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1
031화
* * *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시현의 고함 소리가 빈 곳간에 쩌렁쩌렁 울렸다.
땅인들은 소리가 새어나갔을까 두려워하며 몸을 사렸다.
“가문이 왜 있고 땅인이 왜 있느냐! 지금 치풍관이 위기를 맞았는데! 싸우고 있는 백성들을 내버리고 도망쳐서 한다는 것이 대를 이어? 그런 가문 이어서 무엇 하느냐!”
“저들은 백성이 아니라 역도입니다!”
선의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래가 위를 거스르고 반역하는데 왜 우리가 아래를 보살펴야 합니까?”
시현이 눈을 홉떴다.
“네가 땅인이면 말해보아라. 치풍관에서 아래가 위를 거스른 것이 먼저냐, 위가 아래를 저버리고 도리를 못 한 것이 먼저냐?”
“버, 법력이 사라진 것은 어쩔 수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네가 알 것이다.”
시현은 선의를 내버려두고 다른 땅인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그가 말했다.
“사방에서 거석이 성하는데 말왕이 구하지 않고 치부에만 열중하니 여덟 관성도시에서 뜻을 모아 말왕을 폐하고 각자 자치하였다. 너희가 치풍관 중시조로 모시는 경세군 무도 그 한 사람이다. 너희는 경씨 세무가 역도라 여기느냐?”
“아닙니다!”
아기를 안은 남자가 분한 듯이 답했다. 아기의 포대기에는 경씨 성이 장식 글자로 수놓여 있었다.
시현이 말했다.
“위가 도리를 하지 않을 때 위는 더 이상 위가 아니다. 지금 너희가 말왕과 무엇이 다르냐. 무슨 염치로 땅인을 자처하며 아래의 공경을 받겠다 하느냐?”
“하지만, 지금 저희가 어떻게….”
선의가 다시 뭐라 하려는데 콰앙 소리를 내며 곳간 문 두 짝이 떨어져나갔다.
땅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곳간 안쪽으로 도망쳤다.
휑하니 뚫린 문 앞에 사비와 하늘인 몫꾼 몇이 서 있었다.
“하!”
곳간 안을 둘러본 사비가 냉랭한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몇 걸음 안으로 들어와 시현 앞에 섰다. 그가 경멸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수행원 놈이 땅인 찌끄러기들을 쏘삭이고 다니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뭘 꾸미나 싶어서 놔뒀더니, 고작 도망갈 궁리를 해? 그것도 이런 때를 틈타서?”
시현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사비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눈에는 살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호란이 언제라도 튀어나갈 태세로 시현 옆에 붙어 섰다.
사비가 호란을 흘낏 보더니 쥔 주먹을 풀고 한 걸음 물러섰다.
“너를 죽이고 싶지만, 그러면 네 호위와 싸워야 하겠지. 지금 우리에겐 그럴 여력도 시간도 없다.”
사비는 차가운 눈으로 곳간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가 결연하게 말했다.
“우린 치풍관을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다. 네놈들은 도망가고 싶거든 도망가라. 나중에 군대든 마력석이든 챙겨서 쳐들어와 봐라. 너희 같이 치졸한 것들 이젠 조금도 두렵지 않다.”
사비는 절뚝이며 곳간을 나갔다. 하늘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문간을 넘기 전 한 사람이 바닥에 퉤 침을 뱉었다.
곳간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시현은 사비가 떠난 문을 바라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선의가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차라리….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이 틈에 빠져나갑시다, 시문 어른….”
시현이 작은 숨을 토하고는 말했다.
“치풍관에 남은 땅인을 모두 모아와라. 나이가 몇이든 가문이 어디든 한 명도 빼놓지 말아라.”
“예, 예!”
선의가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한결 마음을 놓은 얼굴이었다.
단도 사람들을 안내하러 움직였다.
땅인 피난민을 떼거지로 끌어안게 된 건 낭패였다.
하지만 거석이 쳐들어온 것부터가 예상외다.
만사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안 했다.
모로 가더라도 치풍관을 떠날 수 있으면 그걸로 좋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곳간을 나가 뒤뜰에서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성 밖에서 화포 쏘는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 돌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시현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란은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만 봤다.
전시라 노역을 내보내지 않은 덕에 사람들은 금방 모였다.
다들 살았다는 얼굴을 하고 짐을 지고 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선의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전장에 가 있는 의과 관인 둘을 빼고는 모두 데려왔습니다. 그 둘은 상처 치료에 능하니 이곳에 남아도 역도들이 거칠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을 뵙습니다!”
새로 온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려 하자 시현은 손을 저어 말렸다.
“예를 차릴 때가 아니다. 모두 모였느냐.”
“예!”
선의가 다시 한번 금갑에 든 마력석을 내밀었다.
시현은 그것을 받아들고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인 땅인들은 어른과 아이를 합쳐 쉰여섯이었다.
시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 알다시피 지금 치풍관에 큰 위기가 닥쳤다. 몸을 피해 떠나리라 생각하고 귀물과 짐을 챙겨 온 이들이 보이는구나.”
단이 미간을 좁혔다. 시현이 꺼낸 서두는 그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시현이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우리는 치풍관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다 함께 치풍관을 지킬 것이다.”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시현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손에 쥔 것을 들어 모두에게 보였다. 조금 전 선의가 건넨 금갑이었다.
“다행히 여기 편씨 선의가 귀한 마력석을 구해왔다. 비록 작은 힘이나 법력은 다루기 나름이다. 내가 이것을 잘 써서 치풍관을 구하고, 백성을 구하고, 너희 모두를 구할 것이다.”
사람들은 당황하며 시현의 기색을 살피기 바빴다.
그가 진담인지 아닌지 가늠이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이 4년간 완씨 시문의 전공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퍼졌고 남운관과 가까운 치풍관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대단함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있는 마력석은 단 한 개뿐이었다.
다시 성 밖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시현이 웃으며 마력석을 흔들어 보였다.
“왜, 이것 하나로 다 이루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느냐?”
“화, 황송하오나….”
선의가 주저하며 말끝을 흐렸다. 시현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떠냐. 이것 하나로 부족하다면, 둘이 있으면 족할 것이다. 혹시 너희 중에 누구 마력석을 가진 자가 있다면 나에게 건네 도시를 구하는 데 힘을 보태지 않겠느냐.”
호란은 그제야 시현의 속셈을 알고 입이 벌어졌다. 선의도 낭패한 얼굴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시현이 아니라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찌나 맹렬하게 시선이 오가는지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시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비상한 때에 몸을 지킬 도리가 있을까 하여 마력석을 숨겨 지닌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마력석이 있다 한들 거석과 싸우기는 힘에 겨우니 이제껏 나서지 못한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시현은 등을 곧게 세웠다.
시종 부드럽게 웃던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엄하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너희의 도시가 위기에 처했고. 백성이 싸우고 있으며 내가 문으로서 방도를 내고자 하고 있다.
지키고자 마음을 내면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위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평생에 부끄러운 일이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선의가 황급히 사정했다.
“문이시여, 정말로 가진 마력석이 없습니다!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시현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의가 변명 같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력석은 기운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금은보석으로 감싸 패물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도들이 패물이란 패물은 모두 빼앗아가 남은 것이 하나도….”
“아닌 것을 안다.”
시현이 말을 끊었다.
“일각에서 격 없는 자나 마력석을 쓴다 하며 마력석 지니기를 부끄러워하는 습속이 있는 것을 안다. 눈에 띄는 패물 만들기를 피하고 돌 자체를 가공하거나 각인을 넣어 지니는 경우가 숱하였다.
여기도 마찬가지겠지. 하늘족이 마력석을 잘 모르는데 어찌 전부 찾아냈겠느냐.”
선의가 다시 항변했다.
“있다 한들…. 있다 한들 마력석 한 개가 지닌 법력은 불꽃 한 줌 일으키는 게 고작입니다! 몇 개 더 모은들….”
“무엇인들 못 하겠느냐. 내가 법력은 쓰기 나름이라 했다.”
시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좌중은 이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시현이 슬쩍 웃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중에 문이 불꽃 한 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한 이는 없느냐?”
“문의 영을 받듭니다.”
무리 가운데에서 호란 또래의 소녀가 한 사람 걸어 나왔다.
선의가 처음 피난할 이를 골라 왔을 때부터 있던 소녀였다.
소녀는 높이 묶었던 긴 머리를 풀어 내리더니 머리끈을 손에 들었다.
폭 넓은 색동 끈 가운데에 두툼하게 장식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저는 강씨 려인의 딸 강희아입니다. 아비가 죄를 지어 수치를 입었고 아비 어미가 죄인으로 죽는데 혼자 살아남아 다시 수치를 입었습니다.”
희아는 시현에게 머리끈을 내밀었다.
장식 매듭이 무언가 무게 있는 것이 든 것처럼 축 쳐졌다.
시현은 말없이 그것을 받았다.
끈을 놓을 때 희아의 손이 떨렸다. 그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부모님이 제 목숨을 살리라 당부하고 건네신 유품이나… 더 이상 부끄러움을 끼치고 살아남은들 그것이 산목숨이겠습니까.”
“너는 살 것이다.”
시현이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이것으로 치풍관을 지키고 너 또한 지킬 것인즉 이 돌은 네 부모의 원대로 쓰일 것이다.”
희아는 돌아서더니 땅인 무리의 몇 명에게 눈길을 던졌다.
시선을 똑바로 받은 이들이 안절부절못하더니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들 역시 쌈지나 약갑 등 수수한 물건으로 위장한 마력석을 꺼내 바쳤다.
시현은 하나하나 받으며 이름을 묻고 그들을 격려했다.
“잘하였다. 너희는 모두 살 것이다. 또한 이것으로 내가 치풍관을 지키면 너희도 치풍관을 지키는 데 힘을 대어 도리를 한 것이다. 내가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줄줄이 나오는 마력석을 다 받기에 시현의 손이 모자라 단이 걸낭을 비워 건네야 했다.
수십의 땅인들 두 명 중에 한 명은 마력석을 숨겨 가지고 있었기에 호란은 어벙해졌다.
단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마력석을 거둔 시현이 선의를 향해 돌아섰다.
그가 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손에 들린 것은 여러 색깔 옥으로 된 패였다.
시현이 패를 치켜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편씨 선의는 들어라. 치풍관 수성을 위해 네가 숨겨 지닌 마력석을 모두 징발하겠다. 이것은 문령이니, 따르지 않으면 네 격을 박탈할 것이다.”
“무, 문이시여….”
선의가 허둥지둥 고개를 조아렸다.
뭐라 말하려고 입을 뻐끔거리는 그에게 시현이 말했다.
“없다 말하지 마라. 적게 가졌다 말하지도 마라. 의약방은 평시에도 응급한 환자를 대비해 마력석을 비치하는 곳임을 안다.”
선의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가 꽉 끌어안고 있는 약함에 눈길을 주면서 호란이 말했다.
“시문 님, 힘으로 빼앗을 수 있어요.”
“아니다. 저자에게 자기 긍지로 선택할 기회를 주어라.”
시현이 싸늘하게 말했다.
“긍지란 것이 있다면 말이다.”
선의는 결국 무릎을 꿇고 약함을 열었다. 칸막이를 빼내자 숨겨진 공간에서 마력석 일곱 개가 나왔다.
마력석을 모두 받아든 시현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싸우러 가겠다. 남은 너희는 몸을 안전히 하되,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는지 생각하고 움직이거라.”
그가 몸을 돌려 호란을 보았다. 눈빛이 긴장과 결기로 형형했다.
“호란, 가자! 나를 전장에 데려다 다오.”
“네!”
호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