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10
310화
* * *
초암읍성 치읍감이 허둥지둥 반대의 말을 늘어놓았다.
“문이시여, 말씀드리기 어렵사오나 홍초읍은 재화도 병사도 모자란 작은 소읍입니다. 위의 대업을 보조하기는커녕 하룻밤 모시기도 마땅치 않습니다. 제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놓았습니다. 초암읍성은 귀수관 북방 방어의 한 축을 맡은 곳으로 병사와 마력석이 가장….”
“허나 위께서 뜻이 있어서 결정하신 일, 저희가 토를 달아서는 안 되겠지요.”
말을 끊고 나선 것은 백로읍성 치읍감이었다.
당황도 잠시, 백로 치읍감은 빠르게 태도를 바꾸었다. 말마따나 초암읍성은 법군도 병사도 재화도 충실해 제대로 경쟁하면 백로가 밀린다. 그리고 홍초읍과 백로읍성은 지척이다. 홍초읍까지 문을 수행하기만 해도 반 이상 성공, 가는 길에 다시 권할 기회도 있었다.
홍초읍 박이슬은 문과 안면이 있다고 우겨대길래 데려오기는 했으나 워낙 한미한 인사라 별 기대가 없었는데 뜻밖의 횡재였다.
그가 올라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시현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무엇이나 위의 뜻대로 하소서. 가시지요. 저와 제 병사들이 앞길을 잡겠습니다.”
초암 치읍감의 얼굴에 억울과 분통이 찼다. 하지만 시현의 다음 말은 백로 치읍감까지 당황하게 했다.
“길잡이는 내게도 있으니 안내도 호위도 필요 없다. 양 치읍감은 박이슬만 남겨두고 휘하를 이끌어 최대한 빠르게 임지로 복귀하라.”
“문이시여, 어인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문을 모시기 위해….”
“내가 너희를 부른 바가 없고, 너희는 귀수관 총령부 관인으로서 맡은 바 소임이 있다. 내가 영을 내려 그대들이 자리를 유지하게 허하였으나 그것은 변고의 와중에 일을 하던 자가 계속하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해서다. 하루 넘게 제 일을 내팽개치고 한길에서 나를 기다리라 그리한 것이 아니다.”
“…….”
“속히 임지로 돌아가 책임을 다하라. 내가 다른 말을 더 하기 전에.”
두 치읍감은 물론 그 뒤에 선 다른 관인들까지 얼굴에 핏기가 내렸다.
시현의 표현은 관계 기준에선 충분히, 혹은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다. 폐격자란 말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았다 뿐 병사들 앞에서 ‘격도 없고 일도 안 하는 놈들’ 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더 들을 ‘다른 말’이란 잘리는 것밖에 없었다.
귀수관 총치부와 총령부 모두가 문에게 무릎 꿇고 항복한 것은 이곳에도 전해져 있었다. 시현이 동네 치읍감을 손짓으로 파면하든 아무나 찍어서 자리에 올리든 더 이상 월권이나 자치권 침범이 아니었다.
시현이 덧붙였다.
“오는 길에 발 빠른 관병이 오가며 내 진로를 계속 살피던 것을 알고 있다. 내 마음에 거슬리니 일체 그만두라. 관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내가 사람과 문서를 보내 청할 것이다.”
“말씀, 말씀 받잡겠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두 치읍감은 예만 겨우 올리고 허둥지둥 돌아섰다.
치읍감 일행이 어느 정도 떨어지자 율비가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가 특유의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문께서 제 마음을 읽으신 줄 알았습니다. 제가 백로 쪽 사람으로 왔지만 사실 초암과 백로 양쪽을 다 떼어놓고 싶어한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그대에게 말을 걸어도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아무 암시를 주지 않기에, 관인들 앞에서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겠거니 하였다.”
“과연 영명하십니다.”
율비는 멀어져 가는 두 치읍감 일행의 꽁무니를 보며 상글거렸다.
“그나저나 정보를 수집할 줄도 모르고 수집해도 써먹을 줄 모르는 분들입니다. 정말로 문을 모시고자 한다면 으리으리한 마중 행렬이 왜 필요합니까. 우는 시늉 잘하는 군인에게 너덜너덜한 옷을 입히고 읍성이 함락 직전이라고 구원을 청하면 빛보다 빠르게 달려오실 것을.”
시현이 율비를 슬쩍 째려보았다.
“그리했다가 거짓임이 밝혀지면 이후를 감당하겠느냐.”
“그래도 일단 모시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다음은 상황 돌아가는 거 보면서 또 어떻게 하는 거죠.”
시현은 율비가 단과 비슷하다고 했던 것을 마음속에서 절반쯤 취소했다. 저질러 놓고 임기응변하는 기본 틀은 비슷한데 간담의 크기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일행은 두 치읍감 무리와 거리를 벌린 후 다시 이동하기로 하고 일단 대로를 벗어났다.
단은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잡아 막사를 쳤다. 자리에 앉자 율비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위께 외람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연구소까지 직선거리로 오는 것은 피해주십시오. 문께서 저희 지은학당을 찾으신다는 것이 귀수관 관군들에게 알려지면 저희의 위험이 커집니다.”
“아, 그런 문제인가. 미리 신경을 썼으면 좋았겠구나. 채원을 만났을 때 딱히 주의하는 말을 듣지 못하여 괜찮은 줄 알았다.”
“채인께선 안 그렇게 보여도 센 척 빼면 죽는 분이십니다. 아쉽다 어렵다 우리 사정 좀 봐 달라 소리를 생각만큼 잘 못 하시죠.”
율비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서 덧붙였다.
“대관성에 법력이 돌아온 후 관의 추적과 핍박이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혹시라도 저희가 문과 접촉하여 협력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더군요.”
“그 일은 내가 바로잡았다. 더구나 대관성은 지금 바깥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니 이후로는 조금 상황이 나아지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을 겁니다. 변고 후 각 관성의 땅인들이 가장 목매는 것은 위로서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지은학당이 옳았다고 인정하면 저들에게 일어날 변고를 방치한 책임이 생깁니다. 더구나 지금은 저들이 격까지 잃었지요. 자리가 흔들리는 만큼 더 저희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내가 일을 고치겠다고 한 것이 그대들에게는 오히려 어려움을 끼쳤구나.”
“아뇨? 속 시원해졌으니까 괜찮습니다!”
율비가 특유의 웃는 얼굴로 답했다.
시현은 마음이 좋지 않았으나 그로서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운모든 누구든, 다시는 돌 인간의 편에 서서 일행을 공격하는 사람이 없도록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그렇다고 변고 중에 수만 백성의 질서를 유지하고 거석에게서 성과 수원을 지킬 관인들을 전부 박살 내 버릴 수도 없었다.
실제 전력을 줄이지 않으면서 확실한 처벌이 되는 일은 격을 폐하는 것뿐이었다.
시현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율비가 미소를 띠었다. 평소의 천연덕스러운 표정과는 조금 달랐다.
“심려 마소서. 문께서 어찌하시거나 저희의 처지는 같았을 것입니다. 흰바위마을에서 문을 뵙고 연구소로 돌아가는 길에 채인께서 저한테만 살짝 말씀하시더군요. 문을 도와서 변고를 바로잡는다고 해도 하씨 집안과 지은학당이 귀수관에서 원래의 지위를 되찾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문령으로 사면을 받거나 공을 인정받은들 사람의 앙심과 배척을 피할 길은 없으니 아예 짐 싸서 남운관에 빌붙으러 가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요.”
율비는 말끝에 농담조를 섞었지만 시현은 그게 농담이 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땅인에게 법술 능력과 격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집안과 집안이 뿌리내린 지역 기반이었다. 자식을 법술사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과 노력과 인맥이 다 필요했다. 벼슬을 하려면 당연히 신원이 보증되어야 했다.
살던 곳을 버리는 것은 집안과 지위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곳에 터를 잡은들 예전같은 일가를 이루기는 불가능했다.
귀수관의 하씨는 남방에 살던 시현도 선대 몇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명문가였다. 그 가주이자 극상에까지 올랐던 이가 변고를 바로잡고 돌 인간을 추적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있었다.
“채인은… 그대들은 무엇을 바라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그것이 위로 난 자의 도리이고 격에 달한 이의 할 일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뭇 법술사가 법술을 다루고 격에 달한 것은 모두 선현의 가르침을 계승한 덕이니, 힘만 부릴 것이 아니라 선현의 바른 뜻을 함께 따르는 것이 후학의 할 일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율비의 대답에 시현은 잠시 숙연해졌다. 채원의 말은 시현도 항상 지향하는 바였지만 삶을 바쳐 실행하는 무게 앞에서는 치하는 물론 동의의 말조차 가볍게만 느껴졌다.
분위기를 바꿀 겸 시현이 율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대의 진짜 이름을 듣지 못했군. 그대는 채인과 상당히 돈독한 듯하나 형제자매로 보이지는 않던데, 그대 역시 하씨의 일가인가?”
율비가 아까보다 조금 뻔뻔한 미소를 띠었다. 구석에서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란만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비슷한 것입니다. 이왕 문 앞에서 가명을 대는 죄를 지은 것, 그대로 한율비의 이름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차마 율지라 불릴 수는 없고, 율비라 이름 부르기 불편하시거든 별명으로 속필이라 불러주십시오.”
시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짧게 스쳤지만 채원과 율비는 돈독하면서도 격 이전의 위계가 확실해 보였기에 직계가의 가주와 먼 방계가에서 직계가의 신세를 지는 식솔 사이가 아닌가 했다.
자식에게 재능이 있는데 자식을 법술사로 키울 돈과 인맥은 없는 경우, 땅인 부모들은 아이를 어릴 때 직계가에 보내 가주 후계자의 보좌로 키우는 경우가 있었다. 흔한 일이고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숨기려고 한다면 굳이 캐낼 일도 아니다. 어쩌면 혼외자이거나 더 복잡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복잡한 사정이라는 것이 하씨는커녕 땅인조차 아니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시현은 단지 사생활을 존중하자는 마음으로 질문을 더 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이 물었다.
“그러면 어떤 경로로 연구소에 가야 합니까? 나리께선 귀수관 분이시니 더 잘 알겠지만 수레가 지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습니다. 대로를 이용하면 길을 아무리 돌아도 마지막에는 눈에 띌 겁니다.”
단에게서 나리 소리를 듣자 율비의 얼굴에서 뻔뻔함이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가 쾌활하게 말했다.
“아! 그건 걱정 말거라. 지도에 실린 것 말고도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몇 군데 있어.”
“그런 길도 알 사람은 다 알 텐데요.”
“그래도 그런 길을 옮겨 다니며 빙 돌면 방향을 어림잡기는 어렵지. 그리고 굴길도 쓸 거란다.”
“굴길이요….”
단이 이해했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시현이 물었다.
“굴길이라면 산의 한중간을 뚫어 만든 통로를 말하는 것이지? 기록에서는 몇 번 보았으나 실제로 쓰이는 줄은 몰랐다.”
당연하지만 경지에 달한 토법사는 산을 뚫어 길을 낼 수 있다. 하지만 경지에 달한 토법사 나으리는 대체로 사방으로 길 잘 뚫린 대관성에 사시기 때문에 산간 오지로 토목 공사나 유지 보수를 하러 오지 않는다.
정 산간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면 등짐을 진 하늘인들이 뛰어다니면 될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 굴길을 만들어서 쓰는 곳은 거의 없었다.
옛날 나라가 여럿 있고 전쟁이 잦던 시대에 기습적인 군사 이동을 위해 몇 번 쓰인 기록이 있을 뿐이었다.
율비가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저희 지은학당에서 해냅니다! 대량의 마력석을 몰래 북방으로 이송하려니 아무래도 필요했죠.”
“그거 안전한가요? 무너지지 않아요?”
호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안전하지. 그리고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시문께서 계시고 마력석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생매장을 당해도 산을 통째로 뒤집고 나오실 분이 아니냐.”
“그렇기는 한데… 굴길이고 갱도고 저는 땅속에 들어갔다가 좋은 꼴을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어서요.”
단이 음울하게 말했다. 그건 호란도 시현도 동의했다. 영문을 모르는 율비만 눈을 깜박였다.
(계속)