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94
294화
* * *
운모의 눈에 악이 비쳤다. 그의 전신과 기결이, 그리고 귀수관의 땅 전체가 살기를 머금었다. 그가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소리쳤다.
“웃기지 마! 내가 못 할 것 같아?”
“침정하라!”
운모의 기결 두 개 중 위쪽에 있는 은색이 일순 붉게 빛난 것과, 시현이 두 손을 앞으로 뻗은 것은 동시였다. 중심에서부터 시뻘겋게 물들어가던 기결의 빛이 순식간에 은색으로 되돌아왔다. 운모는 목을 졸린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물론 그 각오가 진짜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도 한다면 북쪽을 먼저 터뜨리려 할 거라고 생각했다.”
시현이 말했다. 그의 시선과 뻗은 손은 운모 쪽을 향해 있었지만 정확히 운모에게 닿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운모의 등 뒤, 총령전 전각도 너머, 멀리 귀수관 북쪽 성벽 바깥의 어딘가가 시현의 의지가 향하는 곳이었다.
운모의 손이 아래쪽의 다른 기결로 내려갈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그 동작에는 분명한 망설임이 있었다. 그사이 시현은 서두르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정이여, 힘이여, 오래 맺힌 영혼에 갇힌 별의 본태여.”
“그건 나야. 내 일부야. 아무리 너라도 힘으로 조종할 수는 없어.”
운모가 억눌린 소리로 말했다. 시현의 시선이 먼 북쪽에서 운모에게로 돌아왔다.
“그래. 이것은 정말로 너구나.”
시현은 사력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지 음성에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도 어딘가 감동한 듯한 기색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네 말이 맞다. 파괴를 바라는 네 의지를 내가 뜻대로 조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너이고, 모든 걸 그만두길 바라는 너이고, 다 잊고 근원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너이기도 하다. 내가 그 등을 떠미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달라! 근원으로 도망친 놈들하고 날 똑같이 말하지 마!”
“그런 말이 싫다면 너는 그냥 고통에 지친 것이라 해도 좋다. 무엇이든 좀 내려놓거라. 자아가 비대하면 그만큼 고통이 많다. 이건 경험자가 동병상련의 정으로 하는 충고다.”
“무슨…….”
운모가 어이없는 듯 입을 벌렸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옛 존재에게 경험자의 충고를 운운한 열일곱 살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흐르는 것이 기운의 성질. 기운이 많은 것이 기운을 쥐고 내보내지 않으면 충돌이 생기니 이를 압이라 한다. 압이 과하면 깨어지니 이를 없게 하고자 흐름이 있다. 류해선 인의 정심서에 나오는 구절 일부다.”
시현은 전방을 압박하는 것처럼 쭉 뻗고 있던 두 손을 뒤집어 손잡기를 권하는 것 같은 동작으로 운모에게 내밀었다.
“그대에게 청한다. 흐르는 대로 흐르게 하라.”
시현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운모가 아니었다. 멀리 북쪽으로부터 은은한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북쪽 땅이 힘을 토해냈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강력한 압력과 함께 은빛이 솟았다. 하늘 위로, 땅 밑으로, 동서남북으로, 무수한 빛과 압력의 덩어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땅인들은 물론 하늘인과 반민들마저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싸쥐며 몸을 수그렸다.
시현이 운모를 향해 소리쳤다.
“천천히! 천천히 내보내라! 힘을 열로 바꾸면 안 된다, 사람이 상한다!”
“닥쳐!”
운모가 맞받았다. 목소리에 심한 고통이 어려 있었다.
운모의 위쪽 기결이 어깨 쪽으로 거칠게 갈라지면서 몸 밖으로 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사람의 피부처럼 부드럽게만 보였던 몸 표면에 쭉쭉 금이 갔다. 왼쪽 어깨 일부가 허물어지면서 팔이 떨어질 듯 처져 덜렁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운모의 다른 한 손은 끝끝내 아래쪽 기결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운모의 위쪽 기결에서 빛이 빠져나갈수록 북쪽에서 터져 나오는 빛과 기운도 기세를 줄여갔다. 그렇게나 막대한 힘이었는데, 온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데는 생각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운모의 위쪽 기결에서 빛의 거의 다 스러지자, 기운의 폭주를 온건한 형태로 유도하려고 집중하고 있던 시현이 펼쳤던 팔을 내렸다. 그가 운모에게 말했다.
“다른 한쪽은 그대가 스스로 놓아 보내라. 내가 억지로 여는 것보다 그쪽이 그대에게도 귀수관에도 더 낫다.”
“차라리 날 부숴…….”
운모가 비틀대며 주저앉았다. 시현의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대길사가 쪼르르 달려가서 쓰러지는 그의 상체를 받쳤다.
시현은 운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호란도 말없이 곁에 섰다. 다른 한쪽의 기결은 여전히 진한 은색을 발하고 있었지만 이미 운모에게선 살기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눈초리만 여전히 분에 찬 채였다.
대길사의 품에 기댄 운모가 시현을 노려보았다.
“안 돼. 이런 식으로 다 놓아버릴 순 없어. 그래선 무책임하게 기억을 버리고 근원으로 돌아가 버린 놈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잖아…….”
“심산에서 감람은 돌 인간에겐 자아의 소멸이 죽음이 아니라고 했다. 자아가 사라진 후에도 너희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고. 기결이 외력에 깨어진 것과 스스로 자아를 놓은 것이 무엇이 다르지?”
“달라. 다르다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라지느냐는 중요해. 너희도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잖아. 네가 모든 걸 다 망쳤어. 내 의미 있는 마지막을.”
평소의 자연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죽음을 앞둔 지금 운모는 제가 사람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기결이 깨어져 가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숨을 헐떡이지도 혈색이 변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사람이 찾는 가치를 찾고 있었다.
시현은 운모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운모의 눈을 들여다보며 달랬다.
“류해선 인의 귀수관이 무사하지 않았느냐. 거기서 의미를 찾으면 안 되겠느냐?”
“류해선이 뭐라고! 류해선 죽은 지가 언젠데! 내가 해선이 만큼 좋아한 사람은 그전에도 많았어! 걔들도 전부 죽었어! 어차피 아무…….”
분노를 터뜨리던 운모가 말을 뚝 멈췄다.
그의 표정이 혼자서 변했다. 화가 스러지고 무언가 납득한 것 같은, 어쩌면 포기한 것도 같은 기색이 눈빛에 찾아들었다.
시현이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사람은 모두 죽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의미 없다 말해 버리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삶을 살아보려 하는 너희 돌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의미가 없어도 있다고 믿어야 한다. 죽음이 아니라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어.”
“애늙은이.”
운모가 불쑥 말했다.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 같았지만 시현은 쓴웃음만 지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릴 때 이름표처럼 따라다니던 말이라 이제 와선 아무 타격이 없었다.
“나도 좀 더 어리게 살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사람이 너무 많이 죽는다. 내가 책임진 목숨들도…….”
시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얼굴에서 표정을 거두고 운모에게 말했다.
“내가 보아온 무수한 죽음의 상당 부분은 너희 돌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변고 후는 물론이고 변고 이전의 세상에서도. 그러니 나는 그대에게 연민을 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부탁한다. 그대를 괴롭히고 귀수관을 위험하게 하고 있는 그것을 놓아라. 지나친 힘도, 빗나간 목표에 대한 아집도, 필요하다면 자아라도.”
“그러면 내게 무슨 의미가 남는데….”
“모른다. 내게 묻지 말거라. 혹여 그대의 친구들은 알지도 모르겠다마는.”
시현의 말에 운모의 시선이 저를 받치고 있는 대길사에게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그가 깜짝 놀라서 눈시울을 훔쳤다.
“이것은… 아니, 나는…….”
“아냐 택응아. 말하지 마. 나는 인간 모두에게 적이잖아. 사람 눈 있는 앞에서 뭔가 말하면 나중에 네 입장이 곤란해질 거야.”
“운모….”
나이 든 대길사는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운모가 쓰게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고… 아 그래도 정준이, 문림한테는 역시 미안하네. 내가 마지막에 너무 못되게 굴었거든. 정 떼려고 그런 거지 진심이 아니었다고 전해 줘. 정준이 덕에 오랜만에 누구랑 길게 교류해서 난 되게 좋았어.”
운모는 다시 시현을 보았다.
“내가 사라져도 모들과 금강이 있는 한 대멸절은 계속 진행될 거야. 그리고 너희 인간들은 쉽게 착각하겠지만 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우리가 약해지는 게 아니야.”
“짐작한다. 그 정도는 별의 종말을 막는 김에 우리 인간이 감당하겠다. 끝까지.”
시현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운모가 피식 웃었다.
“부탁한다면서 태도하고는…. 그거 알아? 금강 말마따나 너 진짜로 사람이 별로야. 내내 뭐처럼 취급하다가 회유하려고 할 때만 슬쩍 2인칭 바꾸는 거까지 포함해서. 애늙은이 같고 능구렁이 같고… 재수 없어.”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시현이 마지막 말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격이 먹힌 것을 확인한 운모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눈을 감고 꼭 사람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위화감 없이 어울리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호흡이 운모의 코에서 긴 숨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돌과 기운으로 이루어진 몸을 드나들 뿐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 공기는 마지막까지 그를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의미를 다하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운모의 아래쪽 기결에서 천천히 은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귀수관 관부 남서쪽, 대지 아래에서 거대한 힘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북쪽의 기운이 흩어질 때처럼 거칠지 않았다. 무수한 빛덩이도 막대한 압력의 바람도 없었다. 하지만 형을 갖추지 않은 기운은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관성의 경계를 넘어 온 귀수관 속령을 뒤덮어 버릴 듯한 기운의 사태였다. 땅인이라면 기감에 막 눈 뜬 어린아이라도 그 끝없는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모의 기결은 계속 빛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운모의 신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회색 자갈돌로 부스러지지도 않았다.
시현이 대길사에게 말했다.
“운모에게 매였던 안전하게 기운이 다 흩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혼란스럽고 감정도 힘들겠지만 그대가 상황을 지켜보고 만의 하나에 대응해 다오.”
“문께서는…….”
“나도 뒷일을 더 살피고 싶으나 우리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부탁하겠다.”
시현은 곧바로 뜨락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모들과 금강은! 전장 쪽은 어떻게 되었느냐! 보고하라!”
안절부절못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시간 차를 두고 쌓여 있던 급보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한꺼번에 쏟아졌다.
“서쪽 성벽에 적이 도달했습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거대한 기운에 법군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전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문이시여, 지원을! 기운이 사방에서 날뛰어 주문의 통제가 어렵습니다!”
“남쪽 성문을 열고 탈영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아우성은 관부 밖에서부터 소리를 치며 달려온 하늘인 전령 두 사람의 외침에 한순간에 묻혔다.
“북쪽 각루가 무너졌습니다!”
“장군석이, 돌 인간이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