 약간 안절부절못하더니 사비에게 물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화포 시험하는 것을 보러 가도 되겠느냐? 오늘도 시험사격이 있겠지. 단이 말하기로는 주변에 아무 위험이 없다던데.”
“우리 사람이 곁에 붙어도 좋다면 가게 해주지.”
“좋다. 다들 가고 싶은 모양인데 같이 가면 되겠구나.”
시현이 미소지으며 답했다.
사비가 측근에게 손짓했다. 곧 시현과 호란을 위시하여 사람들이 우르르 방에서 빠져나갔다.
사비만은 자리에 앉은 채 시현이 나간 자리를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동우가 옆에 와서 앉았다.
중군 대장 동우는 이십 대 후반 남자로 치풍관에서 사비 못지않게 인망이 있는 이였다.
그가 헛웃음을 흘리며 사비에게 물었다.
“시문 저 인간 은근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들지 않아?”
“그러냐? 나는 오히려 보고 있으면 바짝 긴장되던데.”
사비의 대답에 동우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어디가? 이젠 힘도 없고, 우리한테 적의도 없잖아. 우리가 땅인들을 끌어내렸는데도.”
“그게 무서운 거야. 사람이 저렇게 적의가 없다는 게 가능하냐?”
사비가 턱의 흉터를 긁으며 동우에게 질문했다.
“넌 누굴 미워하지?”
“땅인들?”
“또?”
“거석.”
“그리고?”
“어… 이 지경이 돼서도 큰머리 자릴 나한테 안 넘기는 너?”
“이 새끼가.”
사비는 잠시 동우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곧 진지해져 말을 계속했다.
“그거 봐라.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게 가로막는 이를 미워한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미워하지.”
“너 이제 나보다 약해.”
“그래. 시문도 이제 우리보다 약하다. 그런데 우리가 저를 감금하고 제 갈 길을 막고 있는데도 화내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호의적으로 나오고 있어.”
“그건 그렇네.”
사비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따윈 저자의 눈에 장애물로 보이지도 않는 거야. 우리가 윗전을 죽인 것도, 저를 증오하고 경계하는 것도, 저자의 눈에는 위협이 아니라 다 이해하고 연민해 마땅한 약자의 발버둥에 불과한 거다.”
“이젠 지가 약자잖아. 단순히 현실 파악을 못 하는 거 아냐?”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뭐, 기개가 좋은 거라고 할 수도 있고.”
동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저치가 마음에 들어. 항상 눈빛이 곧잖아. 솔직하고. 치풍관에 저런 땅인이 있었으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지 않았을 거 같아.”
“등신. 그게 무서운 거라고.”
사비는 탁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뛰어오르고 달리기는커녕 몸의 중심조차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는 이 다리가 제 것이라고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사비는 이제 전장을 달리며 대열을 지휘할 수 없다.
그러나 사비만큼 땅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사비는 계속 큰머리를 맡아 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증오가 눈을 가린다고 누가 그랬나.
적이 확실할 때는 증오야말로 계속 눈을 치켜뜨고 있을 힘이 된다.
화포 제작과 배치가 끝나면 완씨 시문을 죽인다.
처음부터 그렇게 결심했고, 지금도 그 결심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사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게 시문을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였다.
* * *
그날 저녁 단은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다.
장지문이 열리자마자 시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거라. 화포 시험하는 것을 보았다! 정말 굉장하더구나. 게다가 실전에서 거석을 물리쳤다고? 정말로 효용이 있구나!”
“그러니까 너는 그것보다 딴 일을 더 신경 써야 하지 않냐고….”
단이 묘하게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시현에게 내밀었다.
“편씨 선의에게서 서신을 받아왔어. 진짜 니 글씨 알아보더라. 읽고 바로 태워. 어차피 별 실속 있는 내용도 없어.”
시현이 서신을 받아들며 눈을 깜박였다.
“너는… 정말 굉장하구나. 싫은 이지만 굉장하다.”
단이 피식 웃었다.
“내가 싫어?”
시현이 눈을 부릅떴다.
“당연한 말을 하느냐! 다짜고짜 사람을 치고, 항상 미운 소리만 하는 것을!”
“뭐야, 단이 누구 때렸어요? 단, 왔어? 안녕!”
반대쪽 곁방의 장지문을 드륵 열고 호란이 들어왔다. 두 남자는 움찔하고 굳었다.
호란이 가볍게 물었다.
“낮에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대요? 단은 항상 웃고 너무 순하기만 해서 걱정했는데. 싸움도 하고, 있을 성질 다 있네!
그래. 사람이 여차하면 맞서 싸울 줄도 알아야지. 내가 잘 때리는 방법 가르쳐줄까?”
잠깐 침묵이 흘렀다. 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안 그러는 게 좋을 거 같구나. 사람 때리는 일이 무어 좋다고 가르치기까지 하느냐….”
“왜요. 처음부터 안 싸우면 모를까 칠 거면 제대로 쳐야죠. 단은 힘이 없어서 요령이라도 있어야 돼요.”
“그… 감사합니다. 나중에 시간 있을 때 배우겠습니다.”
“하긴 지금은 바쁘지. 나중에 꼭 가르쳐 줄게! 안녕히 주무세요, 시문 님. 잘 자, 단.”
두 사람이 인사에 답하자 호란은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시현은 말없이 서신을 폈다.
서신에서 감읍하고 감사하고 영광스럽고 송구하고 황송하고 등등의 내용을 다 빼고 나면 한 가지가 남았다.
문께서 오셨으니 이제 우린 살았군요. 산 거 맞지요? 살려주세요.
시현은 서신을 접어 탁자 위에 놓고 눈을 감았다.
단이 냉큼 집어가 한 가닥씩 찢어 등잔에 태웠다.
“이들의 처지가 참으로 어렵구나.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
“차차 수가 나겠지. 뭐 전할 말이라도 있어?”
시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편씨 선의만이 아니라, 땅인들에게 지금 가장 큰 애로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것을 취합해야겠다.”
“취합해서 어쩌게?”
시현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하늘족들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구나. 가장 먼저 열두 살보다 어린 아이들을 노역에서 빼낼 방도를 찾았으면 좋겠는데.”
“이야기가 되겠냐!”
단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소리를 줄였다.
“제정신이냐? 네가 땅인들 일을 수소문한다는 것만 들켜도 당장 목이 달아날 판에, 무슨 배짱으로 협상을 걸어?”
시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협상을 하려면 이쪽에서 내걸 것이 있어야 하겠지. 나도 고민하고 있다.
다만 치풍관의 하늘족들은 도리를 지키려는 자들이니 대화하여 통할 데가 있을 것이다. 이 땅의 관인들이 그들에게 해를 끼쳤으나 그들은 관인 아닌 자와 나이 어린 자를 살리지 않았느냐.”
단이 웃음을 흘렸다.
“물러 터진 새끼들이지. 이 판국에 입이라도 줄일 생각을 못 하고.”
“뭐라 하느냐. 그것은 무른 것이 아니라 합당한 것이다.”
시현이 목소리를 엄하게 했다.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듣기로 하늘족의 풍습에는 연좌하는 법이 없다. 누가 죄를 지어도 그 벌이 가족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
매우 합당하다 여겨 남운관의 법제에도 도입하고자 하였는데 반대가 많아 쉽지 않았다. 올해 안에는 꼭 이루고자 하였는데, 일이 이리 되었으니….”
시현은 단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단은 먹을 씹어 삼킨 듯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표정이 그러하냐. 너는 혹시 연좌제가 옳다 여기느냐?”
“아니, 상관없어. 툭하면 니들 좋을 대로 갖다 붙이는 법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단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둘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눴으나 그닥 제대로 된 수는 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단은 제 방으로 가지 않고 다시 처소를 나가 버렸다.
시현은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나 등잔의 재를 치웠다.
다음 날 밤에는 단이 시현에게 아무 전갈도 주지 않았다.
시현도 따로 묻지 않았다.
9. 격렬
치풍산 서남 요새는 비스듬한 절벽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치풍관을 둘러싼 세 개 요새 중 새벽빛을 가장 늦게 받는 곳이었다.
아직 어스름이 드리운 요새 안에서 느닷없이 소란이 터져 나왔다.
소란은 길지 않았다. 고함 소리,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났다.
짧은 비명이 들리고, 시신 하나가 요새 벽 너머로 떨어졌다.
쿵 소리가 울린 후 성벽 위에 사람 그림자 둘이 나타났다.
작은 그림자 하나와 큰 그림자 하나였다.
작은 그림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떨어뜨리고 그래. 숨은 확실히 끊었어?”
“응….”
큰 그림자가 기운 없이 답했다.
작은 그림자는 모들, 큰 그림자는 그와 함께 나타났던 거구였다.
모들이 한 손에 들었던 무언가를 땅에 내던졌다.
카랑카랑 쇳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 것은 종이뭉치처럼 구겨진 화포의 포신이었다.
거구가 우울하게 말했다.
“대포라니. 얘들도 결국 이런 걸 만드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