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04
304화
* * *
호란은 날아오는 주먹을 막을지 피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 한 방은 절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멀찍이 피했는데도 찢겨 나간 공기가 왕 소리를 내며 호란의 뺨을 할퀴었다.
두 번째 공격은 위에서 왔다. 호란의 머리채를 스치며 내려찍힌 주먹이 땅에 분화구 같은 구멍을 뚫었다.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이 흙과 돌이 날았다.
호란은 가능한 만큼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곧바로 따라잡혔다. 길의 제일 무서운 점은 힘보다 속도였다.
다음에 날아온 한 방을 호란은 두 팔에 온 기운을 다 담아서 막아야 했다. 분명히 제때 막았는데 전신에 충격이 왔다. 거석의 주먹을 막았을 때보다 더했다.
길은 정말로 죽일 셈처럼 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다르게 치는 방법을 모를 것 같았다.
이젠 호란도 수세만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사실 공세를 취한다고 뭐가 될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호란은 사람이 아니라 거석을 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력을 다해 주먹을 넣었다.
길은 팔을 들어 막아냈지만 그 동작으로 사각이 생겼다. 산 같은 몸이 크게 밀려난 순간 호란은 물러섰다 닫으며 힘껏 발을 날렸다. 길이 한 팔로 호란의 차기를 받아치며 다른 팔을 휘둘렀다.
공격과 공격이 맞부딪혔다. 다리가 땅을 찰 때마다 사방이 흔들리고 땅이 패여 나갔다.
충돌의 압력파와 흙먼지는 단과 사예가 앉은 데까지 끼쳐왔다. 단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 시발. 아 시발…. 사예 님, 누구 죽으면 살려주세요…. 아니다 죽으면 못 살리는구나. 아 시발 못 보겠다….”
수레에 걸터앉은 사예가 육수 내고 남은 고깃덩이를 물며 말했다.
“겉으로 죽은 것처럼 보여도, 잘하면 살릴 수 있을 때가 있어.”
“네….”
“없을 때도 있고.”
“네…….”
단이 얼굴을 묻고 있는 사이에도 사유를 확인하고 싶지 않은 굉음이 두 번 났다. 뒤이어 시현의 다급한 외침이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멈춰라! 대체 무슨 일이냐!”
단이 고개를 드니 시현이 사색이 되어 언덕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둘이 워낙 세상을 다 갈아버릴 것처럼 싸워서 수약재에서도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현은 치고받는 둘 쪽으로 뛰어갔지만 무슨 지진처럼 땅이 흔들리고 흙과 돌이 튀는 바람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시현이 두 주먹을 쥐고 소리를 높였다.
“그만해라! 멈춰라! 호란! 길!”
호란은 시현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손발을 거두지 않았다. 길은 시현의 말을 안 듣는데 자기만 싸우는 걸 멈추면 곧바로 머리든 어디든 박살 난다.
시문 님, 죄송해요. 제가 꼭 살아남아서 더 잘해드릴게요.
호란은 크게 빠졌다가 길의 우측에 죽어라고 연타를 먹였다. 길은 팔뚝을 세워둔 것뿐이었는데 금강석을 치는 것 같았다.
길이 몸을 돌리며 반대편 팔을 크게 휘둘렀다. 피한 순간 짧게 눈이 마주쳤다.
언뜻 길의 옆구리에 빈 곳이 보였다. 파고들기에 짧다는 걸 알면서도 호란은 몸을 날렸다. 동시에 좌측에서부터 맹렬한 기세가 호란의 몸통을 향했다.
간발의 순간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그래도 호란은 제 공격이 먼저 닿을 거라 믿고 힘껏 주먹을 뻗었다.
호란을 덮친 힘은 측면이 아니라 아래서부터 왔다.
지축을 깨는 굉음과 함께 지면이 치솟아 호란과 길을 들이받고 사이를 갈랐다. 뒤이어 맹렬한 기운을 담은 흙더미가 정통으로 덮쳤다.
두 사람은 흙더미에 삼켜진 채 바닥에 처박혔다.
“그만하라고 하였다!”
시현의 성난 목소리에 호란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시현이 새빨개진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한 손에는 타버린 마력석 노리개가 들려 있었다.
“시문 님….”
호란은 일어나서 사과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어디 다치거나 부러진 것 같진 않은데 전신을 골고루 두들겨 맞은 듯 몸이 까부라졌다. 가뜩이나 길에게 소진된 상태에서 주문에 떠받힌 충격이 생각보다 컸다.
겨우 팔꿈치만 세워 상체를 받치고 옆을 보니 길도 호란과 똑같은 상태로 상체도 다 못 쳐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과연 시문 님, 마음먹으면 피 안 보고 무력화하는 것도 확실했다.
가감은 하셨겠지만….
하셨나?
시현이 다시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무엇 하는 짓이냐, 이게! 둘 다 제정신이냐!”
“그게 쟤가 먼저요.”
길과 호란은 소리를 맞추어 똑같이 말했다가 동시에 서로를 노려보았다. 시현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번에는 단과 사예 쪽을 보며 역정을 냈다.
“너희는 안 말리고 무엇 했느냐!”
단이 여전히 얼굴을 덮은 채 말했다.
“내가 저걸 무슨 재주로 말려…. 차라리 김이 하늘로 오르는 걸 말리지.”
“애들이 싸울 때도 있지.”
사예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시현은 다시 호란과 길을 향했다. 그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싸운 이유는 듣지 않겠다. 이유가 무어든 용납할 수 없는 수위였다. 둘 사이 일에 내가 더 말하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처신하거라.”
그리고 시현은 수약재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시현이 등을 돌리자마자 호란은 도로 흙바닥에 쭉 퍼져버렸다.
아직도 숨이 가빴다. 시현이 호란에게 이렇게 화낸 건 처음인데 큰일 났다는 생각조차 안 들었다. 몸에 진이 하나도 없으니 머리도 같이 비는 것 같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호란은 천천히 깨달았다.
마음 한곳에서, 호란은 서형과 적색대의 죽음에 책임을 느꼈다.
대열을 빠져 모새와 싸우러 간 건 그때 호란의 선택이었다. 잘한 선택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호란이 아는 건 열다섯 명의 죽음이 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몫을 다했다. 호란이 맡긴 몫이었다.
호란은 몫을 다한다는 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믿고 싶었다. 시문 님도, 단도, 다른 사람들도 다 그 가치와 긍지를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길이 그걸 알아주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호란의 욕심이었다. 편해지고 싶은 이기심이었다.
아마 호란은 조금 서형을 동경했을 것이다.
큰 산처럼 강하고, 바람처럼 거침없고, 대열에게 철통같이 신뢰받는 머리.
그 뒤에 드리워진 다른 사람의 아픔과 그림자를 아는데도. 그런데도 조금은 그랬다.
호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은 서형의 가장 뚜렷한 모습을 그렸다.
길이 부시시 일어나 흙을 뒤집어쓴 더벅머리를 툭툭 털었다. 호란도 일어나 앉았다.
그는 길을 보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네 어머니는 큰몫꾼이었어.”
길이 코웃음을 쳤다.
“몫꾼이고 뭐고 그딴 염병 나는 하나도 모른다니까 계속 그러네.”
“그래도. 정말 대단했어. 내가 본 누구보다도 강했어. 기세는 활화산 같고, 힘이 끝이 없고, 주먹으로 거석의 기결을 깨고….”
갑자기 길이 정색을 하며 돌아보았다.
“뭐라고?”
“강하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를 했다고?”
호란은 길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좀 얼떨떨해졌다. 그가 다시 말해보았다.
“어, 주먹으로, 기결을? 깼다고?”
길의 동공에서 지진이 났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들었을 때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보다 훨씬 격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나도, 나도 그거, 할 수 있어….”
길이 더듬대는 것을 듣고 사예가 툭 말했다.
“못 하잖니, 길아.”
“할 수 있다고요! 내가 그 사람보다 센데 왜 못 해, 젠장. 오늘 당장 한다!”
길이 벌떡 일어났다. 당장 어디로든 달려갈 태세였다.
그의 눈동자가 운 나쁜 거석을 찾아 빈 황야를 헤맸다. 등줄기에 뻗치는 투지가 눈에 보일 것 같았다.
호란은 기운을 읽으면 기결을 더 쉽게 깰 수 있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길은 보나 마나 기세를 볼 줄 모를 것이다.
기세가 뭔지 설명해 주면 못 알아들을 것이다.
자기는 살면서 못 덤비겠다 싶은 사람 따윈 한 명도 본 적 없다 말할 것이다.
호란은 자기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길에게 서형이 지녔던 몫꾼의 긍지를 전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길은 서형에게서 전해 받은 것이 이미 많았다.
서형이 원하지 않아도, 길이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다.
사람의 삶은 언제나 흔적을 남겼다. 좋은 것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그것은 무섭고도 안심되는 일이었다.
* * *
수약재로 돌아온 시현은 바로 방 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암자 반대편의 작은 누마루에 올랐다. 마음도 머릿속도 복잡하여 채원과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한숨을 돌리고 싶었다.
세 방향이 뚫린 누마루를 센 바람이 통과해 지나갔다. 그래도 그 바람은 예전만큼 차지 않았다. 봄이 그리 멀지 않았다.
고개 아래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데 목도리에 덧옷까지 챙겨 입은 채원이 누마루를 올라 시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왜 싸웠다고 합니까? 분명 사인의 종자 쪽이 잘못했겠지만. 그 사인을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 어떤 자인지 알 만하지만.”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편견으로 말하지 말라. 꼭 어느 한쪽의 탓이 아닐 것이다. 짐작 가는 이유는 몇 있다만, 그이들이 내게 말하지 않으면 굳이 알려 하지 않으려 한다.”
“아래의 일을 위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자연하다는 정심서의 말씀을 실천하십니까? 하지만 ‘알려고 하지 말고 모른 채로 있으라’는 것은 주해본을 쓴 성윤기 예의 해석이 아닙니까. 저는 조사께서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또한 아래의 고충을 듣고 분란을 단속하는 것도 위의 어짊입니다.”
“꼭 경서 말씀을 따라서가 아니다. 그저 두 사람의 마음과 기분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늘인 몫꾼들 진짜 웬만해서는 집단 안에서 주먹다짐 안 하는데.”
채원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조사의 본뜻과도 위의 어짊과도 아무 상관 없는 말을 했다.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호란도 길도 꾸밈이 없는 이이고 나를 어려워하지 않으니 스스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고 말할 것이다.”
시현은 고개를 돌려 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표현했다.
실제 그 둘은 말로도 표정으로도 무엇을 잘 숨기지 못했다. 여간 중요한 이유가 아니면 시현에게 무엇을 숨기려는 생각조차 애초에 하지를 않았다.
호란도, 길도, 서형도.
서형은 자기가 아들놈 일 물어보더란 이야기를 다른 사람, 특히 호란이나 종자 놈에게 하지 말아 달라고 열두 번씩 부탁했다. 단과 호란은 서형의 장례 때에도 길을 다시 만난 후에도 시현에게 둘의 관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길 쪽에서도 단 한 번도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각자 그리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시현은 네 사람 모두의 뜻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윗사람의 도리 때문은 아니었다.
시현의 표정을 살피며 채원이 말했다.
“옥안에 고뇌가 깊으십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걸리십니까?”
“마음에 걸릴 일이 한둘이겠는가.”
“어찌 그렇습니까? 저는 문께 앞뒤 상황을 듣고 일이 아주 쉽게 풀리겠다 생각했는데요. 그 감람의 반쪽이란 것이 문께 빚진 마음이 있는데다 제 생사까지 그리 가볍게 여긴다 하니 잘된 일이 아닙니까. 전언판으로 그자를 불러내어 죽어 달라 말하면 소매에 얹힌 깃털을 털어내듯 가볍게 근심을 털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