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91
291화
* * *
“문이시여! 북벽과 서벽에서 다시 황적기가 올랐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황급한 목소리에 시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알겠다. 곧 지원하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 1층 창가로 다가가자 호위들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찬바람과 함께 전장의 기운이 훅 몰려들었다. 시현은 땅속 깊이까지 뻗었던 기감을 거두어 전장을 향해 펼쳤다.
곧 멀리 성 밖 하늘에서 빛과 우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귀수관은 교착 상태였다. 모들과 금강은 시현의 주문을 방어하기 넉넉하도록 성 멀찍이 자리를 잡은 채 귀수관 사방에서 거석을 보내 공세를 계속하고 있었다. 시현은 총령부에 자리잡고 귀수관 지하를 탐색하는 한편 전장이 밀릴 때마다 사방에 주문을 쏘아 지원하고 있었다. 돌 인간의 공격은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 전장에 부서진 거석이 산을 이뤘고, 시현의 탐색은 도무지 성과가 없었다.
귀수관 지하에는 두 겹의 방해장이 깔려 있었다. 지하에는 기운 읽기를 방해하는 법력진이 펼쳐져 있고 지표 가까운 곳에는 자연스러운 기운의 흐름을 위장한 가짜 파동이 흐르고 있었다. 시현은 두 겹의 방해를 강제로 뚫고 꽤 깊은 곳까지 기운의 자락을 뻗어 보았지만, 귀수관에 넘치도록 기운을 공급하는 수맥 외에는 잡히는 것이 없었다. 모조 원천을 둘러싼 방해장이 시현의 생각보다 더 교묘하거나 시현이 뻗은 기운이 원천의 위치까지 닿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방의 전장에 거석의 기운이 웬만큼 수그러든 것을 확인한 시현이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혹시 모조 원천이 생각보다 더 까마득한 지하에 있는 걸까? 아니면 모조 원천이 관성의 중심인 관부 지하에 있으리란 것이 내 편견일 수도 있다. 조사 범위를 꾸준히 넓혀보는 것밖에 방법이 없겠다.”
보좌로 있던 관인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귀수관은 어마어마하게 넓습니다. 마력회로를 정지시키지 않고서는 탐색에 진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다섯 마을에 남겨둔 회로 조사단이 뭐라도 결과를 가져올 때까지 전장에 집중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운모가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지 모르지 않느냐. 조사단이 결과를 내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이 사실이고.”
시현은 골똘한 얼굴로 인상을 썼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운모가 왜 아직도 모조 원천을 건드리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전장에 집중할 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문께서는 마을의 조사단이 때에 맞춰 회로를 해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그러면 왜 아끼시는 측근들을, 심지어 몸 같은 호위까지 모두 그곳에 남겨두고 오셨습니까? 혹시…….”
관인이 질문을 하려다 말고 도중에 말을 흐렸다.
시현은 관성에 돌아오면서 단에게 마을의 마력회로 일을 부탁하고, 호란이 마을에 남아 있으면 시현이 아직 출발하지 않은 것처럼 눈가림이 될 수 있을 거라며 호란도 놓고 왔다. 단이 거부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길과 사예도 마을에 남기려고 했다. 꼭 제 사람을 관성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두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관인의 얼굴이 잔뜩 흐려진 것을 보고 시현이 웃었다.
“왜 표정이 그러하냐. 혹시 내가 귀수관을 못 지킬까 봐 일부러 내 사람을 떼어놓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설마! 귀수관의 이 많은 백성의 목숨을 짊어졌는데, 그렇게 쉽게 실패를 각오하지는 않는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다. 아무리 성공 가능성이 낮더라도 회로를 해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책이라 단을 남겨둔 것이다.”
“예. 감히 의구를 품겠습니까.”
관인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서 근심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것을 느끼고 시현은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시현의 말은 단을 남겨둔 것에 대한 이유는 되어도 호란을 남겨둔 것에 대한 이유는 되지 않았다.
물론 시현은 정말로 귀수관의 단 한 사람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거석 떼에 둘러싸여 피난조차 갈 길이 없어진 관성의 수많은 백성들, 지금 전장에서 법군의 화망이 뚫릴 때에 대비해 전열을 갖추고 있는 하늘인 군인들까지. 모든 목숨이 그의 책임이었고 모든 목숨이 최우선이었다. 남운관에 있을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시현은 그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최악의 사태가 되었을 때, 그 둘이라면 서로가 무모한 짓을 하지 않도록 서로에게 보호가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얼핏 하기는 했다.
어쩌면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지기를 꺼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상념을 거두고 다시 탐색을 시작하려던 시현은 기감을 펼치자마자 깜짝 놀랐다. 전장 한가운데서도 절대 못 알아볼 리가 없는 호란의 기색이 총령전 바로 가까이에 와 있었다. 아직 닫지 않은 1층 창으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조사단 수장이었던 대길사와 단이 논쟁하면서 총령전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말이나 되느냐! 애초에 기운을 읽는 것을 방해하는 파장인데 그 파장이 나오는 위치를 어떻게 읽으라는 것이냐!”
“그렇긴 한데 시문 나으리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다.”
“그게 다가 아니다. 당장 거석과 싸우는 법군들에게 방해라도 되면 어찌할 셈이냐!”
“그것도 그런데 시문 나으리께서 어떻게 해주실 겁니다.”
단이 꼭… 호란이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약간 어안이 벙벙한 채 목소리를 듣고 있던 시현은 단과 호란, 대길사가 전각 안으로 걸어들어오자 그제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예조차 제대로 받지 않고 굳은 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다섯 곳 회로의 해체는 어쩌고 여기에 와 있느냐?”
“이자가 명을 따를 능력이 없다고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질타하는 대길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단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는 평소 남 앞에서 지키던 예법도 다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일단 들어주십쇼. 나리님, 다섯 군데 마을에 운모가 묻어 놓은 마력회로의 정확한 위치를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그야 기운 읽기를 방해하는 파동이 시작되는 곳을 더듬어 올라가서 찾았다.”
“그러면 귀수관 대관성 내부나 주변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가능이야 하겠다만 이곳의 방해장은 여러 방향에서 오는 파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더듬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회로의 위치는 이미 발견한 것이…….”
단의 질문에 답하던 시현이 깨달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귀수관의 기운을 감추고 있는 회로가 다섯 마을이 아니라 이곳에 또 있다는 것이냐?”
“분석한 걸 토대로 이것저것 시험하고 가설을 세워 봤는데 거의 틀림 없습니다. 마을 쪽에서 이쪽 회로를 조작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자세한 설명은 길어지지만 일단 생각해 봐 주세요. 만약에 귀수관의 방해장 마력회로가 실제로는 관성 지하에 있다 치고, 현재 발산되는 방해장을 일시적으로 키우면 나리님이 그 파장을 따라서 회로의 위치를 탐색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시현이 제 턱을 꾹 쥐었다. 맹렬한 속도로 그의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을 보여주듯 눈동자가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능하다. 탐색하고… 그 회로에 다른 기능이 없다면 그대로 부숴 버리면 되겠구나.”
“제가 말씀드리려는 게 그겁니다. 이미 다섯 마을에 회로 조작법을 아는 조사단이 도착해 있습니다. 이쪽에서 신호탄을 쏘면 바로 실행에 들어갈 거예요.”
대길사가 초조하게 반론에 나섰다.
“하지만 문이시여, 그 회로를 조작해보는 건 처음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 사방의 성벽에서 교전하고 있는 법군들의 주문을 방해하거나, 혹여 아예 법력 공급이 끊겨 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시현이 대길사를 보았다.
“귀수관 법군들은 갑자기 법력 공급이 끊어질 때를 대비해서 각루에 마력석을 가져다 놓았겠지.”
“그렇습니다만….”
“당장 사방의 법군에게 전령을 보내라. 곧 성 안팎의 기운 흐름에 이변이 있을 테니….”
시현은 잠시 생각하고 하던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잠깐 동안 성안의 법력은 전부 내가 쓸 터이니 그동안은 마력석을 써서 잘 버티라고 전해라.”
“예…?”
대길사는 일순 무슨 반문을 할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지만 곧 그의 뇌리에 시현이 귀수관에 온 첫날의 기억이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대길사와 주변의 다른 관인들도 후다닥 움직였다.
한 각도 안 지나 사방에서 신호탄이 올랐다. 시현은 이미 총령전의 너른 월대 위에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하늘을 가르는 신호탄의 파열음과 함께 시현이 조용히 말했다.
“퇴색하라.”
낮은 음성이었지만 그 소리는 기운이 닿는 곳 어디까지나 퍼질 터였다. 동시에 세상이 숨을 죽였다. 관성을 가득 채우고 자유롭게 분방하게 흐르던 기운이 순식간에 색과 소리와 활기를 잃었다.
아무리 거친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시현은 언제나 이 순간 평화를 느꼈다. 시현의 의지 아래서 내달리기 직전의 막대한 힘은 평화와도 고요와도 가장 거리가 먼 존재였으나 변고 이전에는 이것이 시현이 알았던 유일한 고요였다.
시현은 항상 감람의 마력회로가 하는 일이 시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식의 지평 안에 있는 기운을 전부 틀어쥐고, 그 전부가 하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석판 위에 금속 선으로 그려진 의지냐 사람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의지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꼬리를 끌며 올라간 신호탄의 빛이 꺼지고, 관성 곳곳 땅 깊은 곳에서 다른 의지가 통제력을 넓히려 하는 것이 느껴졌을 때 시현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면 용서할 필요가 없었다.
마력회로로부터 간섭당한 기운의 자락이 분노를 터뜨리듯 강렬하게 역화를 일으켰다. 시현은 자신의 통제를 방해하는 의지를 강제로 억누르며 그 근원으로 감각을 실어 보냈다. 지하 깊은 곳, 지맥과 단단히 얽힌 곳에서 하나하나 목표가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섯, 여섯, 관성 안쪽만이 아니었다. 성을 둘러싼 전장의 지하까지 합치면 열둘에 달하는 마력회로가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심어져 있었다.
단의 예측이 맞았다. 지반 상태를 보면 이곳의 마력회로들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서 백 년도 훨씬 더 전에 심어진 것이었다. 운모가 문림이나 귀수관의 다른 이들과 교분을 나누기 전에. 어쩌면 류해선 인이 태어나기도 훨씬 더 전에.
시현은 회로가 발하는 파장이 방해장 한 가지뿐인 것을 확인하고 차례차례 지력을 움직여 회로를 으스러뜨렸다. 단의 계획과는 달리 그는 탐색과 회로 파괴를 두 번에 나누어 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귀수관의 지반이나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모조 원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현이 움켜쥔 거대한 힘의 극히 일부만을 극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열두 개의 마력회로가 거의 동시에 부서졌다. 시현은 한계까지 몰입해 있었지만 실제로 지나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 하늘에는 아직 신호탄의 연기 몇 자락이 남아 있었다.
시현은 집중을 아예 놓아버리지 않기 위해 이를 꽉 물고 숨을 헐떡였다. 어느새 호란이 곁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서, 성공입니다, 문이시여….”
월대 아래에서 잔뜩 긴장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대길사와 관인들이 월대로 올라왔다. 모두가 질린 낯빛이었다. 대길사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원천이… 정말로 있습니다. 하지만 문이시여, 저희가 느끼는 것이… 맞습니까?”
마력회로가 부서진 순간 시현도 느꼈다. 호란마저도 느꼈다. 귀수관 전체의 땅인들이 모두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귀수관의 지하 깊은 곳에 거대한 위압감을 발휘하고 있는 힘의 덩어리. 그 존재는 모두가 각오했다. 우려보다 더 클 것도, 우려보다 더 불안정할 것도 각오했다.
두 개일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